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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48화 (48/143)

48화

“강차헌 에스퍼!”

A 구역, 연우는 차헌의 개인 훈련장에 들어서자마자 차헌을 찾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아직 훈련이 안 끝났나? 연우가 숨을 고르며, 더운 열기를 빼내기 위해 훈련복을 펄럭거리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참…. 언제 봐도….

연우의 갈색 눈이 바쁘게 움직이며 무질서하게 정리된 훈련장을 훑었지만, 낯선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C 구역에서 기다릴 걸 그랬나.

훈련 내내 누가 아이템을 획득했을까, 토론하던 사람들은 훈련소장 몰래 내기판까지 벌였다. 자신은 차헌에게 투자했다며 키득거리던 박서현은 훈련 종료종이 울리자마자 훈련장 입구로 달려 나갔다. 목이 빠져라 차헌을 기다리던 몇몇 에스퍼들은 빨리 가서 물어보라며 연우의 등을 떠밀었다.

평소라면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차헌을 기다렸겠지만, 미래를 바꾸려고 의도한 게 처음이다 보니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연우가 원하는 대로 미래가 바뀐 건지, 그로 인해 어떤 인과율의 부메랑을 맞을지 궁금해서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A 구역 포탈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자, 납품을 끝내고 퇴근하던 전도현이 문을 열어줬다. 사격 시험 결과가 어떻게 되었냐는 말에, 전도현은 생활계가 무슨 사격 시험이냐며 깔깔거리며 그대로 퇴근해버렸다. 그리고 연우는 단숨에 차헌의 훈련장으로 달려왔었다.

다시 한번 보관함을 찾아 훈련장을 훑어보던 연우는 습관적으로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이템을 획득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강차헌이 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사실에 이상원의 자존심이 뭉개졌겠지.

이상원의 인내심은 그리 긴 편은 아니기에 작은 도발에도 쉽게 흥분했다. 그 성질머리를 하고도 토벌대 대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이상원의 고삐를 쥐고 있는 그의 부모님 덕분이었다. 그 고삐를 놓치게 한다면…. 그것도 아니면 이상원이 제 분을 못 이기고 그 고삐를 스스로 벗어던진다면, 차헌의 앞길은 좀 더 평탄해지겠지.

하지만 부모의 정이라는 게 그렇다.

이상원이 아무리 난동을 부려도 감싸주던 게 그들이었다. 뭐, 덕분에 귀한 아드님께서 스스로 드래곤의 아가리로 걸어간 것도 모자라, 다른 이들까지 저승 길동무로 삼게 만들었지만.

그러니 이상원이 스스로 고삐를 벗게 만들어야 할 텐데….

“형?”

마나볼을 크기 별로 정리하던 연우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연우는 손바닥에 남은 손톱자국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차헌의 손목부터 확인했다.

“형이 여기 왜 있어요?”

“어떻게 됐어요?”

동시에 질문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섞였다. 연우는 훈련이 끝나고 왔다며 대답했지만, 차헌은 대답 대신 눈썹만 쓱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 모습에 연우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이 자식이? 연화였다면 당장 눕혀놓고 네가 오빠를 속일 수 있을 것 같냐며 따졌겠지만, 차마 차헌에게는 그럴 수 없어 연우는 눈으로만 차헌을 살폈다.

“아니, 뭐….”

웅얼거린 차헌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까만 머리카락이 손 아래로 느긋하게 흩어지는 모습에 연우는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한국인 빨리빨리 몰라? 지금이라도 재촉해야 하나 고민하던 연우를 쓱 내려본 차헌이 연신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왜 저래?

그 순간, 차헌의 훈련복 소매가 올라가며 반짝거리는 팔찌가 드러났다.

“와!”

연우의 반응에 차헌은 그제야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팔찌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느릿느릿 부풀어 오른 팔찌는 꾸물거리며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제가 의도한 모양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무언가를 만들어낸 차헌은 급하게 연우의 눈을 가렸다.

“아, 처음이잖아요. 처음 한 거잖아요. 보지 마요.”

“알았어요.”

수고했다고, 잘하고 왔다고 박수를 짝짝 쳐주자 차헌의 얼굴이 겨우 풀렸다.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찌를 노려보던 차헌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 진짜 형이 아까 그 새끼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연우의 말에 차헌이 씩, 웃으며 설명했다.

이상원의 차례가 끝나고 자세를 잡던 차헌은 총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우가 안 보여서인가. 뭔가 허전해서 손끝으로 총을 더듬어보던 차헌은 그대로 이능을 사용했다.

차헌의 발끝에서 피어난 얼음꽃은 한쪽에 서 있던 에스퍼에게 달려들었다. 얼음꽃에 묶여 꼼짝도 못 하던 에스퍼는 이게 무슨 짓이냐며 소리를 질렀지만, 차헌은 짜증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내놔요.”

그 말에 마른침을 삼키던 에스퍼는 훈련소장에게 항의했다. 이능 조절도 제대로 못 하는 에스퍼가 총을 쏘면 얼마나 잘 쏘겠냐며 입을 놀려댔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불안하니 먼저 나가보겠다는 에스퍼를 향해 차헌이 손끝을 까딱거렸다.

차헌의 의지에 따라 피어난 얼음꽃이 에스퍼의 보조 가방에서 만개했다.

“내가 열까요? 그쪽이 열래요?”

무슨 일이냐며 다가온 센터장은 에스퍼에게 가방을 열어보라며 손짓했다. 버티고 있던 에스퍼 대신 훈련소장이 가방을 열자, 총알 여섯 개가 발견되었다.

A 구역 에스퍼들은 자신보다 더 섬세한 이능을 사용한다고, 혹시 모르니 총을 점검할 때마다 마나를 묻혀놓으라 경고했던 연우의 말을 떠올린 차헌은 얼음꽃을 회수했다.

형 말을 듣길 잘했다. 연우의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게 아니라 떡집이 생기는 수준이라 꼬박꼬박 따를 수밖에 없었다.

훈련소장이 건네는 총알 대신, 새 총알을 장착한 차헌은 다시 한번 총을 점검하고 과녁판을 확인했다. 발끝으로 가볍게 바닥을 두드린 차헌이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이번에도 이상원과 똑같은 점수를 받았지만, 센터장은 차헌이 우승했다며 공포했다. 차헌이 총을 쏘는 동안 총알을 숨긴 공간계 에스퍼가 토벌대라는 걸 알아챈 센터장은 이상원을 향해 역정을 냈다. 에스퍼는 제가 꾸민 일이라고, 이상원 에스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했지만, 센터장은 팀의 리더가 팀원을 어떻게 관리하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돌변하더니 수고했다며, 센터장은 차헌의 어깨를 두드린 다음 손수 차헌의 손목에 팔찌를 걸어주었다.

“그렇게 된 거죠.”

뿌듯함에 가슴을 펼치던 것도 잠시, 문을 콩콩 두드리는 소리에 차헌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왜 오고 지랄. 욕을 씹어뱉은 차헌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 저렇게 싫으면 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면 될 텐데. 은근히 착한 구석이 있다니까.

“축하하네. 강차헌 에스퍼.”

센터장은 과일 바구니를 차헌에게 내밀었다가, 차헌이 받지 않자 하하 웃으며 옆에 내려두었다. 색이나 크기가 제멋대로인 것이 던전 부산물인 듯했다. 부센터장이 어떤 짓을 했는지 아직 모르나? 알고 있으면서도 저걸 가지고 온 거면 진짜 악질인데.

“아. 한연우 에스퍼도 와 있었군.”

센터장이 훈련장에 들어오던 순간부터 이미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도 센터장은 연우를 이제 막 발견했다는 듯 인사를 건네다 차헌 쪽으로 눈짓했다.

저번에 다른 길드와 계약할 예정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했던 걸 확인했냐는 뜻이겠지. 연우가 입꼬리만 올리고 있자 부센터장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왜 오셨는데요?”

부센터장은 돌아서며 환하게 웃었다.

“하하. 우리 강차헌 에스퍼는 능력처럼 성격도 아주 시원시원하네요. 다름이 아니라, 강차헌 에스퍼가 마나 아이템을 처음 다뤄볼 테니 방법을 알려주려고,”

“됐어요. 가세요.”

부센터장의 말을 끊은 차헌은 열려있는 문을 가리켰다. 얼른 안 나가고 뭐 하냐는 시선에 센터장이 앞으로 나섰다.

“아이템 다루는 법이야 훈련하다 보면 적응할 테고, 그 전에 아이템 등록은 했나?”

안 했다고 대답하자 허어, 그런 것도 안 알려주고 말이야. 혀를 찬 센터장이 부센터장에게 눈짓했다. 분실이나 도난 등 각종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아이템 등록을 해야 한다는 말에, 차헌은 순순히 부센터장의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본 연우는 작게 감탄했다. 차헌을 센터에 묶어두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이 있었다.

“등록하려면 일단 아이템의 이름을 지어 줘야 하는데, 생각해 둔 거 있습니까?”

이름? 고민하던 차헌의 눈앞에 이상원이 나타났다. 내 훈련장이 무슨 만남의 광장이야? 이상원은 차헌에게 꽃다발을 건네다 말고, 훈련장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제일 먼저 축하하러 온 줄 알았는데. 먼저 오신 분들이 있었네요?”

센터장을 빤히 바라보던 이상원은 차헌 쪽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방긋 웃었다.

“아이템 등록하러 가요? 와, 드디어 강차헌 에스퍼가 정식으로 센터 소속이 되는 날이니 작게 파티라도 해야겠는걸요?”

그 말에 차헌이 이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연우를 쳐다봤다. 왜 날 봐? 연우가 센터장을 보자, 연우를 따라 고개를 돌린 차헌은 센터장을 노려봤다.

“몰랐어요?”

에스퍼가 획득한 아이템은 에스퍼 법으로, 에스퍼가 속한 단체가 소유권을 얻는다. 아이템을 사용하려면 해당 단체의 소속이어야 하니, 아이템을 등록하기 위해서는 센터와 계약부터 해야 했다. 그 말을 들은 차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팔찌를 풀었다.

“됐고, 그냥 당신이나 가져요.”

차헌의 말에 이상원의 입꼬리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이상원을 향해 팔찌를 던진 차헌은 이제 나가라며 손을 휘저었다.

“아니, 뭐. 당장 등록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래도 강차헌 에스퍼가 노력해서 얻은 아이템인데, 몇 번 사용은 해봐야지.”

굳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이상원에게서 팔찌를 회수한 센터장은 차헌의 손에 팔찌를 내려놓았다.

“아직 마음의 정리를 못 한 모양인데….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고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까,”

“네. 2주 남았네요. 이번에도 방해하실 건 아니죠?”

“천천히 생각해보게. 다른 곳이라고 여기랑 다를 게 없을 거야. 적응하기도 힘들 거고.”

차헌은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린 채로 불청객 셋을 향해 손짓했다. 마지막까지 설득해보려던 부센터장을 밀어낸 차헌이 자물쇠가 없는 문을 노려보았다. 에스퍼의 안전 어쩌고 하면서 문고리가 없다더니, 그것도 거짓말 아냐?

망설이는 차헌 대신 연우가 차헌의 손목에 팔찌를 채워주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팔찌가 더욱 돋보이도록 훈련복 소매를 접어 올렸다.

“이렇게 티를 내야 해요?”

떨떠름한 목소리에 연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나 가지라며 훌륭하게 도발했으니, 이제 이상원을 조금만 더 자극하면 될 것 같았다. 좀 민망한데. 웅얼거린 차헌은 센터장이 서 있던 자리를 노려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제가 다른 길드랑 계약할까 봐 저러는 거죠? 저럴 거면 그동안 좀 잘할 것이지 갑자기 왜 저런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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