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강차헌 / 20살 / S급 공격계 - 빙결]
보고서를 살피던 센터장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조금 더 압박했어야 했나…. 고민하며 보고서를 넘기던 센터장이 무거운 한숨을 흘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강차헌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었다. 각성할 때 누군가를 다치게 만든 공격계 에스퍼들이 그러하듯, 강차헌 역시 제 이능을 극도로 두려워했었다. 그런 강차헌을 설득해 센터에 데려왔을 때부터 그는 센터 소속이었다.
그런데도 양심 없는 몇몇 길드는 아직 계약서에 도장도 안 찍었는데 무슨 소리냐, 계약이 확정되었다면 왜 협회에 등록이 안 되어있냐, 센터와 계약이 끝나면 우리 길드도 한번 생각해보아라. 홍보만 하려는 거다, 각종 핑계를 대며 강차헌과 접촉하려고 했다.
문제는 차헌이 그 사람들과의 만남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거다. 어떻게 차헌을 센터에 데리고 왔는데 그 인간들에게 순순히 넘겨줄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이상원과 상극인 에스퍼를 기다려왔었고, 드디어 나타난 차헌을 통해 오랜 꿈의 결실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단 차헌이 제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 하니, 차헌이 실수하기만을 기다렸다. 윤석현에게 그랬듯이 실수를 덮은 뒤 위로하고 달래주며 차헌을 장기 말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차헌의 실수 빈도가 낮아지고, 이제는 자유자재로 이능을 다루기까지 했다. 센터장은 혀를 찬 뒤 던지듯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능을 다루다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며 제대로 된 훈련도 시키지 않았는데.
-센터장님. 라운드 길드 장에게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머릿속으로 전달되는 소식을 듣자마자 두통이 일었다. 이렇게 순순히 그들에게 강차헌을 뺏길 수는 없었다. 센터장은 부재중이니 나중에 연락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보고가 들려왔다. 이에 한숨을 내쉰 센터장이 들여보내라고 대답하며 문을 바라봤다.
“좋은 오후예요, 센터장님.”
이상원은 센터장실을 둘러보더니 여유로운 태도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곤 앉지 않고 뭐하냐는 듯 제 앞자리를 가리켰다.
건방진 새끼. 이를 간 센터장이 자리에 앉자 이상원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강차헌 에스퍼는 왜 가상 던전 훈련에서 제외되었죠?”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아직 훈련 중이니까.”
“이상하네요. 나는 센터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가상 던전 훈련부터 했던 것 같은데. 그때 제 나이가 17살이었나…. 토벌대의 숫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센터에게 이득 아닌가요? 강차헌 에스퍼도 실전 경험 있는 게 이득일 거고.”
은근슬쩍 말을 낮추는 이상원을 바라보던 센터장은 말없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누가 보면 후배를 챙겨주는 선배라고 생각하겠지만, 이상원은 차헌이 훈련에 실패하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 중 하나였다.
가상 던전이라니. 센터장은 차헌의 이능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모든 만남을 거절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차헌이 가상 던전 훈련을 받게 되면 센터장의 거짓말이 들통나게 된다. 그래서 훈련 막바지에 차헌을 잠깐 집어넣었다가 실패하도록 만들려 했다.
훈련에 실패한 에스퍼가 다음 훈련을 받기 위해서는 내년 신입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니, 그때까지 차헌을 잡아둘 수 있을 거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센터장은 이상원을 바라봤다.
그 사이 게이트가 발견된다면 이상원은 차헌을 압박할 게 뻔했다. 평소라면 쉽게 해결했을 토벌도 시간을 끌거나, 누구 하나를 다치게 만든 다음 울상을 지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 무기가 있었다면 좋았을걸, 그럼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나왔을 텐데. 하며 원망의 화살을 차헌으로 돌리겠지.
이상원의 선동에 던전에 갈 일도 없는 에스퍼가 무기가 왜 필요하냐는 여론이 생길 것이고, 실제로 이러한 압박을 이기지 못한 에스퍼들이 제 손으로 무기를 넘겨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는 이상원에게 센터를 맡길 순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강차헌을 훈련 시킬 계획이 없다고 말하면 이상원은 그럼 왜 무기를 지급한 거냐고, 혹시 강차헌 에스퍼가 특권을 누리는 거냐며 이상한 여론을 만들어낼 게 분명했다. 그런다면 차헌은 망설임 없이 무기를 양보할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 차헌을 잡아둘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게 된다.
“...너무 이른 게 아닌가 싶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상원 에스퍼가 그렇게 권하니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고개를 끄덕인 센터장은 바로 차헌을 호출했다.
잠시 뒤, 연우와 함께 들어온 차헌은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으로 센터장을 쳐다봤다. 무슨 일로 불렀냐는 차헌의 말에 센터장은 모든 훈련 과정이 끝났으니 가상 던전 훈련을 받아보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가상 던전 훈련은 던전과 비슷한 환경으로 꾸며놓고 던전 마나에 적응하는 법과 마수를 처리,”
“뭔지 알아요.”
이상원의 말을 끊은 차헌은 소파에 몸을 묻으며 다리를 꼬았다. 대놓고 듣기 싫다는 태도에 너무 오냐오냐 대한 게 아닌지 후회하던 센터장은, 길잡이가 필요할 테니 자신과 함께 들어가는 게 어떠냐는 이상원의 제안에 탁,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은근슬쩍 자신의 팀으로 유입할 생각인가 본데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이상원의 토벌대가 아니라, 강차헌을 위한 토벌대가 필요했다. 머릿속으로 조합을 맞춰보던 센터장은 손을 어쩔 줄 모르는 연우를 쳐다봤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한연우를 챙기는 걸 보니 꽤 친한 건 분명했고, 보호자라고 생각하며 의지하는 모양이었다.
가상 던전도 던전이니 다녀오면 둘 사이의 결속력이 더욱 단단해지겠지. 한연우를 팀으로 붙여준다고 했을 때 강차헌이 센터에 남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길잡이로 가이드를 붙여줘서 센터 소속 가이드와 연대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차헌이 센터와 계약하게 만들어야 했다.
“한연우 에스퍼와 같이 다녀오는 게 어떤가?”
센터장의 말에 차헌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일어났고, 연우는 이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센터장을 쳐다봤다.
“가벼운 테스트니 그렇게 난이도가 높지도 않을 것이고. 이번에 보니까 가상 던전 훈련에서 좋은 점수도 받았던데 어차피 받을 훈련 한다고 생각하고 가볍게 다녀와요. 소풍처럼.”
“그게 싫으면 저랑 가도 되는데.”
“싫어요.”
단박에 거절한 차헌은 팔짱을 끼고 훈련소장을 노려보았다.
“그거 제가 안 해도 되는 거잖아요. 제가 얻는 게 뭐 있다고.”
코웃음을 친 차헌은 연우에게 손을 뻗었다. 당장이라도 나갈 듯한 차헌의 행동에 훈련소장은 마지막 제안을 했다. 자신이 손해를 볼 게 분명했지만, 이대로 차헌을 놓칠 수는 없었다.
“이 훈련에 통과한다면 사관학교 졸업장을 지급하겠네.”
* * *
“아니, 형은 대체 뭐예요?”
중앙 구역을 빠져나올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차헌이 포탈을 통과하자마자 연우에게 물었다. 팔찌를 노려보는 이상원의 표정이 고소한 것도 하루 이틀이라 차헌은 팔찌를 숨기고 다녔고, 그때마다 연우는 차헌의 훈련복 소매를 걷어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말에, 연우는 사관학교 졸업장을 받고 싶다면 참는 게 어떻냐며 차헌을 구슬렸다. 그때도 팔찌와 사관학교 졸업장이 무슨 상관인지 몰랐는데, 무슨 훈련만 하면 사관학교 졸업장을 지급한다는 이 상황이 이해하기 더 어려웠다.
차헌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연우는 훈련장에 간 뒤 감각을 넓혀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연우는 입을 열었다.
“이상원 에스퍼는 원하는 모든 걸 손에 넣어야 만족하는 사람이고, 센터장님은 그런 이상원을 탐탁지 않아 했어요. 하지만 이상원 에스퍼만큼 뛰어난 에스퍼가 없으니 참아주고 있었는데, 쨘. 하고 강차헌 에스퍼가 나타난 거죠.”
“차헌이.”
“음. 그래 차헌이 네가 나타난 거지.”
그제야 만족한 표정을 지은 차헌은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상원과 센터장의 싸움에 자신의 등이 터지는 중이라는 건 알겠다.
“근데 왜 형까지.”
“강차헌 에스퍼, 가 아니라 너랑 나랑 친하니까.”
그 말을 들은 차헌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가 다시 끌어내렸다. 해달라는 대로 이름도 불러주고 반말까지 하고 있는데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다.
꿍얼거리고 있는 차헌을 내버려 둔 연우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지금까지는 연우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 이제 차헌이 가상 던전 훈련만 통과하면 된다. 통과만 하면 연우가 손 쓸 필요도 없이 책의 흐름대로 차헌이 센터에 남아있게 될 것이다.
“저야 뭐, 형이랑 같이 가면 좋은데 형은 괜찮아요? 마나 멀미인가, 그거 때문에 형 엄청나게 고생했잖아요. 저번에는 형 진짜 쓰러진 줄 알았어요.”
차헌의 말에 연우는 눈썹을 긁적였다. 조희서와 정은영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신경 줄을 박박 긁어댄 탓인지 깊게 잠을 자지 못했다. 간신히 잠이 들어도 악몽 때문에 눈을 떠야 했다. 그렇게 하루에 두세 시간도 자지 못하니 사람이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그 상태에서 박서현이 요구하는 훈련량을 쫓아가다 보니, 차헌과 대화를 나눌 힘도 없어 저녁을 먹고 나면 까무룩 잠이 드는 게 요즘의 일과였다.
그렇게 자고 일어났더니 대뜸 이제 반말할 때도 되지 않았냐는 말에 얼마나 당황했던지. 어렸을 때부터 친했다는 거짓말도 했겠다, 이만큼 친해졌겠다, 이제 편하게 불러달라는 말에 그건 어렵다고 거절했었다.
거절하자마자 뚱한 표정을 지은 차헌은 연우가 자신을 부를 때마다 차헌이. 라며 자신을 삼인칭으로 호칭했다. 그 꼴을 보고 있는 것보다 그냥 말을 편하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원래 처음 훈련할 때는 다들 멀미를 겪곤 하는데, 너는 잘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S급이니까 나랑은 다르겠지.”
연우의 말대로 가상 던전 훈련 전, 테스트를 위해 던전 마나를 채운 구조물에 들어갔던 차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설마 이게 끝이 나며 구조물을 올려보는 차헌의 얼굴은 실망으로 가득했다. 그냥 별다른 거 없던데요? 저 새끼들이 장난친 거 아닐까요? 하며 직원을 노려보는 차헌에게 A 구역 에스퍼가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꾸벅 인사를 한 에스퍼는 주춤주춤 다가와 다음 훈련을 위한 팁을 알려주었다. 대기하고 있던 가이드도 은근슬쩍 방사 가이딩을 하며 차헌에게 접근했다.
차헌이 가상 던전에 들어간다는 소식과 함께 새로운 토벌대가 생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소식에 A 구역 이능력자들은 언제 차헌을 무시했냐는 듯 뻔뻔하게 접근해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연우의 예상대로 차헌은 A 구역에 스며들고 있었다.
“한연우 에스퍼는 훈련할 필요가 없지 않아요?”
하지만 연우는 아니었다. 강차헌과 함께 가상 던전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퍼지자 정은영부터 시작해서 박서현까지 연우를 배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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