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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50화 (50/143)

50화

“아니, 뭐…. 센터장님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죠.”

처음 소식을 전했을 때 박서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연우 에스퍼와 강차헌 에스퍼가 워낙 친하기도 하고, 강차헌 에스퍼는 정해진 팀이 없으니 같이 갈 수도 있겠다, 거기에 센터장님이 직접 지정했으니 한연우 에스퍼가 무슨 힘이 있어서 거절하겠냐며 연우를 달래주었다.

그러나 박서현은 시간이 지날수록 연우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훈련할 때마다 연우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최동원과 단둘이서 마나볼을 주고받곤 했다. 연우가 참여하려 해도 박서현은 어차피 강차헌 에스퍼랑 훈련할 건데 자신들과 훈련하는 게 무슨 의미냐며 대놓고 빈정거렸다. 그런 박서현이 던지는 마나볼을 낚아챈 최동원은 실수로라도 연우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박서현처럼 빈정거리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아니라 강차헌 에스퍼와 훈련을 한다면 팀원인 게 무슨 의미가 있냐며 딱 잘라 연우를 외면했다.

“함께 훈련할 가이드 아직 안 정해졌지? 나랑 같이 갈 거지?”

유일하게 접근하는 팀원은 조희서였다. C 구역의 가상 던전 훈련과는 다르게 A 구역은 던전과 똑같은 환경을 만들어놓고 훈련했다. 실제 임무처럼 가이드와 에스퍼로 이루어진 팀이 참여해야 하는 상황이라, 아무런 임무가 없는 가이드들이 연우에게 다가와 자신을 추천해달라며 부탁하곤 했었다. 해당 가이드의 팀원들은 연우가 가이드를 빼앗아 가기라도 한 것처럼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상황이라 스트레스를 받는 대신 작게 하품한 연우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핀을 내려놓았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가상 던전에서 이능이 튀면 큰일이다. 안 그래도 조희서가 연우의 이능이 튄다며 고래고래 퍼뜨린 상황이라, 한 번이라도 이능이 튄다면 그대로 마나 구속구를 차고 일반인으로 살아가야 할 수도 있었다.

정해진 좌표에 물건을 옮기는 연습을 하며 이능이 튀는지 확인하고 있는데, 다가온 배재영이 연우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 참 치사하죠?”

연우의 옆에 아기자기한 얼음 조각을 늘어놓은 배재영은 신경 쓰지 말라며 속삭였다.

“자기들이 강차헌 에스퍼 눈에 띄어보려 온갖 짓을 한 건 생각도 안 나나 봐요. 이런 말 좀 그렇지만, 한연우 에스퍼가 뽑혔다는 소식에 자기도 같이 가는 줄 알았다가 아니라는 걸 알자마자 손절하는 팀원들도 그렇고요.”

연우는 배재영의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얼음 조각만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에 더 갖고 놀라며 얼음 조각을 쌓아준 배재영은 작게 코웃음을 흘렸다.

“정은영 에스퍼 말도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자기들은 능력 있는 가족, 친구 있으면 그 덕 안 보고 살 건가.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맞아요.”

결국 연우가 작게 동의하자 씩, 웃은 배재영이 주변을 둘러보다 속삭였다.

“저도 능력 있는 언니 덕분에 먹고 산다는 말 지겹게 듣고 살았거든요. 언니 덕은 무슨, 내가 알아서 컸는데.”

입을 삐죽인 배재영이 연우의 손을 붙잡고 얼음 조각을 뿌려주는 척 아이템을 떨어트렸다.

“그 팔찌, 아이템은 아니죠?”

검은 체인 팔찌를 눈짓한 배재영은 바닥에 떨어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연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나는 안 느껴지는 것 같은데, 아이템이면 혹시라도 충돌이 일어날까 봐요. 그거 냉기 저항 아이템이에요.”

그 말에 연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하는 연우를 두고 일어난 배재영은 껴보라며 씩 웃었다. 연우는 푸른빛이 나는 반지를 내려다보며 망설였다. 그러자 배재영이 손을 흔들어 얼음 조각을 흩뿌렸다.

“그때 보니까 강차헌 에스퍼 이능이 좀, 음, 미숙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더라고요? 혹시 다치면 어떡해요. 소모품 아니니까 쓰고 돌려줘요.”

부담 갖지 말라는 배재영의 말에 연우는 조심스럽게 왼손 검지에 반지를 끼웠다. 혹시 속이 울렁거리지는 않냐, 저항이 느껴지지는 않냐, 마나코어가 반발하지 않는지 이능을 사용해 보라며 테스트를 한 배재영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고 와요.”

동기도, 팀원들에게도 받지 못한 인사였다. 훈련 종료 종이 치기가 무섭게 훈련장을 빠져나가는 팀원들의 뒷모습을 보던 연우는 배재영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 *

“뭐예요, 이건?”

마중 나온 차헌은 연우의 손가락에서 반짝이고 있는 반지를 보자마자 인상을 썼다. 푸른빛이 감도는 반지에 묻어 있는 마나가 차헌의 신경을 건드렸다. 어디서 느껴봤는데,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연우가 들고 왔던 얼음꽃이 떠올랐다.

“아, 이거 누가 빌려준 건데.”

“형한테요? 이걸 왜요?”

“실리는 어딨어?”

“여기요.”

차헌이 손을 가볍게 흔들자 은빛 팔찌가 찰랑거렸다.

“근데 그냥 아이템이라고 부르면 안 돼요? 물건을 이름으로 부르니까 너무 어색해서….”

“안 돼요.”

연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반지를 낀 손을 실리 위에 올려두었다. 아이템끼리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걸 보니 안심하고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능을 써 볼래?”

연우의 말에 허공에서 얼음이 생겨났다. 조심스레 만져보자 예전처럼 손끝이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작게 감탄하는 연우와 달리 차헌의 미간의 골은 점점 더 깊어졌다.

“좀 이상해요. 형이 얇은 막으로 둘러싸인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형 마나가 안 느껴져요.”

“냉기 저항 아이템이라서 그런가?”

그 말에 차헌이 입을 떡 벌렸다. 차헌은 손을 어쩔 줄 모르고 잼잼거리다가 반지를 노려봤다.

“그게 왜 필요해요? 내가 형 다치게 할까 봐요? 아니, 저랑 대련할 때 형 다친 적 한 번도 없잖아요!”

“혹시 모르니까요.”

담담한 목소리에 차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가 봐도 삽질하고 있는 게 뻔해 연우는 손을 흔들어 시선을 끌었다.

“강차헌 에스퍼가 아니라 제가 실수할 것 같아서요.”

“차헌이.”

“음. 그래 차헌이. 너 때문이 아니라 내가 실수할까 봐 그래. 마나 멀미 때문에 방향 감각을 잃을까 봐 안 그래도 걱정인데, 내가 널 방해하면 어떡해.”

차헌은 그럴 리가 없다고 딱 잘라 말했지만, 연우의 입장은 달랐다. 차헌은 자신의 이능이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걸 극도로 꺼리고 있었다. 지금까지야 연우의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며 고분고분 따르고 있었지만, 혹시 연우가 다친다면? 그 뒤로도 연우의 말을 따라줄까?

그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 전도현에게 남는 방어구가 없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고맙게도 배재영이 냉기 저항 아이템을 빌려준 것이다. 이제 연우가 차헌이 공격하는 곳에 뛰어들지만 않는다면 크게 다칠 일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준비했으니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책 속에서의 차헌은 처음 가상 던전에 들어갔다가 크게 다쳤었다. 목숨이 위중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 주는 치료실에서 누워지내야 할 정도였다. 아마도 불편한 훈련복 탓이었겠지. 이번엔 그럴 이유가 사라졌으니 괜찮겠지만 혹시라도 차헌이 다칠까 봐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연우를 뚱하게 내려보던 차헌은 마수 구슬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 마수 구슬에서 웨어 울프가 걸어 나왔다. 손목을 움직여 팔찌를 활로 변형시킨 차헌은 허공에 시위를 겨누었다. 날아오는 얼음 화살을 피한 웨어 울프는 목울음 소리를 내며 차헌을 경계했다.

그런 웨어 울프를 가볍게 제압한 차헌은 새로운 마수가 나타날 때마다 실리를 변형시키며 마수를 상대했다. 차헌의 마나가 담겨 하늘색으로 빛나는 아이템은 차헌의 의지에 따라 착실히 몸을 변화시켰다.

저렇게 멋있는 무기에게 슬라임이라는 이름을 붙일 생각을 하다니.

혀끝을 깨문 연우는 슬라임이 뭐가 어떠냐며 당당하게 굴던 차헌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이템과의 감응을 위해서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는 말에 차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슬라임이라고 명명했다. 흐물거리는 게 꼭 슬라임 같다나.

그런 차헌을 말린 연우는 그래도 사람들이 들었을 때 오! 하는 이름이어야 하지 않겠냐고, 슬라임은 너무 오…? 하지 않냐며 차헌을 설득했다. 잠시 망설이던 차헌이 슬라? 슬임? 슬슬? 라임? 슬라임으로 조합할 수 있는 온갖 단어를 뱉어내자 팔찌는 까맣게 빛이 죽어갔다. 그러다 실리? 라는 말에 반짝 빛을 냈다.

마음에 드는 이름을 지어 준 덕분인지 따로 감응력 훈련을 할 필요도 없이 둘의 손발은 딱딱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나중에 실리가 눈에 밟혀서라도 센터와 계약했으면 좋겠는데.

길게 기지개를 켠 연우는 마수 구슬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훈련에 합류했다. 워티 베어를 해치운 연우는 마나 코어를 점검해보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나 코어가 휴식을 요청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별다른 반응 없이 잠잠하기만 했다.

“이만할까요?”

조용하다가 나중에 어떤 발작을 일으킬지 모른다. 연우의 말에 차헌은 좀 더 훈련하고 싶은 눈치로 마수 구슬을 힐끔거렸지만,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씻고 나온 연우는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올려보았다. 지금까지는 연우가 원하는 대로 미래가 바뀌고 있었지만, 내일의 결과는 연우도 장담하지 못했다.

이렇게 된 이상 내일 훈련은 무조건 성공해야 했다. 책 속의 차헌은 A 구역의 방해로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연우가 개입하는 바람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 때문에 인과율의 부메랑을 맞게 생겼는데 책과 똑같이 훈련에 실패한다면 억울해서 못 견딜 것 같았다.

“내일 꼭 성공해야 해요.”

휴게실로 들어오는 인기척에 중얼거리자, 차헌은 질린 표정으로 답했다.

“형 자다 말고 잠꼬대로 성공해야 한다고 중얼거리는 거예요? 귀에 박히겠으니까 인제 그만.”

진짜 그만. 입에 지퍼를 다는 시늉을 하며 누운 차헌은 쉽게 잠이 오지 않는지 오랫동안 뒤척거렸다.

내일 훈련에 성공하기만 하면 이 빌어먹을 센터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센터가 필사적으로 막고 있지만, 차헌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길드는 여전히 많았다. 대충 아무 데나 골라 가도 여기보다는 낫겠지, 이상원 같은 새끼도 없을 것이고.

한숨을 쉰 차헌은 옆으로 누워 잠이 든 연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든 연우를 보고 있자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가 센터를 나가면 형은 어떻게 되는 거지, 형 팀 가이드 진짜 이상하던데, 다른 곳이랑 계약할 때 형이랑 같이 가겠다고 우겨볼까, 꼬리의 꼬리를 무는 생각을 이어가던 차헌이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황금빛 눈이 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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