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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51화 (51/143)

51화

“한연우 에스퍼, 확인되셨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등을 떠미는 손길에 훈련장으로 들어간 연우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을 통과하자마자 제일 먼저 보인 건 실내를 꽉 채우고 있는 검은색 반구였다. 멀리서도 반구를 둘러싸고 있는 던전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형.”

날뛰는 마나 코어를 진정시키고 있는데 대기하고 있던 차헌이 다가왔다. 차헌을 길게 훑어보던 연우는 평소처럼 대충 고정한 게 아니라 제대로 고정한 고정끈을 살피고, 보조 가방 또한 꼼꼼하게 확인했다.

“포션이랑 확인했어요?”

“네.”

차헌이 제대로 안 챙겼어도 연우의 가방에 여유분이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가방을 두드려 포션의 위치를 파악한 연우는 시선을 내려 허벅지 벨트를 살피다가 표정을 굳혔다.

“탄창은?”

“어차피 필요 없잖아요. 오늘 내내 실리만 쓸 건데.”

그 말에 연우는 눈을 감고 한숨을 흘렸다. 연화였다면 지금쯤 등짝에 불이 났을 것이다. 챙기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기어코 챙겨오지 않은 차헌의 볼을 잡아 뜯어버리고 싶었지만, 연우는 화를 애써 눌러 담으며 가라앉은 시선으로 차헌을 바라봤다.

“그러게. 필요 없겠네.”

무심한 시선과 낮은 목소리에 눈이 동그래진 차헌이 변명 아닌 변명을 주워섬겼다.

“아니, 형도 알잖아요. 실리 쓸 때는 탄창 필요 없다는 거. 총은 쓰지도 않을 거고, 탄창은 무겁기만 해서 안 들고 온 건데.”

“그러다가 진짜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 건데? 계속 말했잖아, 던전에 들어갔을 때 아이템이 말을 안 듣는 일도 있다고.”

한숨 섞인 연우의 목소리에 입을 달싹거리던 차헌은 탄창을 챙겨오겠다며 훈련장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을 보고 눈에 띄게 당황했다. 차헌은 어떡하냐는 눈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책에서도 저러다가 다친 게 분명했다.

가방을 연 연우는 차헌에게 손짓했다. 혹시 몰라 챙겨와서 다행이지. 여유분으로 챙겨온 탄창을 꺼내자, 차헌이 조심스럽게 받아 갔다.

“다음부터는 챙길게요.”

차헌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센터장을 향해 걸어갔다. 귀찮아도 그냥 챙길걸. 후회하며 뒤를 쫓던 차헌에게 연우가 물었다.

“들어가면 뭐부터 하라고 했는지 기억나?”

“네. 일단 감각을 찾는 게 제일 우선이고,”

귀에 딱지가 앉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주 들었던 설명이었고, 입이 닳도록 대답했었던 대답이었다. 막힘 없이 순서와 방법에 대해 늘어놓자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방긋 웃으며 차헌을 올려봤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탄창은 왜 안 챙겼지?”

바라던 칭찬이 아니었음에도 차헌은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뭘 잘했다고 웃냐고 혼날까 봐 급히 입술을 말아 문 차헌이 얌전히 연우의 뒤를 따랐다. 혼이 나면 당연히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연우가 걱정해줄 때마다 심장 한구석에서 민들레가 날리는 것만 같았다.

“왔군.”

꽃씨가 되어 둥실거리던 기분은 센터장의 말 한마디에 시궁창에 처박혔다. 차헌은 삐딱하게 서서 센터장을 노려보았고, 이상원은 제 밥그릇을 탐내는 하이에나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차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연우 에스퍼, 이쪽으로.”

그런 셋을 내버려 둔 부센터장은 연우를 한쪽으로 이끌었다.

“이게 무슨…?”

부센터장이 가리키는 곳에는 센터의 가이드들이 일렬횡대로 서 있었다. 중간쯤 서 있던 조희서가 연우를 발견하고 손을 붕붕 흔들었다. 환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우에게 가이딩을 하기 싫다고 엉엉 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반가운 척이지? 언제는 같이 일하기 싫다고 쫓아버리라고 하더니, 낯짝이 저렇게 두꺼울 수 있나?

그런 조희서를 외면한 연우는 나란히 서 있는 가이드들의 사원증을 눈으로 훑었다. 생각보다 A급 가이드가 몇 명 없었다. 센터에 높은 등급 가이드가 얼마 없다는 걸 고려해도 너무 적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차헌보다는 본래의 팀원들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이왕이면 높은 등급의 가이드가 좋긴 하겠지만, 던전에서 받는 가이드의 감각을 익히는 정도라면 낮은 등급도 상관없었다. 차헌과 의견을 나누기 위해 기다리고 있자, 조희서가 사뿐사뿐 다가왔다. 부센터장이 자신을 제재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조희서는 활짝 웃으며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왕이면 팀이랑 같이 가는 게 좋지 않겠어?”

조희서의 말에 연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부터 팀원 취급을 해줬다고. 저 많은 가이드가 차헌과 함께 훈련이라도 해보겠다고 기다리고 있는데, 당연히 자신을 선택할 거라는 태도가 정말 같잖았다.

거절하려고 고개를 젓기도 전에 조희서가 냉큼 손을 뻗어 연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다가온 가이드 한 명이 그런 조희서를 밀어내고 제 소개를 하려는 순간, 그 가이드를 밀어낸 다른 가이드가 연우에게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펼쳐진 수라장에 차헌은 당황한 연우를 뒤로 밀어낸 다음 부센터장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내 말을 듣긴 하는 거예요?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차헌의 말에 연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던전에 가이드 없이 들어가겠다고? 너야 마나 코어가 크니까 상관없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아닌데?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냐는 연우의 질문을 묵살한 차헌은 검은 반구 앞에 섰다. 정말 필요 없냐는 말에 정말 필요 없다고 답한 차헌은 훈련소장의 설명에 따라 반구에 손을 올려두었다.

차헌의 마나에 반응한 검은 반구가 일렁이며, 마치 게이트처럼 넘실거리는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소용돌이를 내려보던 차헌은 시선을 돌려 연우를 빤히 쳐다봤다. 뻔했다. 혼자 가면 안 되냐고 물어보겠지.

오늘 아침, 꼭 형이랑 같이 가야 하냐면서 걱정하던 차헌에게 던전에서 길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거나, 이상원과 같이 들어가고 싶다면 혼자 들어가도 된다고 대답한 참이었다.

차헌의 시선에 연우는 대답 대신 이상원을 눈짓했다. 으,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을 일그러트린 차헌은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헌은 끝까지 가이드가 필요 없다고 대답하며 연우의 손을 잡았다. 연우는 눈을 힐끔거려 보조 가방을 확인했다. 마나 포션을 넉넉하게 챙겨와서 다행이다. 가이드 없이 던전을 공략하겠다는 차헌의 포부에 박수를 치던 연우는 센터장의 뒤에 선 이상원을 주시했다.

그나저나 이상원이 여기 왜 있지?

센터장이나 부센터장은 그렇다 쳐도, 차헌과 관련 없는 이상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무척이나 수상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연우는 일렁이는 소용돌이에 발을 집어넣으려는 차헌을 붙잡았다.

“내가, 아니,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감각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니 자신이 먼저 들어가는 게 낫겠다는 말에 차헌이 순순히 물러났다. 소용돌이 앞에 선 연우가 질긴 막을 뚫는 기분으로 발을 집어넣었을 때였다.

“한연우 에스퍼.”

앞으로 다가온 이상원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잊지 마요. 훈련도 실전처럼.”

* * *

빨려 들어가듯 게이트를 통과한 연우는 감각을 하나하나 찾기 시작했다.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도 압박감이었지만, 던전 마나를 몰아내기 위해 마나를 미친 듯이 만들어내는 마나 코어에서 느껴지는 열기도 상당했다.

발바닥의 감각을 찾고 나서야 눈을 뜬 연우는 입을 틀어막았다.

하필이면 동굴형 던전이었다. 마지막을 맞이했던 곳과 똑같은 형태의 던전이 시야를 가득 채우자 연우의 갈색 눈동자에는 울컥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텅 빈 공간에 검은 비늘의 드래곤이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멀쩡한 두 손이 녹아내리는 환상이 아른거렸다. 연우는 숨을 훅 삼키며 무릎부터 주저앉았다.

호흡이 엉망으로 뒤엉키고 발끝과 손끝이 타오르는 환상통에, 연우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웅크렸다. 도망갈 수도 없는 환상 속에서 괴로워하던 연우가 마나 코어에서 느껴지는 작열감에 헛구역질하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 손등을 간지럽혔다.

그 감각을 느끼자마자 연우를 괴롭히던 환상과 환청이 사라졌다. 날뛰는 드래곤과 드래곤이 뿜어내는 불꽃으로 가득 차 있던 동굴 속에서는 연우의 헐떡거리는 숨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천천히 숨을 고르던 연우는 손을 뻗어 단검을 찾았다. 차헌의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데도 손등의 감각은 여전했다. 연우 홀로 있는 던전에서 손등을 건드릴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다.

마수.

차헌이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마수를 소환한 건가? 하여튼 성격 참 급해. 혀를 찬 연우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던전 한복판도 아니고 입구에서 마수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어?”

마수가 아니었다. 흐린 시야로 보이는 건 보석뱀이었다. 연우에게 테이밍 능력은 없었지만, 보석뱀이 당황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연우의 주변을 미친 듯이 맴돌던 보석뱀은 이따금 몸을 세우고 두리번거리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보석뱀은 조금이라도 큰 돌멩이가 발견되면 그 뒤에 몸을 숨겼다가, 입을 벌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다 연우와 시선이 얽히자 황금빛 눈을 빛내며 빠르게 기어 왔다. 연우를 향해 몸을 꼿꼿이 세운 보석뱀은 주변을 둘러보며 빠르게 고갯짓했다.

뭐지? 연우가 손을 뻗자 보석뱀은 냉큼 손바닥 위에 올라탔다. 익숙한 무게와 생김새에 연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혹시 저번에 걔야?”

연우를 빤히 바라보던 보석뱀은 흠칫, 놀라더니 그대로 연우의 손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꼬리를 합, 물었다?

“뭐야?”

“왜요?”

“뭐야!”

차헌의 외침에 화들짝 놀란 연우는 손목을 뒤로 숨겼다. 팔찌가 걸린 왼쪽 손목을 오른손으로 감싼 연우는 차헌의 눈치를 살폈다.

“뭔데요? 괜찮아요?”

차헌이 손을 뻗어 연우의 눈 밑을 쓸어내렸다.

“왜 울어요?”

연우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에 고여있던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멀미 때문이에요. 속이 좀 울렁거려서.”

시선을 내린 차헌은 땀에 질척하게 젖은 머리카락,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는 입술, 붉게 달아오른 눈두덩이를 차례로 살피고는 손을 흔들어 얼음덩이를 만들어냈다.

손에 낀 반지 때문에 냉기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얼굴을 마사지하는 기분이 좋아 연우는 한참이나 얼음을 붙잡고 나른한 숨을 흘렸다.

물기를 털어낸 연우는 기분 좋은 박동으로 두근거리는 마나 코어를 점검했다. 차헌 역시 문제없다며 던전을 휘휘 둘러보았다.

출발하기 전, 차헌이 실리가 멀쩡하게 작동되는 걸 확인하는 동안 연우는 손목에 걸려있는 팔찌를 쳐다봤다.

방금, 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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