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왜…요? 저 뭐 실수했어요?”
“아니.”
팔짱을 낀 채 차헌을 빤히 올려보던 연우는 한숨을 쉬며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왜 혼자 놔두고 갔냐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냐며 펄펄 날뛰던 차헌은 멈추지 않는 한숨 소리에 입을 다물고 연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게 아니면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 감각을 펼쳐 주변의 카메라를 확인한 연우는 사각지대를 찾았다. 따라온 차헌에게 마석을 쥐여주자 차헌이 순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이거 느낌이 좀 이상해요. 뭐예요?”
“마수의 마나 코어인 마석인데….”
고개를 끄덕이던 차헌이 마석? 중얼거리더니 눈썹을 치켜올렸다. 차헌과도 합의되지 않은 내용이구나. 연우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센터장인지 이상원인지 모르겠지만 너를 방해하기 위해 실제 마수를 집어넣었다고? 이 사실을 알고도 차헌이 센터에 남아있을까?
입술을 깨문 연우는 고개를 들어 차헌을 올려봤다. 어차피 바꾼 미래 확 바꿔버릴까? 처음 책을 읽었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센터는 너무 답이 없지 않나? 계약해달라고 발발 빌어도 모자랄 판에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이상원의 대항마로 만들어?
아니, 아니다. 치사하고 더러워도 차헌은 센터장이 되어야 했다. 정해진 미래에서 벗어나면 차헌에게도 좋을 게 없었다.
일단…. 그래, 일단 나가서 생각하자.
“형. 여기 나오는 거 전부 홀로그램 마수라면서요. 근데 왜 마석이 나와요?”
차헌의 질문에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정리한 연우는 카메라를 눈짓했다. 차헌 또한 누가 배후인지 알아챘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개또라이 아니에요?”
작게 중얼거린 차헌은 그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게 당장이라도 뚜껑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차헌을 붙잡은 연우는 빠르게 속삭였다.
“지금 따져봤자 실수였다면서 그냥 넘어갈 거야. 확실하게 신고할 방법이 있어.”
가상 던전 훈련이 진행되는 과정은 모조리 녹화된다. 훈련에 성공한다면 토벌을 위한 참고자료가 되지만, 실패한다면 해당 에스퍼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폐기된다. 그러니 신고하기 위해서라면 꼭 성공해서 녹화 자료를 획득해야 했다. 연우의 말에 차헌이 사나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와, 그 새끼 어디 호수에 던져놓을 방법은 없어요?”
“호수는 안 돼.”
“왜요?”
“호수 정도는 가볍게 증발시키고도 모자라, 주변까지 태워버릴 테니까.”
그 모습을 상상해보던 연우는 등줄기를 타고 돋아오르는 소름에 팔뚝을 문질렀다.
“왜요? 추워요?”
“아니, 그건 아닌데….”
연우가 대답하다 말고 허공을 쳐다보자, 곁에 선 차헌이 얼음 화살을 만들어 시위를 겨누었다. 주변을 경계하던 연우는 하늘하늘 다가오는 안개를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왜요?”
“입 열지 마.”
연우는 보조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틀어막고 차헌에게도 한 장 쥐여주었다. 차헌이 입을 가리는 걸 확인한 연우는 조심스럽게 공간을 접었다.
바로 옆 석순으로 이동한 연우는 조금 전까지 둘이 서 있던 장소를 살폈다.
역시.
허공에서 하늘거리는 희야루 나방을 발견한 연우는 포션을 꺼내 손수건을 적셨다. 차헌의 입술 주변과 눈가를 닦아준 연우는 자신의 얼굴 또한 닦아낸 뒤 손수건을 넓게 펼쳐 복면처럼 둘렀다.
“저기, 허공에 보여?”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어디, 아니, X발! 저게 뭐야!”
연우의 물음에 차헌이 반투명한 희야루 나방을 이제야 발견했는지 짧게 발작했다. 차헌은 손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서리 비가 쏟아지자 희야루 나방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졌다.
통통한 몸체에 붙어있는 여섯 장의 은빛 날개에서는 인분 가루가 쉼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끔찍한 가려움을 불러오는 인분 가루를 피해 공간을 접은 연우는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차헌을 붙잡았다.
“아, 형, 저게 더 징그러워요.”
우는 소리를 내는 차헌을 어르고 달래가며 화살을 만들게 했지만, 차헌은 희야루 나방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털이 돋아난 입이 징그러워 죽겠다며, 발은 또 저게 뭐냐고, 저걸 어떻게 쳐다볼 수 있냐면서 통곡하던 차헌은 눈을 질끈 감은 채 활을 들어 올렸다.
화살은 아무것도 맞추지 못하고 힘없이 떨어졌다. 연우는 차헌의 등에 손을 올렸다. 화살촉이 희야루 나방을 향하도록 팔의 각도를 조절한 연우가 숨을 들이쉬자마자 차헌이 시위를 당겼다.
날아간 화살은 희야루 나방의 날개에 박혔다. 화살에 맞은 날개는 몸통에서 분리되어 가루가 되어 이리저리 날리기 시작했다. 숨을 참은 연우가 다른 석순을 향해 이동했고, 차헌은 그때마다 눈을 감고 시위를 당겼다. 그렇게 차근차근 희야루 나방을 해치우고 있는데, 뒤에서 마나 반응이 느껴졌다.
여섯 장의 날개를 몸통에 붙인 희야루 나방이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볼 틈도 없이 공간을 접어 피하자, 둘을 쫓아 궤도를 바꾼 희야루 나방이 차헌에게 쇄도했다. 총을 장전하던 연우는 옆에서 날아다니는 희야루 나방을 낚아챘다.
“그걸 왜 잡아요!”
연우의 손에 잡힌 희야루 나방은 집게발에서 촉수를 뽑아내며 도망치려 했다. 그런 나방을 단단히 움켜쥔 연우는 돌진하는 희야루 나방을 향해 휘둘렀다. 동족을 발견한 희야루 나방은 날개를 펼치는 속도를 늦췄다.
하늘하늘 주변을 돌아다니며 공격할 틈을 찾던 희야루 나방은, 연우가 이능을 사용해 날려버린 동족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런 희야루 나방의 머리를 노리고 방아쇠를 당긴 연우가 작게 혀를 찼다. 머리가 아니라 몸통에 맞긴 했지만, 어쨌든 처리했다.
“나 손 좀.”
다가온 차헌에게 손을 내밀자, 차헌은 손수건에 포션을 적셔 연우의 손을 닦기 시작했다. 손가락 마디에 인분 가루가 남아있지 않을까 정성껏 닦아주고 나서야 차헌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며 타박했다.
“거기서 안 그랬으면 지금쯤 우리 둘은 희야루 나방의 내장에 뒤덮여,”
“그만.”
작게 헛구역질한 차헌은 새 손수건을 요구했다. 깨끗한 손수건에 포션을 적셔 연우의 얼굴과 손을 다시 한번 닦아준 차헌은 바닥에 떨어진 마석을 살폈다.
“이것도 진짜인 거네요?”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쪼그려 앉아 마석을 주웠다. 마석의 가치도 가치였지만, 실제 마수를 상대했다는 증거품으로 제출할 수도 있었다. 열심히 주워 차헌의 보조 가방에 넣어둔 연우는 이상원을 죽여버리겠다며 저주의 말을 씹어뱉는 차헌을 끌고 던전의 중심으로 향했다.
“여기가 던전의 중심이야. 아마 곧 보스가 나타날 텐데….”
공간이 뒤틀린 천장을 가리킨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차헌은 설명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 연우를 내려보았다. 허공을 올려보는 연우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있었다. 언젠가처럼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연우를 붙잡은 차헌은 실리를 창으로 변환시켰다.
“저, 저, 저!”
마나가 크게 일렁이며 나타난 건, 차헌의 키만 한 거미였다. 붉은색 털이 돋아난 거미와 눈이 마주치자 차헌이 자지러질듯한 소리를 내며 연우를 끌어안았다. 여덟 개의 눈으로 던전을 살피던 거미는 석주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형. 아까처럼 형이 조준해주면 제가 쏠게요.”
실리를 다시 활로 변환시킨 차헌은 조심조심 뒤로 물러나며 연우를 불렀다.
“형?”
돌아오는 답이 없어 의아해하던 차헌의 손끝에서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손을 풀자 무너지듯 주저앉은 연우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연우는 어깨를 끌어안은 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차헌이 연우의 볼을 감싸 쥐며 상태를 확인했다.
“괜, 괜찮아요.”
“거짓말하지 마요.”
“위….”
연우의 말에 위를 올려보자 거미가 집을 짓고 있었다. 저걸 방해해야 한다며 알려주자, 차헌은 진저리를 치며 얼음 화살을 만들어낸 뒤 곧바로 시위를 당겼다. 화살에 맞은 거미줄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집을 짓는 것을 포기한 거미는 한쪽 구석에 숨어들었다.
“형!”
종유석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거미를 탐색하던 차헌은 기겁하며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쪼그려 앉은 연우는 제 손가락을 비틀고 있었다. 색이 변한 손가락을 내려보던 연우가 힘없는,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멀쩡해.”
이 형이 지금 정신이 좀 나갔나? 색이 돌아올 때까지 손가락을 주물러주던 차헌은 초점이 없는 연우의 눈동자를 살폈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동그란 선을 이루는 볼과 제 손을 번갈아 보던 차헌이 잠시 망설였다.
때리면 아프겠지?
등급에 따른 체급 차이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던 터라, 정신 차리라고 한 대 때리는 것도 겁이 났다. 그렇다고 그냥 놔두기에는 연우의 몸이 당장이라도 까무러칠 것처럼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고민하던 차헌은 조심스럽게 볼을 토닥였다.
잠시 후, 초점이 돌아온 연우의 눈이 주변을 살폈다. 잡념을 몰아낸 연우는 감각을 펼쳐 거미가 있는 위치를 확인했다.
“발끝에 독이 발려있으니 조심해야 해요. 거미줄도 조심해야 합니다. 딸깍거리는 소리가 난다면 바로 자리를 피해요.”
빠른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차헌은 여전히 식은땀이 흥건한 연우의 이마를 손수건으로 꾹꾹 눌렀다.
“형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맞으니까, 최대한 빨리.”
연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우가 숨을 들이쉬자 일렁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얼음벽을 세운 차헌은 불타고 있는 거미집 안에서 입을 딸깍거리고 있는 거미를 발견했다.
거미줄이 인화성 물질이고, 거미의 입이 부싯돌인 건가? 나름대로 추리해보던 차헌은 시위를 당겨 얼음 화살을 날렸다. 거미줄에 닿기가 무섭게 얼음 화살이 녹아버렸다. 이를 지켜본 차헌이 실리를 창으로 변환시켰다.
잠깐. 이걸 날리면 회수는 어떻게 하지?
고민하던 차헌은 실리 대신 연우가 설명해줬던 방식으로 무기를 만들었다. 바닥에 쿵쿵 찍어 단단함을 확인한 차헌이 팔을 힘껏 휘둘러 창을 던졌다.
거미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를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올랐지만, 지친 연우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었다. 한참 동안 창을 날린 뒤에야 거미를 해치울 수 있었다.
사체를 확인한 차헌은 울상을 지으며 연우에게 향했다. 이제 다 끝난 게 맞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차헌은 질문 대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웅크려 앉아있는 연우의 위로 거미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