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뭐?”
차헌은 거미가 몸을 숨긴 쪽을 향해 손짓했다. 반대 손으로는 선명하게 빛나는 초록색 버튼을 가리키고 있었다.
“형이 선택해요. 난 계속하겠다고 한 적 없어요.”
두 손을 들어 올린 차헌은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차헌은 아예 팔짱까지 끼고 자신과 거미를 번갈아 보는 연우를 지켜봤다.
연우가 자신을 많이 챙겨준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센터를 나갈 때 혼자 나가지 않고 연우도 데려갈 생각이었다. 예전에 능력이 뛰어난 동생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얼마나 대단한 건지 그 동생 때문에 센터가 연우를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다는 대답을 들은 참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차헌은 반항하는 실리를 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연우를 바라보았다.
형이 빨리 포기했으면 좋겠다. 아니, 근데…. 아니, 나야 형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 그렇다지만, 형은 왜? 형은 나를 따라서 여기 들어온 거지?
한 번 의문이 들자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차헌은 연우가 필요했지만, 연우는 아니었다. 연우는 제대로 된 팀도 있었고, 모르는 것도 없었다. 센터장이나 이상원과의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해서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지?
...설마.
달아오른 귀를 문지르던 차헌은 그대로 귀를 틀어막았다. 갑작스러운 이명에 괴로워하던 차헌이 허전함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형!”
초록빛으로 빛나는 실리를 쥔 연우가 거미와 대치하고 있었다. 저 형이 진짜! 거품을 물고 파들거리던 거미는 마지막 힘을 모아 이빨을 딸깍였다. 불타는 몸을 일으킨 거미는 연우에게 그대로 달려들었다.
“이게 미쳤나.”
연우의 앞을 막아선 차헌의 손에 마나가 모여들었다. 차헌이 하늘색으로 빛나는 검을 휘두르자 거미의 뒷걸음질 쳤다. 도망가려는 거미의 머리를 내려찍은 차헌은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연우를 돌아봤다.
“이제 만족해요?”
사나운 목소리에 발을 내려보고 있던 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있자 설명하지 못할 분노가 차올랐다.
“형은 만족할진 몰라도 나는 아니에요. 지금 형이 그 꼴이 됐는데 내가 사관학교 졸업장을 딴다고 기뻐할 줄 알았어요?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예요?”
차헌은 대답 없는 연우를 노려보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고 따지고 싶었고, 앞으로 이러지 말라 애원하고 싶었다. 이런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다시는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성공하고 싶지 않았다.
차헌이 경련하는 거미의 몸을 칼로 내려찍자, 칼이 부서지며 얼음 비가 내렸다. 주먹만 한 얼음들이 쏟아지며 거미의 몸통을 곤죽 내자 붉은색 마석이 드러났다.
차헌은 마석 위에 나타난 소용돌이 문양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차헌의 마나에 반응한 던전 마나가 모여들며,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함정이 아닌지 확인한 차헌은 연우를 부축했다. 게이트에 발이 닿기 직전, 차헌을 붙잡은 연우가 작게 속삭였다.
“싸우지 마요.”
“왜요?”
언제는 후려 까라더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고개를 돌리자, 몽롱한 눈을 깜빡이다 이내 눈을 감는 연우가 보였다. 차헌은 대답 없이 잠이 든 연우를 내려보다 코 아래로 손을 갖다 댔다. 분명 손끝에서 미약한 숨결이 느껴지는데도 답답하고 불안했다. 연우의 무릎을 받쳐 안아 올린 차헌이 게이트를 벗어남과 동시에 가이드가 달려왔다.
“강차헌 에스퍼!”
차헌은 다가오는 가이드에게 연우를 보였다. 팀 가이드가 아니라 불편한지 연우는 가이딩을 피해 차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연우를 끌어안은 차헌이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축하해요.”
이상원의 인사에 차헌의 발아래에서 얼음이 터져 나왔다. 불의 장막을 피운 이상원은 날아오는 얼음창을 가볍게 피했다. 차헌은 어디 더 해보라는 듯 방긋 웃는 이상원을 무시하며 연우를 부축했다.
“저기.”
누가 어깨를 두드리자 차헌은 연우를 끌어안으며 창을 휘둘렀다. 형형히 빛나는 창끝을 본 치료계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심장을 노리는 창끝보다 이쪽을 노려보는 차헌이 더 무서웠다.
이대로 외면하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쓰러진 사람이 한연화의 오빠였다. 떨리는 손을 맞잡은 치료계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차헌 에스퍼. 방금 막 던전 공략을 끝낸 터라 예민한 건 알겠지만, 그건 한연우 에스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가이딩 없이 계속 이능을 사용해서 그런 것 같은데,”
“제가 다시 해볼까요?”
하이에나처럼 주변을 맴돌고 있던 가이드가 손을 치켜들었다. 그런 가이드들 틈에서 조희서를 찾던 차헌은 연우의 손을 쓸어내리는 치료계를 노려봤다.
“강차헌 에스퍼가 이렇게 반응할수록 한연우 에스퍼만 힘들어질 겁니다.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마나 코어가 불안정할 때 근처에 에스퍼가 있는 건 큰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 말에 차헌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눈치를 보던 치료계가 조심스럽게 연우를 끌어내자, 품이 허전해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차헌이 연우의 손목을 쥐었다. 차헌은 한참 동안 연우를 보다 조심스레 손을 놓았다. 그러자 치료계가 연우를 부축하며 멀어졌다.
“제 치료실로 데려갈게요. 그동안 강차헌 에스퍼는 나가서 좀 걸어 다니세요. 그, 음, 흉흉한 것들 좀 털어내고 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뇨, A 구역으로 가요. 가이드가 포션 들고 대기하고 있을 테니 치료랑 가이딩을 병행하면 되겠네요.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강차헌 에스퍼 때문에 한연우 에스퍼만 고생했네요.”
혀를 찬 이상원은 차헌에게 다가왔다.
“도와줄까요? 던전 마나 털어내는 데 대련만큼 좋은 게 없는데.”
이상원의 제안을 무시한 차헌은 훈련장을 빠져나가는 연우를 지켜봤다.
“그나저나, 한연우 에스퍼도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차헌과 같은 곳을 바라보던 이상원이 부센터장에게 물었다. 한 발 빠져있던 부센터장은 이상원의 질문에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이번이 첫 훈련인 거로 아는데 차분하게 길을 찾는 모습이나, 마수의 파훼 방법도 알고 있는 게 정말 대단했습니다.”
“센터장님이 계셨다면 정말 감탄하셨을 텐데.”
그러고 보니…. 그제야 센터장의 부재를 눈치챈 차헌이 부센터장을 노려보았다. 차헌은 센터 소속이 아니니 제쳐두더라도, 센터 소속 에스퍼가 불안정하다는 걸 지켜보고 있었으면서 아무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었다.
“센터장님 찾아요? 급한 일이 생기셔서 잠시 자리를 비우셨어요.”
그쵸? 이상원의 말에 부센터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센터장님이 처음 지도한 훈련이다 보니 불편한 게 있었다면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이상원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차헌은 점점 멀어지는 연우의 마나에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연우가 충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차헌은 출구로 향했다.
“아, 그러고 보니 강차헌 에스퍼. 아직 센터랑 계약 안 했죠?”
“네. 아직입니다.”
부센터장의 말에 이상원은 차헌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한연우 에스퍼 우리 팀에 영입해도 되겠다.”
탁, 날아오는 얼음창을 낚아챈 이상원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이능을 사용했다. 피어오른 불꽃이 얼음을 녹이자 뿌연 김 사이로 이상원이 진하게 웃었다.
“그렇잖아요. 한연우 에스퍼는 센터 소속이고, 나는 센터 소속 에스퍼면 누구나 팀으로 영입할 수 있어요. 곧 팀에서 방출될 거라는 말이 있던데, 내가 주워서 쓰면 되겠다.”
어이가 없었다. C급 에스퍼와 어울리는 걸 보니 끼리끼리라는 말이 왜 있는지 알겠다며 차헌을 조롱했던 게 이상원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연화 에스퍼의 가족이 이능이 튄다는 소문이 돌아서 의아했는데… 저 정도면 쓸만하지 않아요?”
“하하.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연우를 입에 올리는 게 도발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생긋생긋 웃고 있는 이상원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차헌은 어디 개가 짖냐는 태도로 귀를 후볐다. 무슨 유언도 아니고. 쓰러지기 직전에 싸우지 말라던 연우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게 싫으면, 지금이라도 내 팀에 들어올래요?”
“그건 일단 센터장님과 상담 뒤에 결정하는 게 어떨까요, 강차헌 에스퍼?”
개소리.
차헌은 자신이 이상원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부센터장을 쳐다봤다. 대체 이 인간들은 뭘 먹고 자랐길래 이따위로 컸을까.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흘린 차헌이 이상원과 부센터장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저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사람이고, 다른 하나와 그의 대가리는 자신을 센터에 끌고 온 뒤 방치했던 것도 모자라 온갖 방해를 일삼았던 사람이다. 그랬으면서 왜 차헌을 센터에 묶여두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2주는 무슨, 당장 이 지긋지긋한 센터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연우는?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센터는 다른 소속 에스퍼들과 연합하는 일이 없었다. 길드끼리는 서로 연합하며 돕고 살지만, 센터는 정해진 구역만 담당했고 위험 구역이 더욱 넓어지지 않는 것에 주력했다.
치사하고 더러워서 센터를 나가고 싶을 때마다, 지금 센터를 나가면 다시는 연우를 보지 못할 거라는 걱정이 차헌의 발목을 물고 늘어졌다.
“잘 생각해봐요. 둘 다 같이 들어와도 좋고.”
이상원, 연우, 던전. 셋을 조합하자 힘없이 웅크려있던 연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연우를 앞에 두고 한없이 여유를 부리던 이상원의 모습도.
차헌은 말없이 이상원을 응시했다. 똑같이 만들어주고 싶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죽어가도록 던전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싸우지 마요.’
무슨 족쇄도 아니고. 차헌은 날아다니는 얼음 결정을 사납게 낚아채며 문으로 향했다. 허전한 옆자리를 내려보던 차헌은 치료실을 향해 발을 옮겼다.
뛰어가듯 치료실로 걸어가던 차헌이 갑자기 멈춰 섰다. 얼음 결정이 아직도 제 주위를 사납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흉흉한 것들 좀 털어버리고 오라던 치료계의 말을 떠올린 차헌은 훈련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차헌은 훈련장의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이능을 사용했다. 발끝에서 천장으로 솟구친 얼음이 펑, 터지며 사방으로 파편이 날렸다. 이능을 사용하면 할수록 속이 풀리기는커녕 마나가 닳는 기분에 숨이 가빠오고 있었다. 연우가 옆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형이 옆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라고 알려줬을 텐데.
차헌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다, 얼음 단검을 만들어 뒤로 던졌다.
“아이고, 조심.”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윤석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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