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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56화 (56/143)

56화

윤석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차헌의 주변을 둘러보다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건 뭐 고치는 것보다 새로 짓는 게 더 빠르겠는데.

“벽간 소음도 살인 나는 거 알죠? 좋든 싫든 옆집에 살게 되었으니 서로 매너 좀 지킵시다?”

“저기요.”

제 훈련장으로 돌아가려던 윤석현은 기다렸다는 듯 빙글 돌았다.

“센터에 입사하면, 무조건 센터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요?”

“당연하죠? 남의 돈 벌어먹기가 쉬운 줄 알았어요? 그리고 시키는 대로 해야 내 앞날이 편해요. 맞죠?”

차헌은 윤석현의 말에 손가락 끝 굳은살을 매만지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시위를 잡아당기면 화살이 나가는 줄 알던 차헌을 다듬어준 건 코치진들이었다. 코치들이 하라는 대로 연습하면 흔들리던 시위가 안정되고, 제멋대로 날아가던 화살이 올바른 길로 날아갔다. 그분들의 말을 듣지 않아서 손해를 본 건 담력 훈련 때 벌에게 쏘인 경험뿐이었다.

그래서 센터의 말을 들으면 언젠가 이능을 다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텃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참고 견디는 건 이골이 나서 괜찮았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그때 차헌이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연우는 알고 있을까. 질척한 자기 비하에 갇혀 점점 작아지는 차헌을 건져 올려준 것도 모자라, 올바른 길로 안내해주려 애쓰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오늘 자신 때문에 원치 않는 훈련을 받았고, 제 고집 때문에 가이딩을 못 받아 폭주할뻔했다.

“그래도 뭐, 우리는 싫으면 싫다고 거절하면 되지만, 낮은 등급은 아니겠죠?”

윤석현은 날리는 얼음 결정을 후후 불고는 긴 눈매를 접으며 속삭였다.

“뭐, 이것도 저것도 싫은데, 내 사람을 지키고 싶다면….”

말끝을 흐린 윤석현이 갑자기 주머니를 뒤지더니 뭔가를 집어던졌다. 낚아채고 보니 포션 병이었다. 투명한 병 안에서 일렁거리는 보랏빛 내용물이 보였다.

“그건 뇌물. 마나 멀미에 좋,”

“지키고 싶다면?”

“아이고, 고맙긴 뭘. 길드를 차려요.”

평소처럼 헐렁한 말투가 아닌 단호한 목소리였다. 차헌에게 손짓한 윤석현이 팔짱을 끼며 웃었다.

“자, 우리 같이 정리해볼까요? 일단, 그거 알아요? 한연우 에스퍼가 이능불안정자로 분류되었다는 거? 다른 이능력자들은 이능이 조금이라도 튀면 바로 쫓겨나는데 왜 한연우 에스퍼는 아직도 센터에서 활동하고 있을까요?”

“지금은 이능이 안 튀니까요.”

“글쎄, 그건 강차헌 에스퍼의 생각이고. 센터의 입장이 돼서 생각해봐요.”

그 말에 소중하게 포션을 챙기던 차헌이 뚱하게 대답했다.

“그 대단한 동생 때문이겠죠.”

“정답. 한연우 에스퍼가 한연화 에스퍼의 가족이라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거죠. 어떻게든 한연화 에스퍼를 센터로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오빠를 끔찍이 생각하는 한연화 에스퍼가 한연우 에스퍼를 쫓아낸 센터와 계약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잠시 기다리던 윤석현은 차헌이 대답할 낌새가 없자 빠르게 말을 이었다.

“센터는 한연우 에스퍼의 이능이 멀쩡하든 말든 상관없어요. 한연우 에스퍼한텐 좀 미안하지만, 한연화 에스퍼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한연우 에스퍼의 이능이 튄다는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왜 이능불안정자가 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냐면서 난리가 날걸요. 그건 알고 있어요? 이능불안정자로 분류되면 평생 마나 제어구를 달고 일반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거?”

“그럼,”

“잠시, 학생. 질문은 설명 끝나면 받을게요. 생각해봐요. 과연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각성자뿐일까요? 아닐걸요, 절대 아니지. 한연우 에스퍼의 사정이 알려지자마자 자신이 한연우의 감시자가 되겠다며 먹이통을 발견한 잉어 떼처럼 달려들걸요. 자, 여기서 질문. 그럼 강차헌 에스퍼는 뭘 해야 할까?”

윤석현은 차헌이 대답하기도 전에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땡땡, 시간 초과. 불쌍한 학생을 위해 설명해줄게요. 길드를 차려요.”

차헌을 바라보는 윤석현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고 있었다. 윤석현은 보라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빠르게 속삭였다.

“길드장은 평화에 협조하기 위해 이능불안정자를 보호하고 감시해야 할 의무가 있죠. 다시 한번 되짚어봅시다. 강차헌 에스퍼는 오늘 가상 던전을 성공적으로 공략했으니 던전 토벌권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생겼어요. S급 에스퍼면 던전 토벌증 3장만 있어도 길드를 만들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고요. 여기에 보증인과 졸업장만 있으면 되는데, 졸업장은 센터장님이 이번에 준다고 약속했죠?”

차헌이 고개를 끄덕이자 윤석현이 눈웃음을 지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윤석현은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제가 눈에 띄지 말라고 일부러….”

윤석현은 평범하게 사는 게 최고라며 차헌의 어깨를 도닥이더니, 갑자기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접촉에 불쾌해진 차헌이 손을 털어내도 윤석현은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군. 희열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린 윤석현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차헌을 주시했다.

“뭔데요?”

“몰라도 돼요. 아무튼 보증인이 필요하다면 내가 해줄 수도 있지만, 정신계의 증인이라 쉽게 인정되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강차헌 에스퍼가 길드를 만들 거라고 다짐하는 순간부터 방해하는 것들이 더럽게 많아지겠죠. 하지만, 성공한다면?”

성공한다면.

윤석현의 말을 따라 중얼거리던 차헌은 무기장이 있던 곳을 쳐다봤다. 차헌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얼음 둥지가 소복하게 생겨있었고, 그 안에는 연우가 자주 사용하던 훈련 도구가 담겨있었다.

“이거 맨입으로 알려주는 거 아닌 거 알죠? 길드를 차리면 나도 데려가요. 정신계는 불안정하다고 다들 싫어하거든.”

* * *

피곤했다.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도 노곤한 몸은 잠을 요구하고 있었다. 몇 시지? 주변을 살펴보려고 해도, 무거운 눈꺼풀은 꼼작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연우는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익숙한 마나에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치료실로 들어온 차헌이 자신에게 직행하는 게 느껴졌다. 옆에 선 차헌은 손을 뻗어 연우의 볼을 감싸 쥐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감촉에 밀어냈던 잠이 몰려들었다. 작게 하품한 뒤 그대로 수마에 빠지려는 연우를 끌어올린 건, 입술에 닿는 딱딱하고 차가운 물체였다.

뭐야, 뭔데 이거.

연우는 입술을 말아 물며 피하려고 했지만, 볼을 감싸 쥔 손이 연우의 퇴로를 막았다. 조심스럽게 입을 벌리는 손가락에 연우는 버둥거렸지만, 혀끝에 닿는 녹진한 액체에 모든 반항을 멈추고 입을 크게 벌렸다.

혀끝에 환상적으로 달콤한 액체가 닿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달콤함이 물에 닿은 솜사탕처럼 순식간에 사라지자 연우는 아쉬움에 혀끝을 달싹거렸다. 황홀한 맛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 혀끝을 둔하게 움직이자, 딱딱한 것이 입술을 세게 짓누르는 통증과 함께 액체가 입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맛있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는데 목덜미를 받친 차헌이 조금 더 먹겠냐며 물었다. 당연하지. 고개를 끄덕이자 입술에 병이 닿았다. 입을 크게 벌리는 순간, 입술에서 병이 떨어져 나갔다.

“마나 코어에 비해 포션이 너무 고농도예요. 많이 먹이면 안 좋아요.”

더 먹을 수 없다니 아쉬운 대로 입술에 묻은 포션을 할짝거렸다. 그러는 사이 병을 갈무리한 차헌이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좀 더 자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손길에 달아났던 졸음기가 몰려들었다.

포션에 수면제라도 들어있었던 건지 속절없이 잠에 빠졌던 연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도 눈에 졸음이 가득했지만, 연우는 기지개를 켜며 잠을 쫓아낸 뒤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손바닥에는 초승달 모양의 손톱자국이 가득했고 입안도 얼얼했다. 절대 기절하지 않겠다고 있는 힘을 다해 찍어눌러서 그런가, 작게 멍도 들어있었다.

그럼 뭐해, 결국 기절했는데.

혀를 찬 연우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았다. 나는 언제쯤 그 기억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건 뭘까. 손목을 들어 올린 연우는 찰랑거리는 팔찌를 쳐다봤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도 모자라 과거로 돌아오기까지 했다. 거기에 손목에 걸린 팔찌, 아니, 보석뱀까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단 이건 둘째치고. 차헌의 미래를 제대로 바꿔버렸으니 날아올 부메랑을 대비해야 했다. 강차헌은 물론이고 이상원과 센터장인 정영환을 포함한 모든 책 주인공들의 미래가 바뀌었다. 그로 인한 나비효과로 부메랑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죽음이겠지만, 이능만 잃게 되어 일반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역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가 되면 한연화가 벌어온 돈으로 먹고살아야지. 아니면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한 번에 보내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팔찌를 잡아당기고 있는데 차헌의 마나가 느껴졌다.

잠시 후 커튼이 열리며 차헌이 나타났다.

“일어났어요?”

고개를 끄덕이자 차헌이 연우의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는 일어나라는 듯 가볍게 손을 당겼다.

“눈뜨자마자 걸으라던데요.”

“아, 응.”

“빨리 일어나요. 좀 있으면 이상원 올 거예요.”

그 말에 연우가 벌떡 일어났다. 치료계가 자리를 비운 사이, 도망가야 한다는 말에 연우는 파들거리는 다리를 열심히 움직였다. 차헌의 부축 덕분에 치료실을 빠져나온 연우는 저도 모르게 차헌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조용하지.

평소 같았으면 옆에 들러붙어서 형이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냐며 미주알고주알 얘기를 늘어놨을 차헌이었다. 입에 담지도 못할 험한 말을 씹어뱉으며, 던전에 벌레를 풀어놓은 새끼를 죽여버리겠다며 이를 바득바득 갈아야 할 차헌이 묵묵히 걷고 있었다.

흰 눈으로 차헌을 살피던 연우는 배를 움켜쥐었다.

“왜요? 아파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잠시 뒤 연우의 배에서 꼬륵, 하는 소리가 났다. 던전에서 먹은 걸 죄다 게워냈고, 그 뒤로 잠만 잤던 터라 배가 쓰라릴 정도로 허기가 느껴졌다. 그 소리에 차헌은 웃지도 않고 한숨만 흘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평소라면 연우가 묻기도 전에 뭘 먹을 거냐며 채근했을 차헌이었다.

끼니때마다 연우의 입에 하나라도 더 밀어 넣겠다며 훈련을 하다가도 밥시간만 되면 달려오던 차헌이 한숨이라니. 눈썹을 긁적이던 연우가 앞서가는 차헌을 붙잡았다.

“밥…. 먹었어? 먹고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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