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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57화 (57/143)

57화

“훈련도 끝났는데 외식할까? 한정식 괜찮아?”

제안과 동시에 입 안에 군침이 돌았다. 다양한 반찬과 전복 돌솥 밥으로 이름을 알린 곳이라 차헌도 좋아할 것 같았다. 특히 겉절이가 정말 맛있었다. 뜨끈한 돌솥 밥은 상상만 해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으니 그냥 공깃밥으로 주문해서 찬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 될 것 같았다.

연우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자 차헌이 앞장서라는 듯 손짓했다.

“어딘데요?”

“복지 구역 가봤어?”

“포탈 어딨는지 알아요. 걸어가요.”

앞서가는 차헌을 보며 연우는 주린 배를 움켜쥐었다. 마나 멀미 때문에 쓰러진 연우가 던전 마나를 배출할 수 있도록 배려한 행동이라는 걸 알아 군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차헌의 착각이었지만, 자신의 트라우마를 설명하려면 덧붙여야 할 말이 너무 많았다. 어설프게 지어내느니 그냥 던전 마나에 취약한 에스퍼가 되는 게 나았다.

연우는 이마에 고인 땀을 닦아내다 몰래 한숨을 쉬었다. 평소 옆에서 호흡을 맞춰주던 차헌이 무슨 일인지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냥 이능을 쓰고 싶었지만 저번처럼 마나 멀미로 쓰러진 사람이 이능을 사용한다고 혼날까 봐 연우는 최선을 다해 발을 움직였다.

간신히 따라잡았는데 차헌은 표정 없는 얼굴로 연우를 힐끔 내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 이런 건 좀 불편한데. 작게 혀를 찬 연우는 차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화가 났는지를 모르겠다.

아까 포기하고 나가려는 걸 말려서 그런가? 하지만 보스만 죽이면 훈련 끝인데 거기서 못하겠다고 포기하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 훈련을 중단할 만큼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차헌의 상태도 멀쩡해 보였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자, 차헌이 포탈 앞에 서서 연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여기는 복지 포인트가 쌓이면 아무나 출입할 수 있어.”

사원증을 찍은 연우가 포탈을 열고 차헌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헌은 손톱자국이 난 연우의 손바닥을 문질렀다.

“이거 왜 치료 안 받았어요?”

“굳이 치료받을 필요가 없어서?”

대답과 동시에 눈썹을 찡그리는 차헌을 보며 연우는 선의의 거짓말을 택했다. 치료해달라고 부탁할 시간도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나오지 않았냐는 말에 차헌은 수긍한 표정으로 손을 붙잡았다.

치료해달라고 부탁할 시간이 있었어도 아마 치료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치료계의 성향은 대부분 조희서와 비슷했다. 발작해야 선심 쓰듯 가이딩을 해주는 조희서처럼, 치료계도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야 치료를 해줬다. 아, S급은 언제나 예외다.

포탈을 넘어가자 연우의 뒤를 따르던 차헌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연우와 눈이 마주치자 뚱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구경하고 갈래?”

자꾸만 걸음을 멈추는 차헌을 보며 연우는 안쪽을 손짓했다. 차헌은 유리창 너머로 전시된 물건을 보다가 누가 봐도 미련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요. 형 배고프잖아요.”

차헌은 밥부터 먹자며 걸어가다 공터 앞에서 멈춰 섰다. 차헌의 옆에 선 연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공터를 둘러보았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사라졌었다. 분명히 여기가 맞는데? 혹시 이전했나, 싶어 주변을 살피는 연우의 눈에 팻말이 보였다.

<공사 예정 지역>

…사라진 게 아니라 아직 안 지어진 거구나.

헛웃음을 흘린 연우의 머릿속에 다른 밥집이 떠올랐지만, 거기로 가자고 선뜻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거기도 안 지어졌으면 어떡해.

망설이고 있자 차헌이 둘러보고 결정하자며 손짓했다.

“유령 도시도 아니고 사람이 왜 이렇게 없어요?”

“보통은 복지 포인트로 아이템을 대여하지, 외식은 안 하니까.”

연우의 말에 차헌이 걸음을 멈췄다. 외식하지 말고 그냥 사내 식당에 가자고, 포인트로 아이템 대여하라는 말에 작게 웃던 연우가 돌아가려는 차헌을 붙잡았다.

“그때 윤석현 에스퍼가 그랬잖아. 정신계는 아이템이 필요 없다고. 보조계도 마찬가지야.”

공격계나 방어계는 그럴싸한 무기들이 많았지만, 보조계용 아이템은 효과가 미미한 아이템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걸 빌리느니 외식으로 맛있는 걸 먹는 게 나았다.

밥집을 찾는 척 주변을 둘러보던 연우는 차헌의 손목을 힐끔거렸다. 아까부터 실리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에 걸어뒀나 싶어 살펴봤지만, 실리 특유의 파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왜 말을 안 해주지?

“그냥 여기 가요.”

간판을 가리킨 차헌은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문 앞에서 선 연우는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가게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따끈한 열기에 몸을 움츠린 연우는 손짓하는 차헌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거나 시켜도 돼요?”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차헌은 다가온 직원에게 메뉴판 곳곳을 가리키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가게에는 재료를 다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따금 느껴지는 열기는 거슬리지 않았다. 이 정도 열기는 괜찮구나.

“형.”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데 차헌이 조심스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낯선 어조에 연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차헌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연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손을 가만두지 못하는 모습이나 연우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마치 훈련 중 사고를 치고 눈치를 살피던 그 모습과 똑같았었다. 너무 많이 시켜서 저러나? 이 정도는 괜찮은데?

“왜? 더 시킬래?”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 차헌의 모습에 연우는 천천히 눈을 굴렸다. 분명 공략은 성공적으로 끝냈는데? 이상원이 무슨 시비를 걸었나? 아니면 실리를 빼앗겼나?

궁금해서 속이 타들어 갔다. 그러나 연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차헌의 말을 기다렸다.

“형.”

“응.”

“...나한테 화 안 났어요?”

“갑자기?”

연우의 대답에 축 늘어져 있던 차헌이 눈이 동그래졌다. 차헌의 울적한 시선에 당황한 연우는 눈을 깜박였다. 아니, 화가 난 적이 정말 수도 없이 많아서 그랬다. 그때마다 어쩌라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넘어가던 차헌이 갑자기 화가 났냐며 눈치를 보는데, 사람이 좀 당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나?

눈매를 누그러트린 차헌은 숟가락을 챙겨주며 우물쭈물 물었다.

“형은 내가 던전에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안 나요?”

안 날 리가. 안 그래도 꾹꾹 눌러 참고 있는데 왜 기름을 퍼붓는 거지?

화염 거미를 알아봤던 그 순간부터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두려움과 싸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한마디 하는 것도 힘들어 혀를 몇 번이나 씹어 입안이 다 너덜거렸다. 속이 뒤집히는 걸 참아가며 도와줬더니 뭐? 형이 해요?

성공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른다. 사람이 그렇게 말했으면 알아서 좀 잘할 것이지, 막판에 안 하겠다고 배 째라는 태도에 마나 코어도 기가 차서 쿨럭거릴 정도였다.

내가 하라고 하면 못 할 줄 알아? 싶어 실리를 칼로 변형시킨 것까지는 할 만했다. 생각보다 많은 마나를 잡아먹어 힘들었지만, 화염 거미도 죽기 직전이었으니 빠르게 처리하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었다. 얼른 죽이고 나가서 좀 자야겠다고 결심했지만, 불타는 거미를 보고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

방관하고 있을 줄 알았던 차헌이 거미를 해결했고, 가상 던전 훈련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끝이 좋았으니 화를 낼 이유도 없었다.

괜찮다는 연우의 반응에 차헌이 고개를 푹 숙였다. 화낼까 봐 걱정하고 있었나? 그 모습이 어쩐지 조금 귀여워 보여 달래 주려 했는데, 고개를 든 차헌이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왜 화를 안 내요?”

“어? 내가 화낼 이유가 없잖아.”

그 말에 차헌이 연우의 손을 내려놓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훈련복이 팽팽해질 정도로 심호흡하던 차헌은 날아다니는 얼음 결정을 사납게 낚아챘다.

“…형은 저한테 관심이 있긴 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주변을 살벌하게 날아다니는 얼음 결정과 달리 차헌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저는 형이 뭘 좋아하는지 대충 알거든요. 형이 알려주지 않아도 이만큼 붙어 다녔으면 저절로 눈에 보이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런 연우를 빤히 바라본 차헌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느 정도 관심이 있으면 그런 게 눈에 들어오잖아요. 형이 성공하자, 성공하자 노래 부르기 전부터, 센터장한테 불려가기 전부터 가상 던전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게 보였어요. 그래서 센터장이 저랑 형을 가상 던전에 넣을 때도 뭐라 안 따지고 그냥 넘어갔던 거예요.”

그렇게 티가 났었나. 연우는 혀를 깨물며 바닥에 의미 없는 문양을 그리는 차헌의 손끝을 바라봤다.

“저랑 형이랑 가치관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어요. 나는 평생 일반인으로 살아왔고, 형은 에스퍼로 살아왔으니까 가치관이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이해하려고 했는데….”

말끝을 흐린 차헌은 연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저는 던전 공략보다 쓰러진 사람이 우선이에요. 사람이 다치면 치료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차헌의 말에 연우는 다시금 혀끝을 깨물었다.

던전에서는 다친 사람보다 공략이 우선이었다. 다친 사람을 끌고 다닌다고 게이트가 저절로 열리지는 않았다.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공략을 우선시해야 했다. 시체를 끌어안고 다 같이 죽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않나?

당장은 이해가 가지 않을 테지만, 차헌이 에스퍼로 각성한 이상 익숙해져야 했다. 토벌대의 선두가 될 사람이 바로 차헌이었다. 누가 다쳤다고 망설이는 순간 팀원은 몰살할 것이다. 다른 사람을 걱정한다고 마수들이 저절로 쓰러지지는 않는 법이니까.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근데 그거랑 내가 너한테 관심이 없다는 건 무슨 상관이야?”

“...형은 제가 사람으로 보이긴 해요?”

“당연하지…?”

네가 사람이 아니면 뭐야? 황당해하는 연우의 앞에 쟁반이 불쑥 나타났다. 차헌은 테이블을 채우는 음식을 보다 손을 뻗어 연우의 죽그릇을 감쌌다. 죽이 알맞게 식을 때까지 이능을 사용하던 차헌은 직원을 불러 장조림을 잘게 잘라달라고 부탁했다.

“형은 제가 사람으로 보인다고 했지만, 솔직히 모르겠어요. 형은 그냥 나를… 에스퍼로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차헌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몸을 기울이고 있던 연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듣자 하니 어이가 없었다. 네가 에스퍼가 아니면 뭔데? 연우가 숟가락을 내려놓자 차헌은 이것만 더 먹으라며 만두를 건넸다.

“형 말대로 훈련에 성공했어야 저한테 이득이었겠죠. 센터장을 신고할 자료도 확보할 거고, 이상원의 콧대도 눌렀을 거고. 하지만, 형. 형이 보는 나는 그런 사람이에요? 나 때문에 억지로 끌려들어 온 사람이 다쳤는데도 센터장을 신고했다고, 이상원의 콧대를 눌러버렸다고 만족할 사람으로 보여요?”

차헌의 말에 연우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훈련을 강행한 건 순전히 연우의 욕심이었다. 그래야 이상원이, 센터장이 차헌을 악착같이 붙잡을 테니까. 그래야 연우가 연화를 조금 더 지킬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말했잖아요. 나는 센터랑 계약할 생각 없다고.”

차헌의 미래를 바꿔버린 것도 모자라, 괴롭힘을 받는 걸 알면서도 센터에 묶어두려 했었다.

“라운드 길드장이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까 그때 나갈 거예요. 이런 얘기는 좀 진지하게 하고 싶었는데.”

혀를 찬 차헌은 전을 찢어 연우의 밥그릇에 올려두었다.

“어디랑 계약할지 안 물어봐요?”

네가 어디를 가든 인과율이 너를 다시 센터로 끌고 올 거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입술만 달싹거리는 연우를 보던 차헌이 쓰게 웃었다.

“거봐요. 형은 저한테 관심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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