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배고파.
주린 배를 움켜쥔 연우는 힘없이 문을 열었다. 집에 뭐 먹을 게 있었나. 신발을 벗은 연우는 식탁 위에 놓인 과일을 집어 들었다. 깎아 먹을 기력도 없어 보라색 사과를 물에 대충 씻고 껍질째 베어 물었다.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해?
눈앞에 없는 차헌을 욕한 연우는 사과를 꼭꼭 씹어 삼켰다. 차헌은 연우가 제게 관심이 없다는 망언을 마지막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음식을 집어넣을 때만 열리던 입술을 얼마나 꼬집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가 자기한테 관심이 없다고? 관심이 없었으면 칼을 들고 망나니짓을 하든 말든, 제 손가락을 썰어 먹든 말든 신경을 안 썼겠지! 툭하면 그런데요, 그래서요, 라며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던 차헌에게 마나를 다루는 법도 안 알려줬을 거라고!
어떻게든 말을 붙여보려는 연우를 무시한 차헌은 C 구역에 데려다주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끝까지 말 한마디 안 하고 포탈로 들어가는 차헌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헌이 원하는 대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에스퍼를 에스퍼 취급한 게 뭐가 어때서? 에스퍼니까 마나를 다루는 법도 알려주고, 같이 훈련도 한 거지. 사람 취급했으면 근처에 다가오지도 말라고 소리부터 질렀을 거다. 이제 이능 좀 다룬다고 이게 아주 혼자 큰 줄 알지.
뭐? 형이 해요?
내가 못 하니까 너를 가르친 거잖아. 내가 할 수 있었으면 너를 살리고 죽지도 않았겠지!
사과 하나를 다 먹어 치운 연우는 다른 먹거리를 찾다 말고 크게 심호흡했다. 바닥에 문양이 제멋대로 그려지고 있었다. 차헌은 원래 제멋대로인 에스퍼였고, 그 때문에 연우가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이러다가 내일 또 불쑥 나타나서 자기 이능 좀 봐달라고 하겠지.
사과 말고 다른 과일이 먹고 싶어 과일 바구니를 뒤적거리는데 블루베리가 눈에 보였다. 잠시 블루베리를 내려보던 연우는 팔찌로 시선을 옮겼다.
“야.”
팔찌에 블루베리를 가져다 봐도, 손목에 자국이 남도록 팔찌를 당겨봐도 검은색인 팔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갖은 시도를 해보던 연우는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이러다 연화가 들어오면 어쩌지.
블루베리 몇 알을 쥔 연우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일체형 원룸은 시선을 피해 숨을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연우가 가만히 팔찌를 노려보다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연우는 손에 쥐고 있던 블루베리를 세면대에 내려두고 문을 걸어 잠갔다.
그 순간 스르륵 미끄러진 팔찌가 땅에 툭, 떨어졌다. 막을 새도 없이 연우의 발목을 타고 기어오른 보석뱀이 세면대를 향해 점프했다. 연우는 정신없이 블루베리를 탐하는 보석뱀을 보며 허전한 손목을 문질렀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을 줄이야.
보석뱀을 보고 있자 머리가 아파졌다. 대체 이게 어디서 들러붙은 거지?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고민하는데 블루베리를 다 먹어 치운 보석뱀이 꼬리를 흔들었다.
[안녕.]
언젠가 들어본 성별도 나이도 짐작하기 어려운 나른한 목소리였다.
[오랜만이야.]
“오랜만?”
연우의 질문에 보석뱀은 입을 쩍, 벌렸다.
[설마 기억 안 나?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아팠는데.]
기억이 안 날 리가. 근데 아팠던 건 네가 아니라 나 아니었던가. 사람 손을 개껌처럼 깨문 건 기억도 안 나는지? 보석뱀의 말에 첫 만남을 떠올린 연우는 이어지는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훈련을 위해 방문했던 마수 연구소에서 파란 눈의 보석뱀을 본적이 있었지만, 이런 황금색 눈은 처음이었다.
황금빛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마수가 있었지만, 사이즈가 달...아니, 잠시만.
[기억났어? 나 그때 진짜 아팠어.]
연우를 향해 다가온 보석뱀은 꼬리로 목을 쓸어내렸다. 보석뱀의 꼬리가 짚는 곳을 보자 연우의 심장이 아프게 뛰기 시작했다. 사족형 드래곤 해츨링이 어떻게 생겼었지? 태어났을 때부터 팔다리가 달린 날개형 드래곤과 달리 사족형 드래곤은 뱀의 모습으로,
입을 틀어막은 연우는 보석뱀을 내려보았다. 황금빛 이채를 띠는 홍채와 길게 찢어진 동공, 검은색 비늘이 과거의 기억을 끌어오자 곧바로 단검을 휘둘렀다. 그대로 내려찍으려 했지만, 드래곤과 눈이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둥실 떠오른 칼날이 롤케이크처럼 돌돌 말리더니 구석에 처박혔다. 텅 빈 연우의 손아귀에 파고든 드래곤은 연우와 눈을 맞추며 턱을 치켜들었다.
[연우야. 너는 나를 절대 못 죽여.]
* * *
[연우야. 이거 더 없어?]
“없어.”
[저런, 아쉬워라.]
블루베리를 찾아 과일바구니를 뒤적거리던 드래곤이 한숨을 포옥 쉬었다. 한 통 가득 담겨있던 블루베리를 다 먹고도 배가 차지 않았나 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드래곤은 연우가 먹고 있던 시리얼을 향해 달려들었다.
[맛없어.]
조금 따라주자 맛을 보던 드래곤은 마나를 사용해 그릇을 저 멀리 밀어버렸다. 연우는 숨을 길게 내쉬며 우유가 쏟아지지 않게 그릇을 치웠다. 시선을 돌리니 포도 위에 올라탄 드래곤이 빨리 달라는 듯 몸을 들썩거리고 있었다. 연우는 포도를 감싸고 있던 포장을 느릿하게 벗겨냈다. 드래곤이 곧바로 포도를 향해 달려들자 연우가 빠르게 낚아챘다.
“씻어줄 테니까 기다려. 던전에 먼지가 얼마나 많은 데 씻지도 않고 그냥 먹어.”
연우가 포도를 깨끗하게 씻은 뒤 하나씩 떼어주자, 몸으로 포도알을 감싼 드래곤이 열심히 입을 오물거렸다. 태평한 드래곤과 달리 연우는 한 입도 먹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연화가 아공간에서 뛰쳐나와 그 새끼는 뭐냐고 따질 것 같았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포도를 다 먹은 드래곤이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아프잖아.”
[내가 계속 말했잖아. 나는 그 아이의 기척을 느낄 수 있다고.]
그러니 얼른 다음 포도를 달라며 재촉했다. 포도알을 떼어준 연우는 제 눈 색과 비슷한 포도알을 열심히 베어먹는 드래곤을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드래곤이 포도를 먹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너는 왜 작아진 거고, 나는 왜 과거로 돌아온 건데?”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내린 드래곤은 포도알에 집중했다. 연우는 드래곤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줬다. 드래곤이 마지막 포도알 조각을 삼키자, 연우가 미련 없이 과일 바구니를 치워버렸다.
[연우야?]
“이제 얘기 좀 하자. 먹고 얘기해준다더니 아까부터 계속 먹기만 하잖아.”
[그야 아직 배가 고픈걸.]
“그럼 그거나 먹어.”
[싫어!]
바나나를 보며 펄쩍 뛰어오른 드래곤은 연우의 손가락에 감겨 징징거렸다. 딱 한 알만 더 먹겠다는 말에 포도알을 떼어주자, 어깨까지 기어오른 드래곤이 이제는 두 개만 달라며 요구했다.
“이건 뭐 드래곤이 아니고 돼지야? 네 몸보다 더 먹었잖아.”
[세상에나, 연우야. 나는 아직 한참 자랄 헤츨링이야.]
그래. 한참 자라서 눈알이 내 키보다 커지겠지. 연우의 한숨 소리에 포도알을 우물거리던 드래곤이 제 꼬리 위에 턱을 올려놓았다.
[궁금한 게 많겠지만, 내가 알려줄 수 있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아.]
“몰라서 못 알려준다는 거야? 아니면 알아도 못 가르쳐준다는 거야?”
연우의 질문에 드래곤이 꼬리 끝으로 입술 위를 가볍게 문질렀다. 뭐 하는 거야? 인상을 쓰자 눈을 가늘게 뜬 드래곤이 입꼬리를 쭉 늘렸다. 대충 입에 지퍼를 채웠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알아도 못 알려준다는 건가? 아니, 근데 마수가 저런 걸 어디서 배운 거지?
팔짱을 낀 연우는 열심히 귤을 굴려서 가지고 오는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알아도 못 알려준다고…. 드래곤을 길게 훑어내리던 연우가 드래곤의 몸 한가운데를 응시했다.
“그럼 이것만 물어볼게. 네 드래곤 하트는 어딨어?”
[여기에 잘 있지. 연우, 네 덕분에 열심히 키운 심장을 새로 갈아 끼워야 했어.]
“응. 덕분에 나도 통구이 경험을 해봤네.”
태연하게 중얼거린 연우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뛰어난 재생 능력 덕분에 갈가리 찢어 죽여도 심장만 멀쩡하다면 재생하는 게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재생한 게 아니라 심장을 새로 갈아 끼웠다고? 그럼 그때 확실하게 죽었다가 새로 살아난 건가? 연우처럼?
“그럼 과거로 돌아온 이유가 뭐야?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기억이 있어?”
[아까 그것만 물어본다고 했잖아. 이제 이것 좀 까줄래?]
귤을 굴려 연우의 앞에 가져온 드래곤은 꼬리 끝을 살랑거렸다. 연우는 드래곤이 먹어 치운 과일의 잔해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먹어. 배탈 나겠다.”
[세상에. 나중에 언제?]
그런 연우의 손에 매달린 드래곤이 급하게 물었다. 나중에가 나중에지, 생각하던 연우는 문득 제가 어디서 활동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연우가 혼자 있을 때만 모습을 드러내고, 그때마다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 치우던 모습을 떠올린 연우는 한숨과 함께 귤을 집어 들었다.
“이제 챙겨줄 테니까, 그렇게 몰래 나와서 먹지 마.”
[그럼 나 그, 그, 김밥 먹고 싶어.]
드래곤의 말에 연우는 귤의 흰색 실을 떼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괸 연우는 귤 조각을 끌어안고 한 입씩 베어먹는 드래곤을 내려보았다.
“내가 너를 보호하려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이유도 비밀이야?”
드래곤의 당연하지? 라는 표정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쌍방이었지만 서로서로 죽이려 했던 것도 모자라 실제로 죽인 사이였다. 분노와 증오심이 들끓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만 먹어.”
입이 느리게 움직이는 게, 딱 봐도 배 터질 것 같은데 억지로 먹는 모습이었다. 손을 내밀자 귤을 입안에 밀어 넣던 드래곤이 느릿느릿 기어 왔다. 배가 눌렸는지 기어 오다 말고 헛구역질하는 모습에 연우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혀를 날름거리던 드래곤이 웃지 말라는 듯 팩 쏘아 올려봤다.
[이렇게 먹어도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건 아니?]
그렇겠지. 마수가 자라기 위해서는 많은 마나가 필요했다. 던전에서는 숨만 쉬어도 마나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바깥은 아니었다. 수많은 연구진이 자연에서 마나를 채취해보려 노력했지만, 오직 가이드만이 자연의 마나를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었다.
마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을 테니 최대한 마나를 받아들이기 위해 배를 채우는 모양이었다.
“근데 너 뿔은 어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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