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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59화 (59/143)

59화

뿔이 있어야 할 자리를 문지르자 드래곤이 하지 말라는 듯 몸부림을 쳤다. 사족형 드래곤의 헤츨링은 뿔이 달린 뱀의 모습이라고 알려져 있다.

과거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연우는 원래의 육체를 찾았지만, 드래곤은 새로운 육체를 얻은 건가? 새로 태어난 거라면 성룡의 보호를 받지 않고 왜 밖에 있는 거지?

[안 알려줄 거니까 그만 물어봐. 그리고 좀 더 만져봐.]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던 건지 드래곤은 머리에 힘을 주고 내밀었다. 연우는 서늘한 비늘을 문지르며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했다.

‘그때’ 차헌을 제외하고는 연우가 드래곤과 제일 가까이 있었으니, 어쩌다가 드래곤의 심장 조각이 자신에게 묻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 상태에서 같이 과거로 돌아왔다면 던전이 아닌 연우의 곁에서 새로 태어났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공간에 있는 연화의 마나를 느낄 만큼 예민한 드래곤이라면 근처에 생긴 게이트를 타고 던전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낫지 않나?

“던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뭐야?”

마수는 던전을 넘어 다닐 수 있으니 제가 살던 던전으로 돌아가는 것쯤이야 간단할 거다. 천지사방에 에스퍼가 널린 센터보다는 던전이 더 안전할 건데 왜 돌아가지 않는 거지? 던전 마나를 마음껏 흡수할 수 있으니 더 빨리 자랄 수 있을 텐데.

[연우야. 지금 내가 뭐로 보이니?]

“…보석뱀?”

착잡한 목소리로 물어본 드래곤이 연우의 대답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내가 던전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되겠니?]

그 말에 연우는 입을 다물었다. 성장을 위해 에스퍼를 공격하는 마수들은 같은 마수도 공격하곤 했다. 보호자가 없는 헤츨링이라면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공격 대상이 될 것이다.

[연우 너도 봐서 알겠지만, 이렇게 나약한 달걀 껍데기 같은 나를 노리는 마수들이 한둘이 아니야. 그런데 내가 던전에 어떻게 들어가겠어. 지금 나는 누구를 공격하기는커녕 나를 지킬 힘도 없는데.]

연우는 화염 거미가 끈질기게 제 손목을 노리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마땅한 눈으로 제 몸을 훑어보던 드래곤은 사납게 꼬리를 휘둘렀다. 몸을 지키기는커녕 저러다가 제 꼬리에 자신이 얻어맞는 게 아닐까, 걱정되는 버둥거림이었다. 입을 달싹거리던 드래곤이 샥! 소리를 내며 입을 크게 벌렸지만, 뻐끔거리는 입 안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것 보렴. 이래서 얌전히 숨어있다가 뿔만 자라면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단다. 뿔이 자랄 정도로 심장이 자라면 내 몸을 지킬 정도는 될 테니까. 하지만 이곳은 마나가 너무 희박해서 조금도 자라지 않더구나. 그래서 4년은 지나야 돌아갈 수 있겠다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네가 많은 곳을 돌아다녀 준 덕분에 조금 자랐어.]

꼬리를 쭈욱 내밀어보던 드래곤은 마나가 가득할수록 성장 속도가 빨라진다며 꼬리 끝을 살랑거렸다.

[앞으로도 오늘같이 던전 마나가 가득한 곳을 돌아다닐 예정이니?]

앞으로라, 연우에게 남은 시간이 있을까.

손톱자국이 남은 손바닥을 문지르던 연우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후발대로 뽑히지 않았으니 던전에는 못 들어가겠지만, 위험 구역도 나름 던전 마나가 가득한 곳이었다. 연우의 끄덕임에 드래곤이 눈을 빛냈다.

[그래서 말인데, 내게 보호자가 필요해.]

“보호자?”

[나를 지켜줄.]

드래곤은 연우의 손가락에서 내려오더니 갑자기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그러게 작작 먹으라고 했지.”

내가 이럴 줄 알았다며, 등을 두드리려 했던 연우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등인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사람과 드래곤은 구조부터가 다른데 등을 두드려주는 게 과연 옳은 도움일까? 그냥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게 쓰다듬어주고 있자 캑캑거리던 드래곤은 아주 작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보지도 못할 속눈썹 같은 것을 뱉어냈다.

과일 껍질이 목에 걸렸나? 가져다 버리려는데 그것을 조심히 물어 올린 드래곤이 연우에게 고갯짓했다. 손을 내밀자 드래곤이 연우의 손바닥에 그것을 올려두었다.

“저게 쓰레기통이야. 보여? 다음부터 저기에 버려.”

[쓰레기 아니야!]

쓰레기통으로 걸어가는 연우의 바지를 물고 늘어진 드래곤이 손바닥을 보라며 쿡쿡 고갯짓했다. 뭔가 싶어 내려보자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파편이 규칙적인 파동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빨려 들어갈 듯 파편을 내려보던 연우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뭐야?”

[쥐어봐.]

드래곤의 말에 천천히 주먹을 쥐자 쿨럭, 하고 마른기침이 튀어나왔다. 연우는 꽉 조이는 심장이 답답해, 입을 감싸 쥔 채 기침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드래곤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이 피로 물들어있었다.

“이게 뭔지 똑바로 말해.”

색색거리는 목소리 때문에 속삭이듯 묻게 되었지만, 드래곤은 알아들었다는 듯 꼬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내 심장의 조각이야. 원래는 더 컸는데 욕심 많은 못된 것들이 뜯어가는 바람에 작아졌지.]

급히 손을 내려봤지만, 손바닥에서 반짝거리던 황금빛 파편은 사라진 상태였다. 혹시 떨어지기라도 했을까, 주변을 둘러보려 했지만 연우는 자리에 주저앉아 힘겹게 기침을 토해냈다. 연우는 한참이나 기침하다가 휴지를 물고 오는 드래곤을 노려보았다.

“가지고 올 거면 좀 많이 가져오던가, 한 장이 뭐야.”

[그것도 가지고 오다가 날아갈 뻔했다는 걸 알아줄래? 아무튼, 어때 연우야?]

바닥에 주저앉은 연우는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방금 그게 드래곤 하트였다고. 눈을 감자 마나 코어가 기분 좋은 박동과 함께 마나를 만들어내는 게 느껴졌다. 심장 박동과 박자를 맞추던 마나 코어가 삐끗거리자 또다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입을 감싸며 기침하던 연우는 휴지를 둘둘 감아 입을 틀어막았다. 연우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드래곤을 붙잡았다.

“미, 쿨럭, 큭, 미리 말 좀 해, 해주면 안 돼?”

[알았어. 다음부터는 경고할게.]

연우는 연화가 보고 놀랄까 봐 주변을 정리하며 피가 묻은 휴지를 검은 봉지에 정리했다. 피를 닦지 않은 곳이 있는지, 피 냄새가 나지는 않는지 꼼꼼하게 살핀 연우는 얼굴에 묻은 피를 씻고 나왔다.

정리하는 내내 어떠냐고 귀찮게 굴던 드래곤 때문에 연우는 가슴에 손을 올려야만 했다. 확인해 보니 마나 코어의 용량이 커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용량만 커진 게 아니라 마나 코어 한쪽에 달라붙은 드래곤 하트가 심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어떠니? 고작 그것만으로도 그런 효과를 얻을 수 있는데, 다들 나를 온전히 가지겠다고 욕심내겠지?]

당연하지. A급 마수의 마석을 아무리 쓸어 모아도 드래곤 하트에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가 훨씬 컸다. 그래서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드래곤을 토벌하러 갔었다.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걸 나한테 준 이유는 뭔데?”

[나를 키워줘.]

“싫어.”

단호한 대답에 드래곤의 입이 뻐끔거렸다.

[김밥 먹여준다고 했잖아!]

“밥 정도야 나눠줄 수는 있어. 하지만 너를 키워주지는 못해. 너랑 같이 다니면 오늘 그랬던 것처럼 온갖 마수들이 너를 잡아먹겠다고 달려들 텐데 나는 나를 지키기에도 벅차.”

그 말에 식탁에 똬리를 틀고 있던 드래곤이 연우의 손바닥에 기어올랐다. 손가락보다 가느다란 드래곤이지만, 그래도 드래곤이었다. 한낱 C급인 연우가 드래곤을 지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낱 C급이라니.]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드래곤이 혀를 끌끌 찼다.

[아무튼 나도 맨입으로 키워달라고 부탁하는 게 아니야. 나랑 계약하면 연우 너는 드래곤의 계약자가 될 거고, 그렇다면 나와 마나 코어를 공유할 수 있게 돼. 아마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네 마나 코어가 제일 커지게 될걸? 그렇다면 나를 지키는 게 좀 더 수월해지겠지? 뿔이 날 때까지만 키워줘. 대가는 섭섭하지 않게 지불할게.]

드래곤은 약속한다며 연우의 새끼손가락에 몸을 감았다. 손가락에 턱을 올린 드래곤이 황금빛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연우를 올려봤다. 그 눈을 보던 연우는 한숨을 삼키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다른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나한테 마나를 먹여주기만 하면 돼. 이왕이면 던전 마나가 제일 좋지만, 아까처럼 과일도 나쁘지 않아.]

마나를 먹여줄 순 없었다. 연우의 마나 코어는 너무 작고 소중해 이능을 사용하기에도 부족했다. 앞으로 연화가 들고 오는 던전 부속물은 다 드래곤의 차지가 되겠군. 식탁에 엎드린 연우는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눌렀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드래곤을 키울 수는 없었다. 연우가 잘못되었을 때 팔찌의 정체가 드러난다면 연화에게 온갖 화살이 날아갈 게 뻔했다.

[연우야, 말했잖아. 그냥 계약하자는 거 아니야. 나도 정체를 숨겨달라는 조건을 걸 테니, 연우 너도 필요한 게 있다면 내게 말해주렴. 불안하다면 드래곤 하트에 제약을 거는 것도 괜찮아. 이렇게 매달릴 만큼 내가 위험한 상황인 걸 알아줄래?]

재촉하지 않을 테니 천천히 고민하라던 드래곤은 식탁 위를 빙글빙글 돌아다니며 이따금 꼬리를 내려쳤다. 탁탁거리는 소음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빠르게 기어 온 드래곤이 몸을 세워 연우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나와 계약한다면 연우 네가 걱정하는 미래는 오지 않을 거야.]

그 말에 몸을 세운 연우는 드래곤을 낚아챘다. 손에 힘이 들어가자 손등을 깨문 드래곤이 아프다며 바둥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연우 너는 지금 인과율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잖아? 나와 계약하면 너도, 음, 여기서는 뭐라고 부르더라, 아, 그래, 던전. 너도 던전에 속하게 될 테니 인과율에서 벗어날 수 있어.]

드래곤은 나긋하게 속삭였다.

[네 마음대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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