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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60화 (60/143)

60화

“조심하세요!”

커다란 외침에 뒤를 본 연우는 손을 뻗어 마나볼을 낚아챘다. 날아오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더라니 손바닥이 다 얼얼했다. 손을 가볍게 턴 연우는 달려오는 에스퍼를 향해 이능을 사용했다. 제 손 위로 떨어지는 마나볼을 잡은 에스퍼가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괜찮다고 답할 여력이 없었다.

팔찌를 노려보던 연우는 심장 언저리를 문질렀다. 이능을 사용할 때마다 심장 한쪽이 뻐근했다. 드래곤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라고 했지만,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불편했다. 12살부터 함께 해온 마나 코어가 제 것이 아닌 기분이었다.

자리에 앉은 연우는 훈련 도구를 쥐고 이능을 사용했다. 바닥에 그려지는 문양이 조금 더 선명해졌지만, 정확도가 미묘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능이 튀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예전에는 손가락의 힘이 빠져 저도 모르게 물건을 놓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어린아이의 손으로 물건을 옮기는 기분이었다.

마치 처음 각성했을 때로 돌아간 기분이라 연우가 추억에 잠겨 훈련하고 있을 때, 익숙한 마나가 다가왔다.

“어디 다친 데 없어요?”

박서현이었다.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박서현은 옆자리를 가리켰다. 앉아도 되냐는 말에 자리를 비켜주자 옆에 쪼그려 앉은 박서현이 연우의 훈련 도구를 만지작거렸다.

“잘 다녀왔어요?”

일주일 동안 그렇게 무시하더니. 언제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말투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연우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긋 웃었다.

“잘 다녀왔죠.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아하하, 누가 보면 며칠 다녀온 줄 알겠다. 저희도 잘 지냈죠. 팀 가이드가 출근을 안 했지만, 뭐… 있으나 없으나 티도 안 나잖아요.”

그러고 보니… 주변을 둘러보던 연우는 그제야 조희서의 부재를 눈치챘다. 배재영 에스퍼 따라갔어요. 조희서의 행방을 알려준 박서현은 훈련장 입구에 눈을 고정한 채 말을 걸었다.

“이능 테스트받기로 했다면서요.”

“조희서 가이드와 정은영 에스퍼 덕분이죠.”

조희서는 이능이 튀는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하기 싫다고 물꼬를 텄고, 정은영은 이능이 튀는 에스퍼가 가상 던전에 들어가도 되냐며 이게 특혜가 아니면 뭐냐고 사방팔방 알리고 있었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연우의 이능이 튀는지 안 튀는지 직접 확인해보려 했다. 방금처럼 마나볼을 던져서 은근슬쩍 확인해보는 건 양반이었다. 갖가지 방법으로 연우의 이능을 확인해보던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했는지 이능이 너무 하찮다고, 센터에 들어올 능력이 없는데 동생 덕분에 혜택을 받은 게 분명하다며 말을 퍼트렸다.

연화의 등에 업고 설칠 거면 라운드 길드에 들어갔겠지, 미쳤다고 센터에 입사했겠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귀에 사실을 말해봤자 떠드는 입만 아플 뿐이다. 저런 말을 듣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고.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시침을 뗄 사람들이었다. 바로 옆의 박서현처럼.

하지만 훈련소장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참지 못했고, 연우에게 이능 테스트를 받아볼 것을 권했다.

“굳이 안 받아도 될 텐데.”

박서현은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연우 에스퍼 이능 멀쩡하잖아요. 왜 일을 키우는지 모르겠어요.”

박서현의 위로에 연우는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위로는 고맙지만, 솔직히 말해서 연우의 이능이 멀쩡한 건 아니었다. 이능 테스트를 받는 건 이전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이라 그리 수치스럽지는 않았다.

[나와 계약하며 인과율에서 벗어날 수 있어.]

그 순간 드래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연우는 미련 없이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고위 마수인 드래곤이니 세뇌를 통해 연우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을 수도 있었다.

드래곤이야 연우에 대한 신뢰가 가득해 보였지만 연우는 아니었다. 성급히 계약했다가 드래곤에게 마나 코어를 빼앗긴다면 억울해서 눈도 못 감을 게 뻔했다. 오늘 아침에도 반찬 투정하다 말고 계약하자며 빽빽거리는 드래곤을 무시하고 나온 참이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과일은 질린다며 마석이나 마나 코어를 먹여달라며 투정을 부릴 줄이야. 마석이야 그렇다 쳐도 마나 코어는 어떻게 구하냐 물어보니, 귤을 베어먹던 드래곤은 콩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했다. 마석이랑 똑같아. 죽이면 나와.

이 미친 새끼. 사람을 살인범으로 만들려고. 팔찌를 노려보던 연우는 팔찌를 비틀었다.

“왔다.”

벌떡 일어난 박서현이 훈련장 입구로 향했다. 문이 열리며 무기 보급을 받으러 갔던 후발대 팀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혹시나 잃어버릴까 두 손으로 무기를 꽉 쥐고 있던 에스퍼들이 연우를 보고 달려왔다.

“한연우 에스퍼!”

“가상 던전은 어땠어요?”

“가상 던전이랑 훈련이랑 많이 달라요?”

에스퍼들에게 둘러싸인 연우는 침착한 얼굴로 웃었다. 공개된 훈련이 아닌 이상, 다른 구역 에스퍼와 훈련한 건 보안을 위해 비밀에 부쳐야 했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굳이 물어본다는 건 정보 공유가 목적이 아니라 과시욕 때문이겠지. 후발대로 선발된 자신들과 아무 임무도 받지 못한 사람들을 구분하려는 게 눈에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연우는 손을 들어 박서현을 가리켰다.

“저야 뭐, 박서현 에스퍼가 알려주시는 대로 했죠.”

아쉽게도 이번엔 후발대로 뽑히지 못했지만, 과거 몇 번이나 던전을 오갔던 사람이었다는 걸 강조하자 그 말에 연우에게 몰려있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박서현에게 옮겨졌다.

박서현은 인정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시선을 돌려주면 관계가 회복될 것 같았다.

신이 난 박서현을 지켜보던 연우는 한쪽에 뻘쭘하니 서 있는 최동원을 바라보았다. 뭐, 저쪽은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조희서는… 모르겠다. 연우는 한숨을 내쉬며 무기를 점검하는 배재영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조희서를 쳐다봤다. 배재영이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데도 조희서는 배재영의 옆에서 뭐라 말을 걸고 있었다.

얼굴 본 김에 반지를 돌려줘야겠다.

보조 가방을 뒤적거리던 연우의 손가락에 하늘색 얼음 결정이 딸려왔다. 처음으로 만든 거니까 형이 맡아달라더니, 찾으러 올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잘 갈무리해 가방에 보관한 연우는 반지를 찾아 꺼냈다.

“배재영 에스퍼.”

“네. 저 시간 있어요.”

“네?”

연우를 붙잡은 배재영이 살려달라는 눈빛으로 조희서를 힐끔거렸다. 신호를 눈치챈 연우가 배재영을 데리고 구석으로 향했다. 홀로 동떨어진 조희서는 이리 오라는 박서현의 말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잘 다녀왔어요? 어땠어요?”

배재영의 밝은 목소리에 연우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덕분에 잘 다녀왔다고 대답한 연우는 반지를 돌려주려 했지만, 배재영이 기겁하며 막았다.

“그건 조금만 있다가 돌려줘요. 대신 훈련소장님 오실 때까지만 시간 좀 끌어줄래요? 나는 아무 권한도 없는데 계속 같이 데려가 달라고 부탁해서 죽겠….”

배재영은 조희서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다 말고 입을 막았다. 연우의 앞에서 팀 가이드를 욕한 게 찔리기라도 했나 보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녀가 따로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어깨를 으쓱거린 연우는 자리를 옮겨 조희서의 시선에서 배재영을 가려주었다.

“덕분에 살겠네요. 누가 보면 저랑 조희서 가이드랑 각인한 줄 알겠어요.”

한숨을 푹푹 쉰 배재영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발끝을 탁탁 두드렸다. 말도 없이 공동 구역에 찾아와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면서 배재영은 연우에게 하소연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반지를 가리켰다.

“이번에도 필요하지 않아요? 당장 필요한 거 아니니까 다음에 돌려줘도 되는데.”

“이번이요?”

연우의 질문에 배재영이 눈을 깜박거렸다.

“몰라요? 이번에 강차헌 에스퍼, 공격대에 참여하는 거. 당연히 한연우 에스퍼도 같이 갈 거라 생각했는데….”

“네?”

“그래서 토벌 일정 다 미뤘잖아요. 강차헌 에스퍼 가상 던전 통과하는 거 기다린다고.”

이어지는 말에 연우가 인상을 쓰자, 배재영이 눈치를 보며 입을 가렸다.

“어…. 제가 알려드리면 안 될 걸 알려드렸나요…?”

* * *

아, 괜히 이능 썼다.

뻐근한 심장을 문지르며 착지한 연우는 A 구역 포탈 앞에 섰다. 훈련 시간이라 그런가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선우건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훈련 중이니 메시지를 남겨달라는 음성만 들렸다.

죽집에서 헤어졌던 그날을 마지막으로 연우는 차헌을 볼 수 없었다. 대체 왜 내가 너한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냐고 물어보고 싶어도 눈에 보이질 않으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차헌이 애도 아니고 어련히 마음 잘 추스르고 찾아오겠지 싶었지만, 차헌은 정말 그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싸운 것도 아닌데 마음 한쪽에 불편함을 남겨둬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 싫었다. 얘기를 나눠보려 A 구역을 몇 번이나 기웃거려도 만날 수가 없었다. 전화번호를 모르니 전화도 못 했고. 진작 연락처 좀 교환할걸. 항상 직접 찾아가고, 차헌이 찾아오니까 연락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터라 연락처를 교환할 생각도 못 했었다.

바닥을 노려보고 있자 포탈이 열리며 꾸러미가 튀어나왔다. 전도현은 꾸러미를 두 손 가득 끌어안고 포탈에서 나오다 연우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이거 가지러 온 거 맞지? 곧 출발한대.”

꾸러미를 건넨 전도현은 연우의 등을 떠밀었다. 심부름 간 김에 인사도 하고 오라는 말에 광장으로 향하는 연우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연우는 광장을 둘러보다 우뚝 솟아있는 차헌의 얼굴을 발견했다.

꾸러미를 전달한 연우는 광장에 가득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를 파고드는 걸 포기하고 공간을 접었다.

“형?”

익숙한 마나가 느껴지자 차헌은 손을 뻗어 갑자기 나타난 연우를 붙잡았다.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구석으로 향한 차헌이 제 몸으로 연우를 숨겼다.

“형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어쩐 일이냐고?

입속에서 수많은 질문이 몰아쳤다. 센터랑 계약 안 하겠다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 던전에 들어가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평소에 할 말 못 할 말 다 하더니 이렇게 중요한 말을 왜 안 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차헌이 연화처럼 보호자가 필요한 에스퍼도 아니고, 같은 팀원도 아니니 연우에게 하나하나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화가 났지만, 화를 내기에도 애매했다. 왜 내가 너의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어야 하는 건지 따질 수도 없었다. 너랑 나랑 친하다며. 속이 울컥거려 눈을 내리깔고 있던 연우는 자기를 좀 보라는 차헌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형, 아니, 어, 그게, 상황이 좀 정리되면 말해주려고 했는데….”

듣는 귀가 많아 뒷말을 삼킨 차헌은 연우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일주일 넘게 숙소에 갇혀있다가 연우를 만나니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충만감이 차올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입꼬리가 올라가자마자 연우의 눈꼬리가 뾰족해지는 게 보여 차헌은 다급히 입술을 앙다물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생각이 전해지면 좋을 텐데.

가상 던전이 끝난 다음 차헌은 센터장에게 졸업장을 요구했지만, 예상대로 센터장은 갖은 핑계를 대며 만남을 거부했다. 그것도 모자라 가이딩 없이 던전에 다녀왔으니 폭주 위험이 있다며 숙소에 가둬놓기까지 했다. 라운드 길드장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센터와 계약할 때까지 숙소에서 못 나왔을 거였다.

갇혀있던 나날을 생각하니 절로 탄식이 나왔다. 식사를 가져다주던 직원을 붙잡고 방문자가 없었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는지 모른다.

그렇게 붙어 다니던 인간이 안 보이면 관심 좀 가져주고 그러지.

“뭐, 형은 어차피 안 궁금하잖아요.”

“강차헌.”

처음 들어보는 연우의 목소리에 차헌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았다.

“너 진짜 그렇게 생각해?”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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