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61화 (61/143)

61화

“진짜 그렇게 생각하냐고.”

차헌은 연우의 채근에 입을 꾹 다물었다. 연우는 답이 없는 차헌을 기다리며 점점 늘어나는 사람들을 확인했다. 이상원을 필두로 한 토벌대원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공격대로 참여한다고 했으니, 이상원이 들어간 12시간 후에 차헌이 들어갈 것이다. 그동안 연우는 차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생각이었다. 그런 연우에게 이상원이 다가왔다.

“강차헌 에스퍼. 그런다고 안 보일 것 같아요? 말했잖아요. 에스퍼는 눈이 아닌 감각으로 주변을 살펴야 한다고.”

이상원은 차헌을 보며 안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노력하면 언젠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될 거라며 차헌에게 조언한 이상원이 차헌의 뒤에 숨어있는 연우의 안색을 살폈다.

“몸은 괜찮아요? 좀 더 쉬고 가지. 그날 가이드도 대기하고 있었는데.”

“아, 일시적 멀미였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에이, 제가 걱정 안 하면 누가 한연우 에스퍼를 걱정해요.”

다음부터 몸이 안 좋으면 제 훈련장에서 쉬다 가라는 말에 차헌이 연우를 내려보았다. 부릅뜬 눈에 연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미쳤다고 이상원 훈련장에서 쉬냐.

“그런데 한연우 에스퍼는 무슨 일로? 명단에 없었던 걸로 아는데 같이 가려고 왔어요?”

차헌은 연우를 제 뒤로 밀어 넣으며 이상원의 시선을 차단했다. 눈에 보이는 건 차헌의 등뿐이라 연우는 두 사람이 무슨 시선을 주고받았는지는 볼 수 없었다. 잠시 후, 먼저 물러난 건 이상원이었다. 곧 출발하니 인사하고 오라는 말에 연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곧? 공격대로 들어가는 거 아니야?”

“이름만 공격대예요. 센터장이 죽어도 토벌대는 안 된다고 토벌대랑 공격대랑 동시 입장하는 걸로 바꿨어요.”

그러니까 왜 네가 벌써 던전에 들어가냐고. 책 속의 강차헌은 각성한 지 3년이 지나서야 던전에 들어갔었다. 근데 지금은? 일 년을 넘기긴 했나? 연우의 예상보다 차헌의 미래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문제는 연우가 원하는 대로 미래가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다.

“강차헌 에스퍼!”

“일단 저 갔다 올게요.”

훈련복이 늘어져라 쥐고 있던 연우는 불안한 눈으로 차헌을 올려봤다. 이상원이 어떤 새끼인지 뻔히 알면서 왜 같이 가겠다는 거지? 연우는 직원들의 재촉에도 차헌을 붙잡고 훈련복을 확인했다. 보조 가방을 열어 포션을 확인하던 연우가 차헌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 실리는?”

차헌은 말없이 이상원을 눈짓했다. 그제야 이상원의 손목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죽을 날을 앞당기면서까지 너한테 넘겨준 무기가 왜 쟤 손목에 걸려있냐는 물음을 한 마디로 압축시켰다.

“왜?”

“지금은 말 못 해요.”

차헌은 광장에 가득 모여있는 사람들을 향해 눈짓했다. 아무 설명 없이 연우의 손을 쥔 차헌이 손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원? 입 모양으로 묻자 차헌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원이 아니면…. 라운드, 라운드 길드구나.

“강차헌 에스퍼.”

직원의 재촉에 연우는 반사적으로 다시 차헌을 붙잡았다. 라운드 길드장이 차헌을 빼내 주기로 약속한 날이 오늘이었다. 이대로 차헌이 센터를 나간다면, 다시는 차헌을 보지 못할 것이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이대로 차헌을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일단… 일단, 그래. 다녀와.”

차헌은 연우의 인사에 팔을 어쩔 줄 몰라 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돌았다. 그렇게 직원의 뒤를 따라가던 차헌이 갑자기 몸을 돌려 뛰어왔다. 왜 그러냐는 말에 차헌은 손을 뻗어 연우의 손등을 쓸었다. 아무 말 없이 손등을 쓸던 차헌이 연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뭐? 무슨 소리야?”

차헌은 대답 대신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팔을 벌려 연우를 끌어안은 차헌이 대기하고 있던 직원에게 총총 달려갔다. 차헌을 마지막으로 인원이 모두 모이자, 공간계 에스퍼가 이능이 담긴 문양을 펼쳤다. 사람들을 감싸 안은 빛무리가 사라지고, 광장에 혼자 남아있던 연우의 귀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연우의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으흥…흥….]

“너야?”

[응흐흐흥. 응.]

드래곤의 대답에 팔찌를 감싸 쥔 연우가 집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들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나는 너한테 협박당했다고 말할 거라 경고해도 보석뱀은 몸을 비비 꼬며 웃기만 했다.

[연우야아아아.]

“이리 오라니까.”

이상한 음정으로 연우를 부르짖던 드래곤은 온 집을 기어 다녔다. 어차피 집이니까 놀게 놔둘까 싶었지만, 연화가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불안해서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이리 와서 블루베리 먹어.”

드래곤은 연우의 손을 쏙쏙 피하며 웃음을 흘렸지만, 결국 블루베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빠르게 기어 왔다. 드래곤은 뭘 잘못 먹었는지, 블루베리를 먹는 중간중간 흐느끼듯 웃기 시작했다.

[아, 너무 재밌어. 내 삶에 이런 자극은 처음이야.]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

시리얼을 내려놓으며 묻자, 드래곤은 바삭바삭한 부분을 골라달라며 연우의 옆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더니 눈을 가늘게 뜨면서 웃었다.

[계약하면 알려주지.]

“안 할 거라니까.”

드래곤은 치사하다며 투덜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리얼을 노리고 있었는지, 드래곤이 고개를 쭉 내밀며 그릇을 바라봤다. 그러나 연우가 시리얼에 우유가 스며들도록 꾹꾹 누르자 몸서리치며 도망갔다.

연우는 시리얼을 꼭꼭 씹다 다이어리를 꺼냈다. 새로운 정보를 다이어리에 써넣고 있는데 드래곤이 다가왔다. 드래곤이 읽기 쉽게 다이어리를 받쳐준 연우가 드래곤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네가 보기에도 그래? 내가 강차헌한테 관심이 없어 보여?”

연우의 질문에 드래곤은 먹던 블루베리를 내려놓았다. 먹던 것도 내려놓을 만큼 진지하게 조언해주려나 싶었는데 드래곤이 또다시 몸을 들썩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 연우야. 네가 몇 살이었지?]

“내 나이랑 이게 무슨 상관인데?”

[아니, 나는 네가 인과율 때문에 걱정하는 줄 알았거든. 근데 그게 더 신경이 쓰였구나?]

그 말에 다이어리를 정리하던 연우의 손이 멈췄다. 드래곤은 당황한 연우의 얼굴을 올려보다 흐흥, 웃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왜? 차헌이가 그렇게 말해서 서운해? 우리 연우 연애는 해봤어?]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나 때는 말이야. 알에서 나오자마자 뜨거운 사랑을 했다고. 그 나이에 연애 한 번 못 해 봤을, 악! 연우야! 나 아직 다 못 먹었!]

드래곤을 낚아챈 연우는 드래곤의 입에 손을 밀어 넣고 억지로 벌렸다. 뒤이어 손목에 감아 꼬리를 입에 물려주자, 버둥거리던 드래곤은 검은색 팔찌로 변해 축, 늘어졌다.

[너무해!]

연우는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막으며 팔찌를 노려보았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냐, 어차피 너한테만 들리는 거라며 불만을 토해내던 드래곤이 나른하게 하품했다. 드래곤은 하루에 20시간씩 잠을 자야 하는 헤츨링의 신세를 한탄하다 잠이 들었다. 드디어 적막이 찾아왔다.

고요함 속에서 연우는 오늘 있었던 일과 책 속의 일을 비교해본 다음 펜을 내려놓았다. 이상원이 주인공인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센터장, 장영환이 주인공인 책은 읽었었다. 그에 관한 기록이 다이어리에 남아있어 타임라인을 비교해볼 수 있었다. 연우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다이어리를 만지작거렸다. 지금이라도 유언장을 써놓아야 하나.

생각보다 너무 많은 미래가 변해 버렸다. 이능을 잃거나 죽는 날을 조금 앞당기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연화를 누구한테 부탁해야 하나, 고민하던 연우가 방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짐을 싸두라는 게 무슨 말이지? 연우는 차헌이 떠나기 직전 속삭였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형만 괜찮으면 짐을 싸두라니. 옷장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연우는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센터는 차헌은 물론 연우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라운드 길드장을 만나려는 계획도 센터장이 기를 쓰고 막겠지. 차헌은 결국 센터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연우는 착잡한 표정으로 훈련복을 벗은 뒤 거친 손길로 잠옷을 낚아챘다.

뭐? 형은 나한테 관심이 없잖아요?

허리에 손을 올린 연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걔를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어느 길드에 가는지 그거 하나 안 물어봤다고 관심이 뭐 어째? 진짜 관심이 없었으면 이상원한테 쥐어 터지든 말든 신경도 안 썼겠지. 훈련 마치자마자 폐가 터져라 달려간 사람한테 뭐? 어차피 형은 안 궁금하잖아요?

훈련복을 챙겨둔 연우가 침대 옆에 있던 종이 가방을 낚아챘다. 차헌이 던전 망고를 제법 맛있게 먹길래 따로 챙겨둔 것이었다. 연우는 종이 가방에서 망고를 꺼내 식탁에 척척 올려두고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내가 두 번 다시 신경 쓰나 봐라.

* * *

“무슨 일 있었어?”

연화의 물음에 연우는 저도 모르게 손목부터 감싸 쥐었다. 연화는 입 안 가득 피자를 밀어 넣은 뒤 연우가 쥔 핸드폰을 턱짓했다.

“밥도 안 먹고 핸드폰만 보고 있잖아.”

…내가? 그랬나? 연우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대답했지만, 신경은 엎어둔 핸드폰으로 몰려들었다.

“아니면 말고.”

어깨를 으쓱거린 연화는 치즈가 죽죽 늘어나는 피자를 들어 올리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오빠도 먹어.”

“이것만 마시고.”

연우는 콜라가 든 컵을 들어 올려 잘그락거리는 얼음을 바라봤다. 얼음을 보자 반사적으로 차헌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차헌과 밥을 먹을 때는 한 번도 김이 나는 음식을 본 적이 없었다. 모든 음식을 적당히 식혀주던 차헌이 없으니 먹음직스러운 피자도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잠시 냉장고에 넣었다 빼도 되냐고 물어보면, 연화가 미친 거 아니냐며 정색하겠지.

“요즘에 그 새끼들 아직도 그래?”

앞뒤 다 잘라먹은 연화의 질문에 연우는 한숨부터 흘렸다. 직원들은 연우가 센터 내에서 이능을 쓴 걸 비밀로 해주겠다며 거침없이 접근했다. 차헌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지성적으로 대화하자며 팔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어이가 없었다. 자기들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차헌이 거칠게 나가는 거라고 생각 안 하나?

그래서 강차헌은 언제 복귀하는 거야? 연우는 엎어뒀던 핸드폰을 들어 올리며 선우건에게  연락이 왔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 새끼들이 계속 그러면 말해. 이런 식으로 굴면 다시는 센터랑 거래할 일 없을 거라고.”

“알았, 뭐?”

연우의 질문에 눈을 굴리던 연화가 피자 두 조각을 겹쳐 쥐며 슬그머니 일어났다.

“한연화. 너 이리 와서 앉아봐.”

“일어나지도 못했거든.”

꿍얼거린 연화는 억울하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그 바람에 토핑이 바닥에 떨어지자 연우의 눈치를 보던 연화가 피자를 슬며시 내려놓았다.

“아니, 거래라고 해봤자 간단한 거야. 그냥 OX 퀴즈라니까? 여기에서 게이트가 발견되나요? 예. 이 게이트는 산림형 던전과 이어지나요? 아니요. 이거야.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예전처럼 안 그런다니까? 그냥 적당히 페널티 안 받을 정도로만 알려주고 있어.”

괜찮으니까 얼른 피자를 먹으라는 말에도 연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모든 미래를 알아내는 연화의 이능에는, 자신이 본 미래를 알리지 않으면 몸이 아픈 페널티가 붙어있었다. 책을 쓰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열이 심하게 오른 밤, 연화의 칭얼거리는 소리에 연우가 찾아오면 연화는 늘 꿈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덕분에 그런 페널티가 있다는 걸 알아냈었다. 협회도 그걸 알고 저들이 미래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연화가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며 미래를 캐내곤 했었다.

“아니 그리고, 자기들 입맛대로 미래를 바꿔보려다가 어떻게 됐는지 선례가 있잖아. 그 난리를 겪고도 자기들 입맛에 맞추겠다고 미래를 바꾸는 것들이 문제 아니야? 내가 그것까지 신경 써야 해? 이거 알려달라, 저거 알려달라 매달리던 것들이 꼭 일 터지면 모른 척하고, 아주 그냥 나만 나쁜 년이지.”

“너한테 욕하는 건 아닌 거 알지? 저번처럼 널 이용할까 봐 그러는 거야.”

“걱정하지 마.”

연화는 내가 이용당하고 있을 애냐며 코웃음을 치더니 피자를 입속에 밀어 넣었다.

“이거 먹고 또 자러 가야 해. 새로 태어날 이능력자도 없는데 계속 미래가 바뀌고 있어.”

연화는 어떤 새끼가 미래를 바꾸냐며 이를 바득바득 갈다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다 제 팔자 제가 꼬는 것도 모르고.”

연화의 말에 연우는 속으로 빌었다. 제 팔자는 이미 꼬였으니 연화의 팔자는 제발 풀리게 해달라고.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