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생각보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네요.”
이수빈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각성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발대가 던전에 들어간 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이번 토벌은 신입 각성자들도 대거 참여했기 때문에 보다 오래 걸릴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보다 더 늦어지고 있었다.
“혹시 안에서 무슨 일 일어난 건 아니겠죠?”
최동원은 공격대로 참여한 서유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걱정하며 물었다. 목 빠지게 기다리던 최동원에게 후발대가 아닐 거라며 위로했다.
“예측기의 결과보다 높은 등급의 던전이 나왔거나, 마수 둥지를 발견한 걸 수도 있죠. S급이 두 명이나 들어갔으니 마수들이 몰려들었을 가능성도 있고.”
박서현의 말에 연우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연우가 유추한 게 맞다면 차헌은 던전에서 라운드 길드장을 만났을 것이다. 던전 하나에 S급 세 명이 모여들었으니, 마수들에겐 잘 차려진 밥상으로 보였을 테고.
셋이 모인 광경을 상상하고 있자니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신경 쓰지 말아야지, 다짐해도 피 묻은 차헌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결국 연우는 훈련 도구를 내려놓고 광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하루에 몇 번씩 광장을 기웃거렸지만, 대기하고 있던 치료계는 언제나처럼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광장에서 멍하니 차헌을 기다릴 때마다 어디선가 삐딱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형은 관심 없잖아요. 투덜거리던 차헌의 목소리는 형이 무슨 상관이냐며 쌀쌀맞은 목소리로 변해있었다. 연우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팔찌를 내려보았다.
“자?”
작게 속삭이자 머릿속에서 잠이 가득한 목소리가 울렸다. 마나가 느껴지면 알려준다고 꿍얼거리더니, 이제 그만 좀 물어보라며 호통을 치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일과가 되어버린 광장 산책을 끝내고 훈련장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연우를 발견한 직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누가 봐도 긴장한 모습으로 다가온 직원은 연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한연우 에스퍼.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그 말을 선두로 폐를 끼쳐서 죄송했다, 실례했다, 와 같은 상투적인 사과의 말이 이어졌다. 연우는 대답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결국 연화가 한마디 했나 보다. 안 그래도 신경 쓸 거 많아 보이던데, 괜히 신경을 쓰게 만들었네.
“참나, 지켜주니 뭐니 하더니.”
날 선 목소리에 연우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 돌아보자 앞으로 나선 직원이 다른 직원들이 말리는데도 도발하듯 연우를 내려보고 있었다.
“부끄럽지도 않아요? 오빠가 돼서 동생을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고자질을 한 거잖아요.”
“고자질할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이제 고려해볼게요.”
이제 그만하자는 뜻으로 방긋 웃어주자, 말리던 손을 뿌리친 직원도 생긋 웃었다.
“한연우 에스퍼가 말한 게 아니라면 한연화 에스퍼가 이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요? 한연우 에스퍼는 알고 있나요?”
“글쎄요. 지금 이 장면을 본 게 아닐까요?”
연우의 말에 직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런 놈은 상대해줄 가치도 없었다. 연우는 훈련장으로 돌아가며 혀를 끌끌 찼다. 이런 것도 모르면서 연화랑 계약을 하겠다고. 책의 주인공들이 죄다 S급이니 연화가 볼 수 있는 미래도 S급에 한정되어있다고 많이들 착각하는데, 아니다. 연화가 보지 못하는 미래는 없었다.
훈련장으로 들어가자마자 한숨부터 나왔다. 정은영이 옆 사람에게 뭐라고 속삭이며 연우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이것들이나 저것들이나 연우가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쓴 여우처럼 보는데, 연우는 단 한 번도 연화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러 본 적이 없었다.
혼자 살기도 힘든 애한테 자신이라는 짐을 얹어주기가 싫어 온갖 선물도 거절해왔다. 거절당해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며 미안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저 사람들은 연우가 좋아서 잘해주는 것도 아니고, 언제 어디서 연화가 지켜볼지 모르니 연우를 통해 연화의 환심을 사려 접근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러지 않은 사람은 차헌뿐이었다.
또 강차헌. 불쑥불쑥 떠오르는 차헌의 얼굴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연우는 한숨을 쉬며 훈련 도구를 내려놓았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때가 왔는지, 이능이 이전보다 강하게 튀고 있었다.
“뭐가 잘 안 돼?”
다가온 이수빈이 연우의 옆에 자리를 잡자, 조희서가 불쑥 끼어들었다.
“너 이능 테스트 안 받으러 가?”
“조희서.”
조희서는 이수빈의 날이 선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지만, 연우를 쳐다보는 불순한 눈빛은 숨기지 않았다. 팀원을 쳐다보는 눈빛이라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눈빛이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연우가 스스로 이능 테스트를 받겠다며 훈련소장을 찾아갔었다. 차헌의 미래가 바뀌면 바뀔수록 언젠간 이능이 말을 듣지 않을 순간이 올 거였다. 그 전에 연우가 세상을 떠날 수도 있으니, 팀을 탈퇴하기 위한 절차부터 밟을 계획이었지만,
“돌아가세요.”
그러나 훈련소장은 언제 이능 테스트를 권했냐는 듯, 매몰차게 연우를 돌려보냈다. 연우는 이능 불안정자로 낙인찍혀 쫓겨나기 전에 센터를 나가고 싶어 몇 번이나 훈련소장을 찾아갔지만, 훈련소장은 연우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센터는 이능 불안정자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취급을 했다. 그런데도 이능이 튀는 연우를 쫓아내지 않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연화.
연우가 센터에 남아있다면, 성인이 된 연화가 센터랑 계약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래봤자 연화는 라운드 길드랑 계약할 텐데. 연우는 코웃음을 쳤지만, 센터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훈련소장은 조희서의 모든 요구를 묵살했고, 연우의 요청도 받아주지 않았다. 조희서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희서의 보이콧에 박서현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가이드가 있으나 없으나 가이딩을 못 받는 건 똑같지만, 가이드가 없는데 굳이 훈련할 필요가 있냐며 자유를 선언했다.
그런데도 연우는 훈련을 계속했다. 예전처럼 감각을 되찾기 위한 훈련이 아니라, 내가 이능이 튀고 있으니까 제발 좀 보라는 뜻이었다. 훈련소장은 눈앞에서 훈련 도구가 제멋대로 날아가고 있는데도 끝까지 못 본 척하고 있었다.
“이 이능으로 임무를 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쫓겨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단다. 그렇게 불만이면 제가 쫓아내던가. 연우는 한숨을 쉬다 흠칫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차헌의 마나가 느껴졌다. 복귀한 건가? 연우가 벌떡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바닥이 크게 울렸다.
[연우야! 광장으로!]
드래곤의 외침에 광장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바닥이 요동치고 있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비틀거리던 연우가 벽을 짚으며 버티고 있었는데 비상등이 울리며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경고 코드 1번. 경고 코드 1번. 센터 내의 직원분들께 알립니다. 다시 한번 센터 내의 에스퍼, 가이드, 직원분들께 알립니다.]
박서현은 경고음에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을 헤치고 연우를 찾았다. 최동원까지 찾은 박서현은 둘을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 박서현이 계속 소리쳤지만, 사방에서 울리는 경고음 때문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광장으로 가래!]
드래곤의 말에 연우는 최동원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이능을 사용하기가 두려웠다. 이동하다가 이상한 곳에 떨어지면 어떡하지. 망설이고 있자 박서현이 연우의 등을 떠밀며 문 쪽으로 손짓했다.
최동원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나가자 포탈 주변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있었다. 침착히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차헌의 파장이 연우의 심장을 쿵, 쿵, 두드렸다.
[저러다 죽겠는데.]
드래곤의 말에 연우는 팔찌를 내려보았다. 무슨 말이야? 입 모양으로 작게 물으니 드래곤은 배가 고프다며 딴청을 피웠다.
강차헌은 아니지? 채근해도 드래곤은 계속해서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연우는 발을 내려보다 최동원의 손을 잡고 공간을 접었다.
“한연우 에스퍼, 괜찮습니까?”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연우는 심장이 쥐어짜이는 불쾌한 기분에 몸서리쳤다. 그런 연우를 부축한 최동원은 복도 한쪽에 붙어섰다. 보조계와 방어계 에스퍼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뛰어가던 방어계가 최동원의 사원증을 확인하더니 급하게 손짓했다. 최동원은 곧바로 연우를 두고 달려가 방어막을 쌓기 시작했다.
연우는 방사되는 가이딩에 헛구역질하다 광장을 둘러보았다. 광장을 동그랗게 둘러싼 방어계 에스퍼들이 방어막을 세우고 있었고, 그들 뒤에 선 가이드들이 가이딩을 방사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강차헌?”
불투명한 방어막이 몇 겹이나 둘러싸여 있었지만,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강차헌이었다. 강차헌은 서리가 내려앉은 듯 하얗게 물든 머리카락을 하고 바닥에 웅크린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상원! 이게 무슨 일이냐고!”
터져 나온 고함의 주인은 센터장이었다. 센터장은 급하게 달려 나온 듯 셔츠만 입은 상태로 이상원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이상원은 바삐 뛰어다니는 사람들과 동상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도 태연한 얼굴로 웃을 뿐이었다.
“여기! 도와주세요!”
염력으로 벽을 들어 올리고 있던 보조계가 연우에게 도움을 청했다. 연우는 둘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둥실 떠오른 파편을 쥐고 이능을 사용했다. 부메랑 때문이 아니라 단순 가이딩 부족이었는지 이능은 멀쩡했다. 연우는 얌전해진 이능으로 보조계들과 함께 벽을 정리하면서도 이상원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음, 이건 놓으시고. 그리고 왜 저를 의심하세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하겠다.”
이상원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센터장을 떼어놓은 다음 강차헌을 바라보았다.
“던전에 들어가고부터 계속 단독 행동한 건 강차헌 에스퍼였습니다. 임무 받아서 신난 건 알겠는데 조심하라고 계속 주의도 줬습니다. 근데 강차헌 에스퍼가 폭주한 걸 왜 제 탓으로 몰고 가시죠? 고생고생해서 폭주하는 에스퍼 끌고 나왔더니, 칭찬은커녕 멱살잡이라.”
이상원은 구겨진 훈련복을 벗어 던지며 그대로 태워버렸다. 불꽃을 본 연우가 움찔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쾅! 하는 굉음이 울렸다.
“셋에 강화합니다. 하나, 둘, 셋!”
웅크려있던 차헌이 언제 일어났는지, 방어막을 내려치고 있었다. 차헌이 방어막을 내려칠 때마다 낮은 급의 방어계들이 한두 명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가이딩을 안 받아요!”
선두에 서 있던 A 구역 가이드의 외침에 연우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원래부터 가이딩 거부가 심하긴 했지만, 폭주하는 지금도 가이딩을 거부할 줄은 몰랐다. 뒤늦게 달려온 조희서는 쓰러진 최동원을 지나쳐 강차헌에게 달려갔다. 쿵, 쿵, 내려치는 소리가 커질수록 방어막의 두께는 두꺼워졌고, 방사되는 가이딩의 농도는 짙어졌다.
“한연우 에스퍼 보고 있는 거 아니에요?”
박서현의 말처럼 평소의 색을 잃은 하늘색 눈동자가 연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차헌 때문에 연우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미친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달려가서 차헌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만약 그랬다간 폭주하는 차헌에게 휘말려 연우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간신히 충동을 억누른 연우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차헌은 크게 주먹을 휘둘렀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어계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얇아진 방어막 때문에 주변이 혼란스러워진 순간이었다.
누군가 연우의 등을 떠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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