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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63화 (63/143)

63화

연우의 몸이 기우뚱거리며 앞으로 쏠렸다. 동시에 말랑한 방어막 안으로 들어서자 소란스럽던 세상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금까지 귀가 아프게 울리던 경보음도, 사람들의 외침도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건 오직 차헌의 숨소리뿐이었다.

당장 도망쳐도 모자랄,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연우는 차헌의 은색 머리카락을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비틀비틀 다가온 차헌이 연우에게 손을 뻗었다. 연우 역시 손을 뻗자 두 사람의 손가락이 얽혔다. 깍지 쥔 손을 바라보니, 두근거리던 심장박동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차헌은 느리게 숨을 고르다 연우를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연우가 진정하라는 듯 가볍게 차헌의 등을 쓸어주자, 차헌은 체중을 실으며 연우를 껴안았다. 갑갑했지만, 그렇다고 싫지는 않았다.

차헌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던 연우가 비틀거리다 방어막에 등을 기댔다. 뒤통수가 닿을 때까지만 해도 말랑하던 방어막은, 어깨가 닿을 때쯤에는 탄탄해져 있었다. 그대로 천천히 주저앉자, 연우의 목에 이마를 비비고 있던 차헌도 천천히 주저앉았다.

얌전한 모습에 연우가 조심스럽게 차헌을 받쳤다. 가이딩을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 별다른 폭주 증상이 보이지 않았다. 연우가 괜찮다는 뜻으로 가이드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방어막이 얇아지며 가이딩이 쏟아져 내렸다.

어찌나 농도가 짙은지 끈적한 늪에 잠기는 기분이었다. 연우는 메스꺼움에 인상을 쓰다 말고, 품으로 파고드는 차헌의 머리카락을 확인했다. 센터의 가이드들이 달려든 덕분인지 은색으로 반짝거리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검은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연우는 차헌의 폭주가 끝난 걸 확인하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별일 없어서 다행이다. 연우는 차헌의 등을 도닥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내 등을 민 건 어떤 자식이지? 자칫했다간 차헌의 폭주에 휘말려 연우도 폭주할 뻔했다. 폭주한 연우가 차헌과 함께 이동했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센터만 피해를 보는 게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었다.

가능성이 있는 건…. 아마도….

정은영과 조희서를 지켜보던 연우는 제 위에 축 늘어진 차헌을 밀어냈다. 차헌은 연우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 거리를 벌린 연우는 눈꺼풀을 벌려 눈동자의 색을 확인했다.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하늘색으로 빛나던 눈은 원래의 색인 검은색에 가까워져 있었다.

차헌의 폭주가 끝났다는 걸 확인한 연우가 수신호를 보내자 방어막이 점점 말랑해지기 시작했다. 차헌의 무게를 버텨주던 방어막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연우의 뒤통수가 땅바닥에 콩, 내려앉았다. 통증에 머리를 문지르고 있자 몸 위로 그림자가 졌다. 점검을 위해 다가온 가이드들이었다.

“폭주는 끝난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 가이딩 실로 이동할게요.”

차헌은 가이드가 접촉하는데도 달려들지 않고, 귀찮다는 듯 손을 피하고 있었다. 가이드 대신 제게 들러붙은 차헌의 등을 쓸어주던 연우가 몸을 일으키려다 실패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최동원이 눈에 띄었다. 연우는 꿈쩍도 하지 않는 차헌 때문에 최동원에게 도와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최동원이 연우를 무 뽑아내듯 팔을 잡아당겨 봤지만, 시도는 시도로 그칠 뿐이었다. 연우의 허리에 감겨있는 손이 도통 연우를 놓아주지 않았다.

연우는 발바닥이 바닥에 닿을 수 있도록 바르작거렸다. 몇 번이나 시도를 해봤지만 실패로 돌아왔다. 결국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가 말을 걸었다.

“같이 가셔야겠네요. 공간 이동하실 수 있겠어요? 그럼 좌표 알려드릴게요.”

연우는 혹시 몰라 고개를 저었다. 가이드는 폭주 영향일 수도 있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보조계 에스퍼에게 손짓했다. 보조계 에스퍼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가이딩 하겠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가이드들이 차헌에게 가이딩을 쏟아부었다. 침대로 옮기는 김에 이것 좀 떼어줬으면 좋겠는데. 침대로 옮겨졌어도 차헌은 여전히 연우의 허리에 팔을 단단히 감은 채 놓아주지를 않고 있었다. 연우는 제 위에 엎어진 차헌의 머리카락을 쓸어보다 가이드에게 물었다.

“상태가 어떤가요?”

바삐 움직이던 가이드가 차헌의 이마를 짚었다. 손을 피해 웅크리는 차헌을 보며 가이드가 옅게 웃었다.

“폭주가 끝난 건 확실하고, 지금은 잠이 드신 것 같습니다.”

가이드의 말에 안심한 연우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연우는 차헌의 등을 도닥여주며 천장을 올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센터에 머문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의지할 사람이 나밖에 없냐. 연우는 폭주에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을 찾던 차헌의 모습을 떠올리다, 저도 모르게 품 안 가득 차헌을 끌어안았다.

“강차헌 에스퍼!”

쾅,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연우는 화들짝 놀라며 차헌을 밀어냈다. 센터장은 말리는 가이드를 밀어내며 차헌을 찾았다. 뒤이어 센터장이 아래에 깔린 연우에게 직행하려고 하자 부센터장이 그를 붙잡으며, 들어오는 이상원을 향해 손짓했다. 센터장은 이상원을 노려보다 크게 심호흡하며 대기석을 가리켰다.

“그래, 일단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차근차근 말해보게.”

센터장의 말에 이상원은 방긋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이상원은 설명 대신 팀 가이드를 제 무릎에 앉힌 뒤 가이딩을 받기 시작했다. 센터장이 이게 지금 무슨 짓이냐며 호통을 터트렸지만, 이상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말씀드렸잖아요.”

이상원은 부센터장의 재촉에도 만족할 때까지 가이딩을 받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강차헌 에스퍼가 계속해서 단독 행동을 했다고 강조한 이상원이 들으란 듯 한숨을 크게 쉬었다.

“잘못을 가리시려면 제가 아닌 최유림 에스퍼를 추궁하셔야 할 거예요. 제가 인도하겠다고 했지만, 최유림 에스퍼가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며 강차헌 에스퍼를 데려갔거든요.”

의심스러우시면 확인해보던가. 덧붙인 이상원은 길게 하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가서 좀 쉬어야겠네요.”

강차헌의 폭주와 이상원을 연계짓지 못한 센터장은 빠져나가는 이상원을 붙잡지 못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센터장은 이를 악물고 있다가 정신계 에스퍼에게 눈짓했다. 정신계가 눈을 감자 허공에 영상이 떠올랐다.

광장에 도착한 차헌의 폭주하는 장면과 경고음에 달려오는 각성자들을 보여주던 영상이 작게 일렁였다. 뒤이어 방어막을 통과한 연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누가 민 거지? 연우는 자신이 서 있던 장소를 살피다, 차헌이 저를 끌어안는 장면을 보더니 입술을 말아 물었다.

“설명해줄 수 있겠나?”

뭘? 연우가 대답 없이 눈만 깜박이자 화면은 차헌이 연우를 껴안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그... 한연우 에스퍼는 에스퍼가 맞지요?”

부센터장의 말에 그렇다고 답했으나, 센터장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지만…. 한연우 에스퍼가 강차헌 에스퍼의 폭주를 가라앉힌 건 확실한데….”

무슨 소리야. 연우는 파고드는 차헌의 손을 떼어내며 화면을 가리켰다.

“제가 폭주를 가라앉힌 게 아닙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현장에서 수많은 가이드가 가이딩을 방사하고 있었는데, 제가 무슨….”

“현장에 있던 가이드 대부분이 강차헌 에스퍼가 자신의 가이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더군.”

차헌과 연우의 손이 닿는 순간, 차헌의 머리카락 색이 변하는 걸 보여준 센터장은 탐욕스러운 눈으로 연우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센터장은 지금 자신이 폭주하는 차헌을 진정시켰다고 말하는 거지…? 폭주를 일으키는 에스퍼를 진정시킬 수 있는 건 가이드뿐이니까, 내가 에스퍼가 맞는지 의심하는 거고? 연우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12살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에스퍼로 살아왔다. 이능 불안정자도 아니고 가이드라니. 연우는 손에 잡히는 대로 이능을 사용하며 상태를 확인했다. 이능이 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연우가 그대로 공간을 접어 차헌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이래도 내가 가이드냐는 연우의 표정에도 센터장의 눈빛은 여전했다. 센터장은 연우를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다 손을 내밀었다.

“한연우 에스퍼에게 추궁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네. 당황스러운 마음은 알겠으니, 일단 검사를 받아서 체질을 확인해보는 게 어떤가?”

“무슨 검사요?”

연우의 물음에 센터장이 말없이 부센터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센터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연우를 바라봤다.

“그냥 기본적인 검사예요. 시간도 오래 안 걸리고,”

“어떤 기본적인 검사인가요?”

“음… 그게….”

“자연의 마나를 느낄 수 있는지 그러니까, 마나 친화력에 대한 검사일 겁니다.”

머뭇거리는 부센터장 대신 옆에 서 있던 가이드가 설명했다. 마나 친화력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연우는 눈을 꾹 감았다. 그 어떤 에스퍼도 마나 친화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검사해보자는 건 연우가 가이딩 능력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닌지 추궁하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각성자가 한 가지의 능력만 사용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연우에게 센터장이 다가오며 재차 손을 내밀었다.

“검사가 싫으면, 내게 가이딩을 해보겠나? 감각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마나를 사용해도 상관없네.”

그걸로 가이드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면 팀원들이 먼저 알아차렸겠지. 연우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불손한 태도에도 센터장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어쩐지 싸고돌더라니….”

중얼거린 센터장은 불쑥 다가와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붙잡힌 손등에서 느끼지는 마나에 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센터장이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는 순간, 발아래에서 얼음이 솟아올랐다.

“그 손 놔.”

차헌은 얼음 기둥으로 경계를 만들며 연우를 끌어안았다. 연우와 맞닿는 순간 포근한 감각이 몸을 감싸며 만족감이 차올랐다. 멸망한 세상에 홀로 남아있는 것 같은 외로운 감정이 솟구쳤으나, 부정적인 감각들을 밀어내는 따듯한 충만감에 나른한 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차헌은 팔에 힘을 주고 연우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맞닿은 곳곳에서 느껴지는 연우의 마나가 자신과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처럼 느껴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끈을 독점하고 싶었다.

차헌은 기분 나쁜 심장 박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숨을 고르다, 연우의 손을 붙잡고 있는 센터장을 노려보았다. 심장의 박동과 함께 마나가 혈관을 타고 퍼져나갔다. 통제할 수 없는 감각이 온몸을 뒤덮기 직전, 연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차헌.”

몸을 뒤튼 연우가 차헌의 볼을 감싸 쥐었다. 연우의 갈색 눈동자가 바삐 움직이며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연우의 모습에 배부른 미소를 지은 차헌이 손을 뻗어 센터장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내 가이드한테 손 떼,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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