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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64화 (64/143)

64화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네.”

연우는 제 손을 꼭 잡고 걷는 차헌을 올려보았다. 안 괜찮아 보인다. 가이드 구역으로 가는 차헌의 얼굴에는 짜증만 가득했다. 자신과 차헌이 실과 바늘도 아니고, 가는 곳마다 같이 갈 필요는 없었다.

“그냥 쉬는 게 어때?”

“형은 저랑 있기 싫어요?”

“같이 있기 싫은 건 너 아니야?”

“...네?”

연우는 뾰족하게 솟은 눈꼬리를 숨기지 않고 차헌을 올려봤다. 상황이 정리되니까 관심 어쩌고 하던 차헌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연우가 손에 힘을 풀고 걸어가자, 차헌은 혹시라도 놓칠까 손에 힘을 주어 후다닥 따라붙었다.

“내가 왜 형이랑,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게 궁금해? 안 궁금할 줄 알았는데.”

인상을 쓰고 따라붙던 차헌이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입을 벌렸다. 연우는 아니…만 연발하는 차헌을 보며 방긋 웃었다.

“넌 나한테 관심 없잖아.”

“제가 왜!”

“조용히 해.”

눈을 흘긴 연우는 차헌의 검은 머리카락을 살폈다. 분주히 제 눈치를 살피는 차헌을 보고 있자 속이 시원했다. 다시는 그런 말을 안 하겠지. 저를 보라며 재촉하는 차헌을 외면한 연우는 시선을 옮긴 뒤, 앞서 걷는 센터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센터장과 단둘이 동행하는 것보다, 차헌이 곁에 있어 주는 게 마음이 편하기는 했다. 그래도 조금 쉬는 게,

“괜찮다고 했어요.”

손을 고쳐 쥐는 차헌의 말에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폭주한 사람이 괜찮다는데 자신이 뭐라고 하겠는가. 연우는 하얗게 질린 차헌의 손등을 보며 센터장이 무슨 수작을 부리든 일찍 끝내고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잠시만 기다리게.”

센터장이 두 사람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명하더니 문 안으로 들어갔다. 연우는 문이 닫히고도 센터장의 기운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차헌을 붙잡았다.

“아까 무슨 소리야?”

“뭐가요?”

연우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차헌의 표정에 이마를 짚었다. 주변을 살핀 연우는 차헌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내가 왜 네 가이드야?”

“지금 말고 나중에요.”

차헌은 단둘이 있을 때 얘기하자며 연우의 손등을 토닥이고는, 뒤를 향해 턱짓했다. 돌아보자 차트를 쥔 직원이 연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오셨네요. 하루만 더 늦었어도 조희서 가이드가 저를 말려 죽였을 거예요.”

차트를 넘기던 에스퍼가 연우를 안내한 곳은 이능 검사실이었다. 직원은 캡슐을 열어준 다음 아이템을 제거해달라며 팔찌를 가리켰다.

“이건 아이템이,”

“혹시 모를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서니까 모든 장신구는 제거하시고 들어가 주세요.”

야. 들었어? 연우가 입속으로 중얼거리자 팔찌가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드래곤은 지능이 높은 마수니까 보석뱀의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겠지.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자 팔찌가 툭, 떨어졌다. 연우는 누가 봐도 완벽한 체인 팔찌인 드래곤을 내려놓고 캡슐로 들어갔다. 눅진한 마나에 반쯤 기댄 연우는 기계음에 따라 이능을 사용했다. 그리고 당황했다.

왜… 안 튀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제멋대로 튀던 이능이 매끄럽게 사용되고 있었다. 연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캡슐에서 빠져나오자 결과를 확인하던 직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혹시 각인하셨어요?”

“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연우의 대답에 직원은 결과표를 보며 눈썹을 긁었다.

“여기 그래프 차이 보이세요? 보통 각인한 에스퍼들이 가이딩을 받았을 때 이런 양상을 보이거든요.”

접촉한 가이드는 조희서뿐이었다. 조희서는 눈만 마주쳤다 하면 경멸 어린 표정으로 연우를 쳐다보다, 혹시라도 가이딩을 요구할까 봐 두 손을 숨기며 도망쳤다. 그런 조희서가 연우와 각인?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긴… 각인하셨으면 조희서 가이드가 검사해보라며 닦달하지 않으셨겠죠.”

한숨을 쉰 직원이 다시 한번 테스트해보자며 캡슐을 손짓했을 때였다.

“한연우 에스퍼. 내가 대기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검사장으로 들어온 센터장이 도끼눈을 뜨며 결과지를 낚아챘다.

“분명 테스트를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말에 직원이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하려 했으나, 센터장은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휘둘렀다. 제멋대로 검사를 하냐며 호통친 센터장이 결과를 삭제하라 명하자, 직원은 억울한 얼굴로 기계를 조작했다.

“뭔가 오류가 있었나 보군.”

결과지를 보지도 않고 구겨버린 센터장이 밖을 향해 손짓했다. 연우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려봤다. 미래를 바꾼 대가가 이능이 아니었나? 연우가 밖으로 빠져나오니까 차헌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움켜잡았다.

“잠시만, 나 팔찌 좀.”

“제가 해줄게요.”

차헌은 팔찌를 채워주자마자 연우에게 달라붙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만 오면 기분 더러워요.”

“언제 와봤는데?”

차헌은 가이딩실로 들어가다 말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대답이 없는 차헌을 올려보던 연우는 알아서 수긍했다. 센터장이 차헌을 잡아두려 별짓을 다 했을 테니 가이딩실에도 와 봤겠지.

“한연우 에스퍼. 이쪽으로.”

연우는 센터장의 부름에 검사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멍청한 표정으로 구슬을 내려봤다. 설명에 따라 주먹보다 조금 큰 은색 구슬 위로 손을 올려놓자 센터장이 눈을 반짝거렸다. 정말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았다.

“신호음이 울리면 검사실 안에 자연에서 발생한 마나가 떠오를 거예요. 그걸 정화해서 이쪽에 담으면 됩니다.”

보다 못한 가이드가 검사실로 들어와 설명해줬지만, 당연하게도 조금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일단 해보지.”

검사실에 홀로 남은 연우는 기계음에 따라 멍하니 손을 움직였다. 마지막까지 아무런 기분도 느끼지 못한 연우가 검사실을 빠져나왔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차헌이 손을 내밀었다. 연우는 그 손을 붙잡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센터장을 보며 작게 물었다.

“진심으로 내가 가이드라고 생각해?”

차헌은 연우의 손을 꾹 잡았다 놓으며, 확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요, 대답한 차헌이 입을 삐죽였다.

“제가 바본 줄 알아요? 내 가이드도 못 알아보게?”

센터장의 심각한 표정을 본 연우가 차헌을 보며 방긋 웃었다. 너 바보 맞는 것 같아.

“어…. 마나 친화력이 아예 없는 수준인데요?”

결과지를 든 직원의 말에 연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한 에스퍼를 가이드 검사실로 밀어 넣은 센터장이나, 가이드라고 우기는 차헌이나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이드란 무엇인가. 자연에서 발생하는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검사실 안에는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마나가 방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우는 그 마나를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왜? 연우가 에스퍼이기 때문에!

연우는 저를 보고 자신의 가이드라며 바득바득 우기는 차헌의 볼을 잡아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보는 사람이 많아 손등을 꼬집는 것으로 만족한 연우가 센터장의 부름에 다음 검사실로 들어갔다.

“이건 뭐 하는 거예요?”

차헌의 물음에 대답한 건 설명을 위해 동행한 가이드였다.

“매칭 테스트하는 거예요. 두 분 각각 양쪽에 구슬에 손을 올려두시고, 네, 그대로 손을 마주 잡으실까요? 좋아요. 한연우 에스, 가이, 에? 어… 아무튼 이쪽 분은 구슬에서 넘어오는 마나를 받아서 정화한 다음 에스퍼에게 넘겨주면 됩니다. 강차헌 에스퍼는 가이딩을 받은 만큼 이쪽 구슬로 그대로 넘기시면 됩니다. 그대로 계세요.”

“그렇대.”

연우는 또다시 멍청해진 기분을 느끼며 구슬을 내려보았다. 마나가 방사된다는 기계음이 들렸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센터장이 하라는 대로 안 해주면 나중에 꼬투리를 잡을까 봐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있긴 했지만, 뭐 하는 짓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멀쩡한 에스퍼 잡고 뭐 하는 짓이야?

검사를 끝낸 연우는 차헌과 분리된 방으로 들어간 뒤 드래곤을 찾았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냐는 말에 드래곤이 발랄한 목소리로 답했다.

[계약하면 알려줄게.]

이 나쁜. 체인 팔찌를 비튼 연우는 해탈한 표정으로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이번에도 직원이 왜 검사를 했냐는 표정으로 매칭률이 매우 낮습니다. 하며 들어오겠지.

“형!”

문이 열리기도 전에 어깨를 밀어 넣은 차헌이 연우에게 달려왔다. 차헌은 달리던 자세 그대로 양팔을 벌리며 연우를 끌어안았다. 반사적으로 팔을 벌린 연우는 차헌의 등을 쓸어주며 무슨 일이냐 물었다.

“93%.”

“뭐?”

“형이랑 저랑 매칭률이요.”

차헌이 환하게 웃으며 연우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차헌을 밀어낸 연우가 다급히 검사실을 빠져나오자, 센터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나만 지금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건가? 아니, 일단 저게 말이 되는 수치야? 각인한 가이드와 에스퍼도 저 정도는 안 나오겠는데?

“한연우 에스퍼, 아니, 이제 한연우 가이드라고 불러야 하나?”

센터장의 호칭에 연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차헌은 악수하자는 센터장의 손을 쳐낸 뒤 넋을 잃은 연우를 이끌었다. 연우는 차헌이 이끄는 대로 부지런히 따라가다 발걸음을 멈췄다. 멈춰 선 곳은 A 구역에서 공동 구역으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제 숙소요.”

“왜?”

“형이 가이드라고 밝혀졌는데, 센터가 형을 가만히 놔둘 것 같아요?”

“어…. 아니?”

연우의 대답에 포탈을 연 차헌이 안쪽으로 손짓했다. 차헌의 뒤를 따라 들어간 연우가 널찍한 현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차헌은 연우가 신발을 벗는 동안 기다리다, 신발을 벗자마자 손을 붙잡았다. 연우가 기다란 복도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차헌은 손을 움직여 제 방 앞에 얼음벽을 세웠다. 차헌이 보기에는 적당히 생활감이 묻어나오는 방이었지만, 남들보다 깔끔한 연우가 보기에는 아닐 수도 있었다.

“저기가 제 방이고, 형이 지낼 방은 형이 보고 골라요.”

“그건 나중에 결정하고, 일단 얘기 좀 하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차헌은 소파를 가리키며 앉아있으라 권했지만, 연우는 마음 편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부엌으로 향하는 차헌의 뒤를 따른 연우가 답을 채근했다. 차헌은 그런 연우를 붙잡아 소파에 앉혀놓은 뒤 주전부리를 들고 와 연우의 옆에 앉았다.

“뭐가 궁금해요?”

“먼저 던전에 들어간 것부터. 라운드 길드장이랑 던전에서 만나기로 한 거야?”

차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우의 손에 오렌지 주스를 쥐여주었다.

라운드 길드장은 정신계 에스퍼를 통해 차헌에게 접근했고, 차헌이 센터와 계약할 의지가 없다는 걸 알고 탈출을 도왔다. 괜히 쳐들어가서 차헌을 빼 왔다 간, 온갖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으니 던전의 게이트를 이용하기로 했다. 라운드 길드장이 센터가 공략할 던전과 연결된 게이트를 발견했고, 그 게이트를 통해 센터에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어디를 가든 이상원이 징글맞게 따라다녔고, 계획이 들통날까 봐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빠져나갈 타이밍을 노리던 때 주먹만 한 마수들이 나타났다.

“그때부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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