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센터의 토벌대원이자, A급 공격계 에스퍼인 도지원은 대립하는 두 팀을 쳐다봤다. 마수가 사방에서 튀어 오르고 있는데도 공격대와 토벌대는 손을 놓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몰려든 마수들이 훈련복을 물고 늘어져도 공격할 수가 없었다.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공격대원이 크게 다칠 뻔했기 때문이다.
공격대는 낯선 마나에 토벌대를 공격했고, 토벌대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를 대비해 대련 훈련을 해왔지만, 그때마다 차헌을 괴롭히느라 훈련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던 신입 에스퍼들이 크게 다쳤다. 공격대 대장 최유림은 치료 포션의 여유분을 확인한 다음 이상원에게 요청했다.
“먼저 가시죠.”
토벌대와 공격대가 함께 움직이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최유림의 요청에 이상원이 동떨어져 있는 강차헌을 향해 눈짓했다. 이상원의 시선에 도지원을 포함한 토벌대원들은 짜증 섞인 신음을 흘렸다. 강차헌은 잠시 한눈을 팔면 어디로 쑥 사라졌다가 이상원의 손에 이끌려 나타났다. 저러다 강차헌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온갖 질책이 쏟아질 게 뻔했다. 조심하지 않은 건 강차헌인데도 말이다.
“강차헌 에스퍼는 공격대로 참여했으니,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훈련한 시간이 기니까 우리가 데려갈게요.”
최유림과 이상원의 대립이 이어지자, 통통거리며 경계만 하던 마수들이 각성자에게 달려들었다. 도지원은 훈련복을 질겅거리던 마수를 단검으로 떼어냈다. 물기가 있어야 공격할 수 있는 마수라 수중계 에스퍼가 나서야 했겠지만, 혹시라도 누가 다칠까 봐 이능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저도 같이 지켜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나선 배재영이 강차헌을 붙잡았다. 배재영은 손을 뿌리치는 차헌을 보다가 입 모양으로만 속삭였다. 그 말에 차헌이 오만상을 찌푸리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차헌의 옆에 선 배재영이 이상원을 설득했다. 같이 훈련해본 적도 있고, 같은 빙결계 능력자라 다칠 위험도 적다는 말에 최유림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무슨 일이 일어나면 최유림 에스퍼가 책임지는 걸로.”
배재영은 이상원의 허락에 자신의 팀원들과 함께 강차헌을 둘러쌌다. 이상원은 강차헌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공간계 에스퍼에게 손을 까딱였다. 공간계의 발아래로 넓은 문양이 그려지자, 도지원이 문양 위로 올라섰다.
도지원은 익숙한 멀미가 사라지자마자 단검을 휘둘렀다. 달려드는 마수의 목에 단검을 꽂아 넣은 도지원이 전기를 흘려 넣으며 뒤로 물러섰다. 매캐한 탄내와 함께 쓰러진 마수의 배를 가르자 마석이 드러났다. 심장에서 마석을 떼어내니까 그제야 던전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났다.
도지원은 자신의 할당량을 끝내자마자 뒤로 물러났다. 귓불이 화끈거리는 것이 화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 잘난 거 충분히 알겠으니, 주변 사람도 생각하면서 이능을 쓰면 안 되나. 이상원은 검붉은색으로 빛나는 무기를 쥐고 사방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나마 호수형 던전이라서 다행이었다. 호숫가로 물러난 도지원은 화려한 동작으로 칼을 휘두르는 이상원을 바라보았다.
이상원은 이능을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 덕분에 팀원들은 저항 아이템을 써도 화상을 입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도지원이 물집이 잡힌 부위를 씻어내고 치료 포션을 바르는 동안, 이상원은 도망가는 마지막 마수를 해치웠다.
“뭐가 불편하세요?”
팀 가이드의 질문에 이상원이 손목을 매만졌다. 이상원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팔찌를 내려보다 아무 일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아니기는. 강차헌이 직접 찾아와 팔찌를 주고 간 다음부터 이상원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누가 사용한 걸 싫어하는 결벽증이 아이템에도 도진 모양이었다. 도지원이 동료와 눈짓을 주고받으며 입술을 쭉 눌리던 순간이었다.
“방금….”
“선승지!”
이상원의 외침에 달려온 공간계가 이능을 사용하자, 눈앞에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사시사철 푸르른 호수형 던전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도지원은 손을 들어 코끝을 스치는 눈바람에서 얼굴을 보호하며 주변을 살펴봤다.
“저거 강차헌 에스퍼 아니에요?”
동료의 물음에 도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몰아치는 눈바람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은 누가 봐도 강차헌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상원은 방어막을 쌓는 최유림을 붙잡고 물었다. 이상원의 눈썹은 곤란하다는 듯 잔뜩 찌푸려 있었지만, 입술은 그렇지 못했다. 신남을 숨기지 못한 입술은 하늘을 찌를 것처럼 위로 솟아있었다. 가이드의 만류에 손으로 입가를 가린 이상원이, 들으란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맡겨달라 하시기에 부탁드렸는데…,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이상원의 말에 최유림은 입술을 짓씹었다. 멀쩡하던 에스퍼가 왜 폭주 증상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일단 제가 한 말이 있으니 강차헌을 책임져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제가 올 때까지 붙잡고 계세요.”
혀를 찬 이상원은 토벌대를 데리고 보스를 향해 달려갔다. 도지원은 이상원이 칼로 도려낸 곳에 전기를 꽂아 넣으면서, 방어막을 세우고 있는 동료에게 말했다.
“축하합니다. 막내 벗어나겠네요.”
이상원이 강차헌을 영입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니, 강차헌은 이른 시일 안에 토벌대에 들어올 것이다. 공격대 대장 최유림도 강차헌을 욕심내고 있었지만, 그녀의 감시 아래 강차헌이 폭주했고 하필 이상원이 목격했으니 그 욕심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토벌대의 공격으로 날개를 잃은 마수는 결국 이상원의 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일단 센터로 가죠.”
강차헌 앞에선 이상원이 게이트를 활성화하자, 최유림은 착잡한 얼굴로 허공에 주먹을 쥐었다. 보이지 않은 손에 움켜쥔 강차헌은 최유림과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폭주하기 시작했다.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줄까 달려온 보조계 에스퍼들이 강차헌을 둘러싸고 이능을 사용했다.
도지원은 게이트에서 흘러나온 던전 마나 때문에 오염된 주변을 정화했다. 그리고 게이트가 확실히 사라졌는지 확인한 다음에야 센터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센터에 도착한 도지원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눈을 끔벅였다.
“방금 한연우 에스퍼가 강차헌 에스퍼 진정시킨 겁니까?”
“그럴 리가요…?”
동료는 아니라고 대답하면서도 한연우의 품에 파고드는 강차헌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갑자기 그 사람이 자기랑 같이 다니자고 하길래, 싫다고 했거든요. 아, 근데 그 인간이 저보고 형한테 다 말한다고 하잖아요!”
차헌은 배재영이 얼마나 비협조적이었는지, 얼마나 에스퍼답지 못했는지 연우에게 다 말해버릴 거라며 협!박!했다고 불평을 쏟아냈다. 아직 분이 안 풀린 차헌이 씩씩거리면서 초코칩 쿠키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보기만 해도 입이 달아지는 기분에 연우는 조금씩 베어먹던 아몬드 쿠키를 내려놓았다.
“토벌대랑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진 다음에 움직이자 그래서 대충 각자 쉬고 있었거든요. 그 틈에 라운드 길드장이랑 만나려고 했는데….”
차헌은 말끝을 흐리며 눈썹을 긁었다. 했는데? 연우의 채근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차헌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뒤로는 기억이 안 나요.”
차헌은 손을 내려보다 이능을 사용했다. 제 뜻대로 피어오르는 얼음꽃을 보던 차헌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뭘 하려고 했던 건 기억이 나는데, 눈 감았다 뜨니까 형이 있던데요.”
얼음꽃을 불러들인 차헌이 은근슬쩍 몸을 붙여왔다. 연우가 거부하는 기색이 없자, 차헌은 연우의 손가락을 벌리며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한껏 벌어진 손가락 사이가 뻐근했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맞닿은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파동에 연우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대로 잠이 들 뻔한 연우는 눈을 부릅뜨며 잠을 쫓아냈다. 연우가 차헌의 말을 곱씹어보다 차헌의 훈련복 위를 더듬었다.
“형? 아니, 형? 저, 아직, 형?”
“벗어봐. 혹시 던전 들어가기 전에 접촉한 사람들 기억나?”
“형, 제발. 제가 벗을게요. 아마 거의 다 접촉했을걸요. 그때 형이 찾아오기 전에 공격대 사람들이랑 마나 주고받는다고 인사하고, 토벌대도 대부분…?”
연우는 차헌이 벗어준 훈련복을 꼼꼼히 확인했다. 나머지도 벗어달라는 연우의 손짓에 차헌이 엉거주춤 제 방으로 향했다. 차헌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건네준 훈련복을 확인해도 연우가 찾는 아이템은 나오지 않았다.
“왜요?”
다시 한번 훈련복을 확인한 연우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식물형 마수 중에 옷에 달라붙어서 이능을 뒤흔드는 종이 있는데, 혹시 그게 붙었나 싶어서.”
하지만 훈련복 어디에도 마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마나 제어구를 착용했을 때의 증상인데…. 혀를 깨문 연우는 차헌을 천천히 살폈다. 차헌이 아무것도 모른다지만, 마나 제어구를 착용하는 순간의 감각을 모를 리가 없었다.
“몸은 좀 괜찮아?”
연우의 걱정에 차헌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안겨 왔다. 연우는 계속해서 몸을 붙여오는 차헌을 밀어내며 공간을 확보했다. 원래도 치근거리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안겨 온 적이 없어 조금 당황스러웠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가이딩 받아야 하는 거 아냐?”
“해줘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차헌은 또다시 연우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며 깍지를 꼈다. 가이딩을 해달라니. 정말이지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부탁이었다. 다른 부탁은 웬만해선 들어줄 수 있지만, 가이딩이라니. 물속에서 숨을 쉬어보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었다. 연우는 수중계 에스퍼도 아니었고, 가이드도 아니었다. 연우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밀어내자, 차헌은 손만 잡고 있어 달라며 몸을 붙여왔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계획은 그대로예요. 센터를 나가서 길드를 만들 거예요.”
차헌의 말을 듣고 있던 연우는 꾹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뭐? 길드를 만들 거라고?”
차헌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하면 창피할 것 같으니 만들면 알려주겠단다. 도망가려다 제 발로 돌아온 너를 센터장이 놔줄 것 같냐는 질문은 애써 삼켰다.
연우는 제 손등을 문지르는 차헌의 손가락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제일 수상한 건 센터장이었다. 차헌이 폭주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연우를 가이드라 몰고 가는 모습이 그랬다. 말도 안 되는 매칭률도 그렇고.
…설마 이 모든 게 차헌을 설득하기 위한 쇼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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