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흐억!”
연우는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누가 물을 끼얹기라도 한 듯 온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어있었다. 정신없이 제 몸을 더듬던 연우가 멀쩡한 손발을 확인하는 동안, 기어 온 드래곤이 연우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또 악몽 꾼 거야?]
연우는 통증이 느껴지는 손을 내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혀를 찬 드래곤이 조금 더 세게 손가락을 깨물었다. 덕분에 환상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연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선 곳이었다. 연우는 최소한의 가구만 배치된 방을 둘러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연우의 손을 놓은 드래곤이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연우야연우야연우야, 나 이거!]
드래곤이 장식장 쪽을 향해 고갯짓하며 연우를 재촉했다. 시선을 돌리니 그곳에는 샌드위치와 함께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확인 끝>
익숙한 필체를 확인한 연우가 감각을 넓혀 주변을 살폈다. 아래층에서 차헌의 마나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연우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이능 때문에 낯선 곳에 떨어진 줄 알았는데 차헌의 집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요즘 잠이 왜 이렇게 늘었지. 그렇다고 푹 잠든 것도 아니고. 한숨을 쉰 연우는 과일 팩을 열어 드래곤의 앞에 내려놓았다.
시간을 보니 점심은 물론 저녁도 넘긴 채 잠이 든 것 같았지만,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연우는 샌드위치를 밀어내고 물병만 들어 올렸다. 아직도 떨리는 손으로 물을 마시던 연우에게 드래곤이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 계속 악몽 꾸지 않아?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거야?]
드래곤의 질문에 물병을 만지작거리던 연우가 드래곤과 눈을 맞췄다. 순진한 눈망울을 반짝이는 게 아무것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연우가 대답하지 않자, 드래곤은 블루베리를 한입에 삼켜버리고 연우의 손가락을 휘감았다.
[뭐야, 무슨 꿈을 꿨길래?]
걱정보다는 장난기가 다분한 목소리였다. 연우는 대답 대신 드래곤의 머리를 길게 쓰다듬었다. 떨리는 손끝을 깨문 드래곤이 궁금하다며 연우에게 답을 재촉했다. 그런 드래곤을 바라보던 연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내가 죽었던 날. 연우의 대답에 히죽거리던 드래곤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드래곤은 깨물고 놀던 손가락을 내려놓고 흰 눈으로 연우를 살폈다. 드래곤의 반응에 연우는 조금 당황했다. 그러게 왜 자신을 죽이려 했냐, 인과응보라며 흥흥거릴 줄 알았던 드래곤이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연우는 드래곤의 앞에 블루베리를 내려놓았다. 차헌이 깨기 전에 얼른 먹으라며 권해봐도 드래곤은 고개만 들어 연우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신경 쓰지 마.”
연우는 쌍방과실이라며 드래곤을 달랬다. 머리를 문질러줘도 드래곤은 평소처럼 더 만져달라 요구하지 않고 기운 없이 제 손바닥만 내려보고 있었다.
[나는…. 네가 그날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할 줄은 몰랐어.]
어색한 분위기에 연우가 눈을 굴렸다. 드래곤은 어떻게 달래줘야 하지? 고민하던 연우의 손끝에 몽우리가 만져졌다. 뭐지? 힘주어 문지르자 드래곤이 몸서리를 치며 도망갔다.
[아파!]
“너… 너 뿔났어.”
연우의 말에 드래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드래곤은 기다려보라며 꼬리 끝으로 제 머리를 매만졌다. 신중하게 뿔을 찾는 드래곤을 들어 올려 거울로 향했다. 거울 앞에 바짝 다가간 드래곤이 몸을 기울였다.
[연우야!]
드래곤은 연우를 향해 빠르게 기어 오더니 폴짝 뛰어올랐다. 연우의 손가락 사이를 정신없이 기어 다니던 드래곤이 팔을 타고 어깨에 올라탔다. 최대한 몸을 쭉 내밀고 연우의 눈에 머리를 들이민 드래곤이 뿔이 보이냐고 물었다. 뿔보다는 혹에 가까운 형태였지만, 연우는 기쁜 목소리로 뿔이 보인다고 답했다.
[드디어!]
연우는 흐뭇한 얼굴로 온 방을 쏘다니는 드래곤을 지켜보다가 아래층의 기척을 살폈다. 차헌의 마나가 갑자기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일어난 건가? 점점 가까워지는 마나에 드래곤을 낚아챈 연우가 주변의 흔적을 정리했다.
“잠시만.”
연우는 팔찌로 변하려는 드래곤을 붙잡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뿔이 났으니 던전으로 돌아갈 거야?”
그렇다고 대답하면…. 드래곤을 보던 연우의 눈이 잘게 떨렸다. 드래곤이 던전에 들어가는 순간, 지금과는 다른 속도로 성장할 것이다. 곧 팔다리도 생겨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겠지. 그렇게 4년 뒤, 장성한 드래곤을 토벌하기 위해 연합팀이 꾸려질 것이다.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돼?”
연우의 물음에 드래곤이 눈을 깜박였다.
“네가 던전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또 서로를 노리게 될 거야. 나는 그때처럼 죽고 싶지 않아.”
이왕 죽는 거 곱게 죽고 싶어서 그래. 염원을 담아 부탁하자 드래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연우 네가 죽는다고 생각해?]
* * *
“형?”
똑똑, 문을 두드린 차헌은 얼음창을 만들었다. 연우 말고는 아무도 초대한 적도, 들인 적도 없는데 문 너머로 낯선 기척이 맴돌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던 차헌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발을 집어넣고 이능을 사용함과 동시에 차헌의 발아래에서 얼음꽃이 피어났다. 사방으로 피어난 얼음꽃이 방안을 수색하고 돌아오자 차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분명 기척이 둘이었는데, 지금은 하나로 줄어있었다. 마나 억제 장치 때문인가? 손바닥을 멍하니 내려보고 있었는데 연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들어와.”
연우의 허락에 다시 한번 얼음꽃을 피워 내려 했던 차헌이 문을 열었다. 방으로 들어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침대에 홀로 앉아있는 연우만 있을 뿐, 다른 기척은 감지되지 않았다.
“괜찮아요?”
단숨에 거리를 좁힌 차헌이 연우의 상태를 확인했다.
“저번에도 물어봤던 것 같은데, 대체 무슨 훈련을 하면 사람이 말을 하다 말고 잠을 자요?”
잠버릇이 없는 연우였지만, 어제는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잠이 들어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곤한 숨소리를 듣지 못했더라면, 사람이 쓰러졌다며 119를 불렀을 것이다.
“요즘 잠을 좀 못 자서.”
“요즘이 아니잖아요. 형 볼 때마다 잠만 자는 것 같은데.”
몇 시간을 내리 잤지만, 연우의 안색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차헌은 저도 모르게 연우에게 몸을 붙이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식사가 올 때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 좀 더 재울까. 차헌이 체중을 실어 연우를 눕힌 다음 이불을 정리했다. 연우를 재우고 바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정신 사나운 자신의 방과 달리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 있어서 그런가…. 이상하게 졸음이 밀려왔다.
“좀 자.”
눈가를 가려준 연우가 차헌의 등을 도닥이자, 밀어낼 수 없는 잠이 몰려들었다. 침대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잠이 들었던 차헌이 눈을 번쩍 떴다.
“아, 미안. 깼어?”
핸드폰을 숨긴 연우가 다시 차헌의 눈가를 가려줬다. 솜털 같은 연우의 손바닥을 쳐다보고 있던 차헌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형 전화번호 뭐예요?”
“응?”
“우리 지금까지 번호 교환도 안 했어요.”
왜 번호를 교환할 생각도 못 했지? 지금이 봉화 띄워서 연락하는 시대도 아니고, 작은 기계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연락할 수 있는데? 연우 없이 보내야 했던 일주일이 떠오르자 갑자기 억울해진 차헌이 연우를 독촉했다.
“잠시만. 나 동생한테 연락만 하고.”
새벽인데도 전화를 거는 연우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언젠가 자신에게도 이렇게 전화를 걸어줄까? 자다 깬 연우의 목소리를 상상해보던 차헌이 이불을 끌어안았다. 부재중 신호음이 들려도 몇 번 더 걸어보던 연우가 품속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그건 뭐예요?”
“음…. 동생이 있는 곳이랑 연결된 아이템?”
연우의 마나가 일렁이자, 조그만 펜던트가 손에 쏙 들어오는 크리스털 벨로 변했다. 벨을 쥐고 불규칙적으로 흔들던 연우가 불현듯 차헌을 쳐다봤다.
“너 모스부호는 알아?”
“아뇨?”
“수신호는?”
“모르죠.”
당당한 대답에 연우가 눈을 굴렸다. 알아도 모른 척할 생각이었던 차헌은 얌전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음에 가르쳐줄게.”
역시. 씩, 웃은 차헌이 연우의 손을 찾아 깍지를 꼈다. 불편한 듯 손을 꼼지락거리던 연우가 손바닥을 붙여오자 차헌의 마나 코어가 날뛰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퍼져 나가는 마나를 그러모은 차헌이 연우가 건네는 핸드폰을 받았다.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한 뒤 전화를 걸자, 아래층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뭐라고 저장하지? 차헌이 행복한 고민을 하는 동안 연우는 핸드폰 화면 위로 거침없이 손을 움직였다.
[ 강차헌 ]
세 글자를 보니 입술이 절로 삐죽 튀어나왔다. 언젠가 저 세글자에서 강도 떼버리고, 차도 떼버리고, 헌만 남겨놓겠다고 다짐한 차헌이 몸을 일으켰다.
“배 안 고파요?”
“별로…?”
몇 알 먹지도 않은 과일과 손도 대지 않는 샌드위치를 보던 차헌이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배가 너무 고파서 감각이 마비된 모양이었다. 점심도 안 먹고 잠들었다가 새벽에 일어난 사람이 배가 안 고플 리가 없었다. 냉장고에 김밥 재료는 없지만, 간단한 요깃거리는 있었다. 차헌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오던 연우가 벽에 붙어 반짝거리는 경고등을 가리켰다.
“저건 뭐야?”
“빨간 건 라운드, 초록색이 무영, 파란색이 백두, 회색이 센터에요. 또 폭주할 것 같으면 누르래요. 지켜보고 있겠다고.”
혀를 찬 차헌이 연우를 부엌으로 이끌었다. 형은 뜨거운 거 못 먹으니까 라면 빼고, 냉동 음식 빼고, 자다 일어나서 매운 건 부담스러울 테니 이것도 빼고, 저것도 빼고. 이것저것 제외하다 보니 남은 건 시리얼과 식빵뿐이었다. 둘을 식탁에 올려놓은 차헌이 냉장고를 열며 우유와 잼을 꺼냈다.
“딸기잼이랑 블루베리잼 있는데 뭐 먹을래요?”
그 순간 연우가 귀를 틀어막았다. 깜짝 놀란 차헌이 다가가자 연우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저은 뒤 빵을 집어 들었다. 대여섯 장은 먹이고 싶었지만, 연우는 한 장이면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그마저도 다 먹지 않을 것 같아 조용히 지켜보니, 아니나 다를까 두 입만 먹고 내려놓은 연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입만 더 먹어요. 먹고 구경시켜줄게요.”
차헌의 재촉에 연우는 마지못해 식빵을 베어 물었다. 연우가 꼭꼭 씹는 동안, 차헌은 달아오른 귓가를 문질렀다. 이대로 같이 지낼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식빵을 꿀꺽 삼킨 연우가 일어나더니 홀린 듯 TV 앞으로 다가갔다.
“봐도 돼?”
“그냥 물어보지 말고 형 마음대로 봐요.”
연우는 리모컨을 어색하게 매만지다 버튼을 눌렀다.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는 연우를 보던 차헌이 선반에서 게임기를 꺼냈다. TV에 연결하자 연우의 볼에 화색이 돌았다.
“한 판만 하고 잘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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