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형. 아.”
“아?”
컨트롤러의 버튼을 누르던 연우가 입을 벌리자 입으로 뭔가 쑥 들어왔다. 뭐지? 연우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턱을 놀렸다.
“김밥이야?”
“네.”
그렇군. 연우는 김밥을 씹으며 TV 속 캐릭터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이 동굴만 나가면 다음 스테이지였다. 연우는 김밥을 씹는 것도 멈춘 채 버튼을 조작했다. 빨려 들어갈 듯 화면을 지켜보던 연우가 힘차게 버튼을 눌렀지만, 캐릭터는 아아악! 소리를 내며 추락했다.
계속 들어 지겨워진 엔딩 음악에 연우의 눈썹이 쳐졌다. 거의 다 왔는데…. 왜 추락한 거지? 조금 더 앞에서 눌러야 하나? 연우는 전략을 새로운 전략을 짜며 새로 시작하기를 눌렀다. 이 스테이지만 넘어가면 그만해야지. 딱 한 판만 더하고,
“인제 그만.”
텅 빈 손을 내려보던 연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차헌이 컨트롤러의 선을 정리하고 있었다. 연우의 눈꼬리가 뾰족해졌지만, 차헌은 멈추지 않고 게임기까지 분리해버렸다.
“밥 먹고 해요.”
“아까 식빵 먹었잖아.”
“아까는 무슨. 지금 여덟 시에요.”
뭐? 눈이 동그래진 연우가 시계를 쳐다봤다. 거짓말일 줄 알았는데 진짜 여덟 시였다. 아까 분명 세 시였는데? 연우의 반응에 차헌은 그럴 줄 알았다며 웃음을 흘렸다. 연우는 얼른 일어나라며 재촉한 차헌이 부엌으로 사라지자, 멍하니 몸을 움직였다. 분명 한 판만 하고 자려고 했는데…? 연우는 입을 살짝 벌린 채 TV 속 캐릭터를 바라봤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조금만 더 하면 안 되나? 몸을 기울이니 등 뒤로 소파가 느껴졌다. 뭔가 이상했다. 아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좀 더 아늑하고, 포근한….
“뭐해요?”
소파를 더듬던 연우는 차헌의 손에 붙잡혀 일어났다. 반쯤 포박된 채 식탁으로 끌려가던 연우가 고개를 틀어 차헌을 올려봤다. 소파가 아니라 너였구나.
새벽, 드래곤이 저도 빵에 블루베리잼을 발라달라며 울부짖고 있었지만, 연우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게임기를 붙잡았다. 연우가 옆에 앉자 차헌이 조작법을 알려주었다. 어떻게 하는지 알겠다고 대답하며 연우가 컨트롤러를 움직였다. 연우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화면 속 캐릭터가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차헌은 아, 음, 어, 하며 연우의 신경을 건드렸다. 보다 못한 차헌이 연우의 손을 덮고 컨트롤러를 조작했다. 폴짝 뛰어 성공적으로 금화를 획득한 캐릭터를 보며 연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차헌이 타이밍을 알려주겠다며 바짝 붙었다.
차헌의 도움으로 스테이지를 넘어간 연우가 기쁨을 표하자, 차헌은 같이 해보자며 팔을 벌렸고 연우는 망설임 없이 차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 뒤로 게임에 빠져 몰랐는데, 차헌이 내내 받쳐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연우가 미안함을 담아 김밥을 건넸는데, 차헌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다 먹어요.”
연우는 제 성의가 그대로 돌아오는 모습에 혀를 깨물었다. 다음부터는 먹는 거로 고맙다는 티를 내면 안 되겠다. 다짐한 연우는 김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턱도 아프고 배도 불러서 그만 먹고 싶었지만, 차헌은 점점 말라간다며 제 몫까지 밀어줬다. 괜찮다고, 너 먹으라며 거절해도 차헌은 더 시키면 된다며 계속 음식을 권했다. 자연스레 식당과 연결된 식탁에서는 음식이 화수분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 좀 이따 센터에서 가이드를 보낼 거래요. 폭주 이상? 경과? 그런 거 확인해야 한다고. 그냥 형이 해주면 안 되는 거예요?”
“난 못하는 거야.”
연우는 힘겹게 불고기 부리또를 씹다가 차헌을 쳐다봤다.
“왜요?”
“센터로 가는 게 아니라 여기로 온다고?”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여기 있으라던데요.”
다 먹은 그릇을 밀어낸 차헌이 집안 곳곳을 가리켰다. 무영 길드장이 마련해줬다는 숙소에는 폭주를 막기 위한 장치가 여기저기 설치되어있었다. 폭주를 진정시키지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대처할 시간 정도는 벌어주는 장치라고 했다. 연우는 주먹보다 큰 마석이 박힌 장치를 보며 찬찬히 집안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무영 길드장이 구해다 준 집이면, 무영 길드에게 선물 받은 연화의 아공간도 이런 곳일까?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만 생각했는데 이런 곳이면 연화가 종일 아공간에 머무는 게 이해가 됐다.
얼마 남지 않은 부리또를 입에 밀어 넣은 연우는 핸드폰을 찾았다. 차헌이 일주일 동안 갇혀있었다고 하니, 연우도 그 정도는 갇혀있을 것 같아 연화에게 말이라도 전하고 싶었는데…. 며칠 전부터 연화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걱정할 텐데. 연우는 한숨과 함께 하염없이 씹고 있던 부리또를 삼켰다.
“그만. 진짜 많이 먹었어.”
차헌이 건네는 와플을 거절한 연우는 아이스크림만 받아 들다가 불쑥 물었다.
“가이드는 누가 오신대?”
“몰라요.”
차헌은 귀찮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차헌은 신경 쓰지 말라며 와플에 아이스크림을 올려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입을 벌려 와플을 받아먹은 연우가 차헌을 위아래로 훑었다.
“왜요?”
훈련 중에 이루어지는 간단한 가이딩이 아닌, 본격적인 가이딩은 무방비 상태인 에스퍼를 보호하기 위해 센터 내의 가이딩실에서 진행되었다. 그 외에는 정말 긴급한 상황이거나, 서로 각인한 사이일 때뿐이었다. 어딘가 불쾌해진 연우가 식탁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씻으려고.”
차헌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지만, 연우는 어제부터 내내 훈련복을 입고 있었다. 씻지 못해 청결하지 않은 상태니, 저도 모르게 불쾌해진 것 같았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오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잠시만, 연우야. 내 빵은? 연우야, 나 빵!]
“형, 잠시만요.”
드래곤의 칭얼거림과 차헌의 만류에도 연우는 거침없이 방으로 향했다. 2층의 제일 안쪽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드래곤이 울부짖었다.
[게임 한 판만 하고 준다고 했으면서! 밤새 기다렸는데! 나도 블루베리잼!]
아예 본체를 드러내고 펄떡거리는 드래곤에게 과일을 물려준 연우는 옷장을 살펴봤으나,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줄 알고 짐을 챙겨놓으라고 했었나? 갈아입을 옷은 없었지만, 샤워는 꼭 하고 싶었다. 화장실이 어디지? 문으로 향하던 연우가 갑자기 드래곤을 낚아챘다.
“형.”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차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다 안 먹고 일어났냐고, 먹을 걸 들고 온 건 아니겠지. 더부룩한 배를 쓸어내리던 연우가 문을 여니 차헌이 옷가지를 건넸다.
“2층엔 화장실 없어서 1층에서 씻어야 해요. 그리고 형 방 옮겨요. 이 방 좀 이상해요.”
험악하게 중얼거린 차헌은 얼음꽃을 피워 방 안 곳곳을 수색했다. 반사적으로 손목을 숨긴 연우가 밖으로 나가자 차헌이 1층 방을 가리켰다.
“어제는 혹시 몰라서 제일 먼 방으로 골랐는데, 아무렇지 않은 걸 보면 이제 다 끝났나 봐요.”
안심하고 방을 고르라던 차헌은 은근슬쩍 다가와 제 옆방을 눈짓했다. 연우는 방을 고르는 대신 옷을 들어 올렸다. 아무리 봐도 차헌의 사이즈가 아니었다. 이런 옷이 차헌의 집에 왜 있는 거지?
“누구 옷이야?”
“형 옷이요. 오늘 아침에 식사 주문하면서 같이 주문했는데….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차헌의 말에 하늘 높이 솟아있던 연우의 눈꼬리가 사그라들었다. 내 옷이구나. 옷을 챙긴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옷이었어.
“아니. 괜찮아. 어디서 씻으면 돼?”
차헌이 알려주는 대로 화장실에 들어간 연우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멋대로 오해한 게 민망해졌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에스퍼들이 가이딩에 끌려 가이드와 사고를 치는 걸 너무 많이 봐온 나머지 착각해버렸다. 가이딩에 불쾌함을 느끼는 차헌인데 그렇게 쉽게 각인할 리는 없지.
[쁘학학학핰.]
수건 위로 떨어진 드래곤은 꼬리를 어쩔 줄 몰라 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연우는 온몸을 비틀며 웃는 드래곤을 낚아채 입을 벌리게 했다. 그대로 꼬리를 밀어 넣으려는 순간 웃음을 멈춘 드래곤이 바둥거렸다.
[안 웃을게. 안 웃을게. 나도 씻고 싶어서 그래.]
세면대로 기어 올라간 드래곤이 수도꼭지를 가리켰다. 잠시 드래곤을 노려보던 연우가 물을 틀어주자, 드래곤은 유유히 물 위를 떠다니며 수영하기 시작했다. 그런 드래곤을 바라보던 연우는 묻고 싶은 말을 삼켰다. 생각하기도 싫은 가설을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 * *
씻고 나가자 소파에 앉아있던 차헌이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자연스럽게 연우의 머리를 말려주던 차헌은 점심에 뭘 먹을지 물었다. 방금 숟가락 놨는데? 차헌이 기겁하는 연우를 달래며 점심 메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때, 초인종이 울렸다.
“없는 척할까요?”
연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며 거절했다. 몇 번 더 칭얼거려보던 차헌은 오만상을 쓰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해요.”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한 차헌이 귀찮은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뒤이어 현관에서 뻗어 나온 손이 차헌의 손을 붙잡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확인이 끝났으면 얼른 떠나라며 차헌이 손을 거칠게 털어냈다. 퇴출령에도 가이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연우를 찾았다.
“한연우 에스퍼는요?”
피곤함에 찌든 목소리에 연우가 벌떡 일어났다.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급히 현관으로 가자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도민영이 서 있었다.
“도민영 가이드.”
“안녕하세요, 한연우 에스퍼. 한연우 에스퍼도 따로 검사하셔야 합니다. 폭주하는 에스퍼 곁에 있다 보면 영향을 받을 수도 있어서요.”
손을 내민 도민영이 연우를 붙잡았다. 맞닿은 손으로 파고든 마나가 연우의 마나 코어로 직행했다.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함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제 손을 내려다보던 도민영이 묘한 표정으로 연우와 차헌을 번갈아 봤다.
“단둘이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단칼에 거절한 차헌은 이제 나가라며 손짓했다. 그런 차헌을 말린 연우가 도민영의 부탁에 응했다. 그럼 저도 같이 듣겠다며 꽥꽥거리는 차헌을 몰아낸 연우는 곧바로 도민영의 핸드폰에 떠오른 글씨를 읽었다.
<혹시 각인하셨나요?>
제발. 아니요. 연우가 격하게 고개를 흔들자 도민영이 눈썹 사이를 문질렀다.
<마나 코어가 가이딩을 거부하고 있어요. 각인한 에스퍼에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도민영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며 길길 뛰는 연우의 반응을 살펴보며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각인하신 게 아니시면>
눈치를 보던 도민영이 핸드폰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민영은 글자가 새로이 적힌 화면을 연우 쪽으로 내밀었다. 화면을 확인한 연우가 침음을 삼켰다.
<가이드끼리 가이딩을 할 때도 이런 반응이 보입니다.>
가이드. 라는 단어에 연우는 눈을 꾹 감았다. 왜 죄다 저에게 가이드라고…. 이마를 짚은 연우는 손목을 내려보았다.
자? 묻자 아-아니. 하는 잠이 듬뿍 묻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능력은 그대로야? 묻는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못 알려주는 거야? 이번에도 역시 대답이 없었다. 과거로 돌아오면서 능력이 변한 건지, 미래를 바꾼 대가가 이능의 변화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연우의 마나 코어가 가이드의 양상을 보인다는 거다.
그럼 앞으로 가이드로 살아가야 하는 건가…? 연우는 복잡한 표정으로 손을 내려보다가 핸드폰 키패드를 두드렸다.
<혹시 가이딩은 어떻게 하는 건가요?>
<본능적인 감각이라 설명하기가 조금 어려운데, 저는 호수의 물을 떠서 나눠주는 상상을 합니다.>
도민영의 설명을 읽은 연우는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알아두는 게 좋겠지. 눈을 감은 연우는 찰랑거리는 호수에 손을 집어넣는 상상을 했다. 그대로 떠올리려던 순간이었다.
[연우야!]
드래곤의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투둑, 하고 무언가 땅으로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자 입 안 가득 비릿한 향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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