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이게 뭐지?
손바닥을 내려보던 연우는 달려오는 차헌을 막아섰다. 연우의 볼을 스치며 날아간 얼음 조각이 현관문에 박히는 것과 동시에 얼음벽이 솟아올라 도민영을 포위했다.
“저 새끼가 뭐 했어요?”
연우는 차헌이 사납게 묻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틀어막은 연우가 다시 한번 피를 왈칵 토하자, 얼음벽이 조금씩 두꺼워지며 도민영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야. 이상원이야, 정영환이야?”
연우를 끌어안은 차헌이 도민영을 가두고 있는 얼음벽을 걷어찼다. 충격에 사색이 된 도민영이 도리질을 쳤다. 그 모습에 차헌이 턱을 까딱거리자 얼음벽에서 돋아난 얼음 덩굴이 도민영의 목을 휘감기 시작했다.
“차헌아, 잠깐만.”
“형은 좀 조용히 해요.”
차헌은 피로 물든 연우의 입술을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연우를 뒤로 밀어낸 차헌이 손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얼음벽이 깨지며 도민영이 현관문에 처박혔다. 그 위로 콱콱 떨어진 얼음기둥은 감옥처럼 도민영을 가뒀다.
“넌 기다려.”
씹어뱉은 차헌은 뒤로 돌아 연우의 볼을 감싸 쥐었다. 상태를 확인한 차헌은 연우의 무릎 아래에 손을 넣고 그대로 안아 올렸다. 빠르게 자신의 방으로 달려간 차헌이 보관해둔 포션을 꺼내 연우의 입가에 기울였다. 연우가 포션을 마시는 동안 차헌은 수건에 물을 적셔와 연우의 손과 입가를 닦았다.
“또 괜찮다고 할 거면 그냥 입 다물고 있어요.”
차헌은 연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막았다. 차헌은 피로 물든 자신의 손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가는 이미 발갛게 달아오른 지 오래였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차헌은 그대로 연우를 껴안았다.
볼을 맞대고 연우의 체온을 확인한 차헌은 손을 올려 연우의 심장박동을 느꼈다. 눈앞의 연우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도, 불안함이 여전히 심장을 조여오고 있었다. 차헌은 습한 눈으로 연우를 내려봤다. 형을 다치지 않게 보호할 방법이 없을까?
이곳은 훈련장과 달리 차헌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다.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냥 이대로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나랑만 영원히….
“강차헌!”
볼의 통증에 흠칫 놀란 차헌이 눈을 깜빡였다. 차헌의 양 볼을 꼬집은 연우는 발로 차헌을 밀어냈다. 연우가 멍하니 몸을 일으키는 차헌의 손목을 잡아 치워버렸다. 그러더니 몸을 굴려 차헌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또 폭주하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괜찮다고 대답한 차헌은 가이드를 내놓으라며 발광하는 마나 코어를 진정시켰다.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있자 얼음에 갇힌 도민영이 바르작거리는 게 느껴졌다. 어떤 새끼지. 차헌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형이랑 똑같이 피범벅을 만들어 보내면 그것들이 그만할 건지 궁금해졌다.
일단, 형이 보지 못하게….
차헌은 얼음기둥을 두껍게 만들어 주변의 시야를 차단했다. 그 위에 얼음덩이를 올려둔 차헌은 연우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연우는 시선도 주지 않고 문으로 걸어갔다. 순순히 안겨 올 거라는 기대는 안 했지만, 저렇게 대놓고 무시할 줄은 몰랐는데.
혀를 찬 차헌은 연우를 들어 올려 침대에 내려놓았다.
“앉아서 좀 쉬어요. 방금 피 토한 사람이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요.”
“아니 진짜 괜찮아.”
연우의 말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가상 던전에서도 괜찮다고 했었지. 저러다 차헌이 어영부영 각인을 시도해도 괜찮다고 하면서 넘어갈 것 같았다. 연우와의 각인은 원하기는 했지만, 그런 식으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형도 나를 원했으면 좋겠는데. 마른침을 삼키는 차헌을 붙잡은 연우가 바깥을 손짓했다.
“그러니까 도민영 가이드는 풀어줘.”
그 말에 차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누가 각성자 아니랄까 봐 귀도 좋았다. 풀어줄 기세가 없자 연우는 팔을 뻗어 차헌의 볼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대로 밀려오는 가이딩에 차헌의 눈이 나른하게 감겼다. 온몸을 휘감는 가이딩에 차헌의 욕심이 터져 나왔다. 차헌은 연우의 팔이 제 목을 감도록 만들고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차헌의 콧날이 연우의 목덜미를 짓눌렀다. 늘어난 접촉에 더욱 많은 양의 가이딩이 몸을 타고 넘어왔다.
“인제 그만. 그만.”
옷을 잡아끌어 차헌을 뜯어낸 연우는 홍조가 짙게 오른 차헌의 볼을 두드렸다.
“정신 차리고. 이거 배우다가 실수한 거야. 나가서 사과 좀 하게 놔줄래?”
연우의 입술을 내려보던 차헌이 연우의 발에 힘없이 밀려났다. 연우는 곧장 침대에서 빠져나와 얼어붙은 문고리를 쥐면서 차헌을 돌아봤다.
“손잡아주면 열어줄게요.”
그 말을 대놓고 비웃은 연우가 이능을 사용해 방을 빠져나갔다.
* * *
밖으로 나선 연우는 휴지를 쥐고 이능을 사용했다. 허공에서 하늘거리는 휴지를 보며 연우는 이렇게 하는 게 맞아? 물으며 팔찌를 내려봤다.
[그렇게 마나를 구분하는 거야. 알겠어? 아까처럼 아무 마나나 퍼 주지 말고!]
드래곤의 목소리에 연우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인간과 너는 마나를 얻는 방식이 다르잖아. 자연에서 무한으로 마나를 얻는 저 인간은 마나 코어가 비어도 괜찮겠지만, 너는 아니야. 어느 정도 남겨놨어야지. 말했잖아. 그 모든 일이 나랑 계약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니까? 그냥 나한테 물어봐! 저 인간보다 내가 더 마나 친화력이 높아!]
연우는 언제나처럼 땍땍거리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도민영에게 다가갔다. 하긴, 드래곤보다 마나 친화력이 높은 존재는 없겠지.
“괜찮으세요?”
고개를 끄덕인 도민영이 손을 뻗어 연우의 손등을 건드렸다. 흘러들어오는 가이딩이 거북했지만, 연우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한연우 에스퍼는 괜찮으십니까?”
물어본 도민영은 연우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아까 그건….”
올려보는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연우가 보셨어요? 묻자 도민영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은 연우는 다시 한번 물을 퍼 올리는 상상을 했다. 아까처럼 무식하게 푹 퍼내는 게 아니라 자그만 티스푼에 조금씩 떠올리는 상상을 했다. 뒤이어 마나 코어가 아니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조심히 눈을 뜬 연우는 손끝을 내려봤다.
지금까지 써왔던 마나와 결이 다른 마나가 손끝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 탄식 비슷한 웃음이 나왔다. 이게 되네. 차헌이 문어 빨판처럼 달라붙기 전에 마나를 흩트려버린 연우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도민영을 바라봤다.
“죄송하지만 비밀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연우의 부탁에 도민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흔쾌한 대답에 눈이 동그래진 건 연우였다. 비밀로 해주겠다고 약속한 도민영은 주변을 둘러보다 작게 속삭였다.
“대신 한연화 에스퍼한테 제 매칭 에스퍼가 언제 나타나는지… 물어봐 주시면 안 될까요? 구체적인 대답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제 다크서클을 가리킨 도민영이 우는 얼굴을 하며 부탁했다. 이렇게 갈려 나가느니 매칭 에스퍼와 일하는 게 낫겠다며 도민영이 한탄했다. 그리고 절대 말하지 않겠다며 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연우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입술만 끌어올렸다.
그 모습에 도민영은 활짝 웃었다. 확답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한연화의 오빠에게 빚을 지워두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도민영이 일어나자 미소를 지운 연우가 고개를 숙였다.
“아까는 죄송해요. 다른 일 때문에 강차헌 에스퍼가 오해한 모양입니다.”
“제가 먼저 잘못했는데요, 뭐. 그 정도는 각오하고 왔어요. 그리고 에스퍼들이 다 그렇죠. 가이딩에 눈이 멀면 아무것도 못 보잖아요.”
공감하죠? 눈빛을 보내던 도민영이 아차 한 얼굴로 입가를 가렸다. 눈앞에 있는 사람도 에스퍼라는 걸 잠시 잊은 모양이었다. 괜찮다고 웃어 보인 연우는 신발 한 번 벗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서는 도민영을 배웅했다.
“잠시만요.”
다가온 차헌이 새끼손가락만 한 포션 병을 내밀었다. 도민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받아 들었다.
“치료 포션이에요. 이번엔 조절해서 동상으로 끝났지만, 다음에는 아닐 거예요.”
차헌의 경고에 사색이 된 도민영이 서둘러 현관을 벗어나자, 연우의 어깨에 체온이 닿았다.
“센터장이 보낸 사람이에요. 방금도 저한테 각인 시도 하려,”
“뭐?”
깜짝 놀란 연우가 차헌의 손바닥을 펼쳤다. 차헌은 각인 흔적을 찾는 연우의 손을 잡아끌며 깍지를 낀 채로 소파로 향했다.
“시도만 했어요. 어제도 형이 진정시켜준 거 아니었으면 저 인간이 각인 시도 했을걸요.”
깍지 낀 손을 배에 올려둔 차헌이 미끄러지듯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래서 형한테 무슨 짓 한 줄 알았는데….”
말끝을 흐린 차헌은 스르르 쓰러져 연우 쪽으로 몸을 눕혔다.
묵직한 무게에 한숨부터 나왔다. 제 덩치가 얼마나 큰지 눈으로 보여줘야 자중할 건가. 거울을 찾던 연우는 무릎에 슬쩍 머리를 기대는 차헌을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차헌이 연우의 손을 끌어와 조물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사람이 두 가지의 이능을 가질 수 있는 거예요? 형 원래 이능은 어때요?”
“멀쩡한 것 같긴 한데….”
한숨처럼 대답한 연우는 손을 내려봤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팔찌를 내려보던 연우는 시선을 옮겨 테이블 가득 쌓인 서류를 쳐다봤다. 연우의 시선이 닿은 곳을 쳐다보던 차헌이 서류를 집어 건넸다.
“봐도 돼요.”
익숙하다 싶었더니 라운드 길드의 임시 계약서였다. 밑에 놓인 것은 무영 길드에서 보내온 계약서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평생 갈망하는 계약서를 연화는 이면지로 쓰고 있었고, 차헌은 방치하고 있었다. 순수한 호기심으로 연화의 연봉과 차헌의 연봉을 비교해보던 연우가 바닥에 깔린 계약서를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로터스? 로터스 길드가 왜 차헌에게 계약을 제안하지?
연우가 당황하며 계약서를 넘겨보려던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몸을 일으킨 차헌이 연우를 끌어안는 것과 동시에 쾅! 하고 벽이 울렸다. 강한 진동에 비틀거리던 연우가 차헌을 붙잡고 안전한 곳을 찾던 그때였다. 아, 아, 하는 마이크 소리가 울렸다.
[지금부터 10초 준다.]
익숙한 목소리에 연우가 벌떡 일어나 현관을 쳐다봤다.
[오빠 몸에 상처 하나라도 있으면 너 죽고 나 산다. 8초 남았다, 7, 6,]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