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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69화 (69/143)

69화

[5, 4, 3, 2, 1.]

숫자가 들어 드는 속도에는 자비가 없었다. 일. 하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벽이 울렸다. 차헌은 현관을 바라보던 자세 그대로 굳어있는 연우를 들쳐 안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비상용으로 가져다 둔 훈련복을 꺼낸 차헌이 연우의 어깨에 덮어주던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일었다.

차헌은 이맛살을 구기며 바깥을 노려봤다. 분명 실존하지 않는 아공간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쳐들어온 건지 추측할 수도 없었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버티나 본데, 30초 안에 안 나오면 내가 너 곱게는 안 죽인다.]

협박조로 을러대는 목소리가 제법 또랑또랑했다. 경고를 무시한 차헌이 거실로 나가, 경고등 아래의 버튼을 쾅쾅쾅쾅 눌렀다. 혹시 몰라 센터의 버튼도 연타하고 몸을 돌렸는데, 훈련복을 카디건처럼 걸친 연우가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형은 밖에서 미친 새끼가 지랄하는 데 나가고 싶어요?”

굳이 나갈 볼 필요도 없었다. 곧 등장할 길드장들이 알아서 처리해줄 거다. 조금만 기다리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 말리는 차헌을 올려보는 연우의 표정이 오묘했다.

“아까 말하는 거 못 들었어?”

“무슨 말이요? 곱게 안 죽인다는 거?”

“아니, 아니, 오빠.”

오빠. 라고 강조한 연우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밖에 있는 사람이 내 동생이야.”

그 말에 차헌이 슬그머니 제 입을 가렸다. 더 심한 말을 안 해서 다행이다. 미친 새끼라고 한 건 좀 그랬나…? 차헌이 눈치를 보고 있자, 연우가 눈썹을 긁적이며 핸드폰을 흔들었다.

“여기가 아공간이라는 걸 까먹고 있었네. 연락이 안 닿으니까 동생이 놀랐나 봐.”

괜찮다며 차헌을 다독인 연우가 현관문을 당겼다. 그러나 차헌이 동의하지 않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연우는 문고리를 몇 번 더 딸깍이다 차헌을 쳐다봤다.

“형 동생이 아니면요? 형 유인하려고 동생인 척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연우의 어깨를 감싼 차헌이 자연스럽게 동선을 바꾸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의심으로 가득 찬 차헌과 달리 연우는 계속해서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다. 쾅, 하는 소리에 맞춰 방으로 들어가자 연우가 차헌의 품에서 빠져나가 그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좋은 말로 할 때 나와라.]

마침 들려오는 목소리에 연우는 눈썹을 늘어트리며 웃었다. 애정이 듬뿍 담긴 미소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차헌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우가 온기가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성질머리가 두 명은 없을걸. 내 동생 맞아.”

차헌을 데리고 현관 앞으로 간 연우가 열어달라는 듯 문을 두드렸다.

“그때 말했었지? 내 동생이 좀 대단하다고. 그것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동생을 협박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 이번에도 그런 줄 알고 온 걸 거야. 문 좀 열어줘.”

“협박이요?”

날 선 목소리에 연우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납치당했다고 착각 중인 것 같아서.”

이번에도? 잠시 할 말을 잃고 있었던 차헌은 손을 뻗어 연우를 안아 올렸다.

“음? 왜? 나 걸어갈 수 있어.”

“말했잖아요. 동생이 아니면요. 형 납치하러 온 사람이면 어떡해요.”

“내가 내 동생도 못 알아볼까 봐?”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에도 차헌은 연우의 허벅지를 받친 채로 문을 열었다. 손에는 어느새 얼음으로 만든 창이 쥐어진 상태였다.

사방으로 펼쳐진 공터 한가운데, 누군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너프건을 겨누고 있었다. 차헌은 방금까지 집을 꽝꽝 울리게 만든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연우가 손을 흔들었다.

“한연화!”

차헌을 향해 너프건의 각도를 조절하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대충 그러모은 뒤 연우에게 손짓했다.

[내려와. 오빠가 동화 속 공주님이야?]

여자의 말에 연우는 차헌을 밀어내며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차헌은 달려가려는 연우를 붙잡았다. 연우가 괜찮다고 답했지만 차헌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여자를 살폈다. 여자는 허리까지 치렁치렁 늘어진 머리카락을 성의 없이 넘기며 연우에게 말을 걸었다.

“도와달라며.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도와? 아니? 전화하라고 했잖아. T E L L.”

“H E L P 라며. 깜짝 놀라서 달려왔더니….”

코앞까지 다가온 여자가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헌이 그 앞을 막아서자, 여자는 고개를 틀어 차헌을 위아래로 살폈다. 노골적으로 관찰하는 시선에 차헌이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바로 폈다. 슬그머니 뒷짐을 쥐며 몰래 얼음창을 뒤로 날려버린 차헌 역시 곁눈으로 여자를 살폈다.

연우와 똑같은 갈색 머리카락, 눈동자를 가진 여자는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연우와 똑 닮은 얼굴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연우와 달리, 여자의 입은 꾹 다물려있어 어딘가 고집스러워 보인다는 것뿐이었다.

“이게 고장이 났나?”

목걸이를 꺼낸 연우가 벨을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 손짓에 여자 또한 자신의 목걸이를 꺼내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세차게 혀를 찬 여자가 아무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이게 빠져 가지고.”

“아니,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

억울하다는 목소리와 함께 무영 길드장이 나타나 여자에게 몸을 낮췄다. 차헌을 설득하기 위해 아쉬운 소리를 할 때도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했던 게 무영 길드장이었다. 그런 사람이 여자에게는 저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번엔 반대쪽 허공이 일렁이며 라운드 길드장이 나타났다.

“엉? 연화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연우 너는?”

여자의 행색을 살핀 라운드 길드장이 제 어깨에 걸치고 있던 코트를 넘겼다. 잠옷 차림을 내려보던 여자는 코트에 팔을 집어넣으며 연우의 앞에 섰다. 그 뒤로 나타난 건 백두 길드장과 센터장이었다.

“한연화 에스퍼?”

강차헌의 부름에 달려왔는데 왜 한연화가 있지? 어리둥절할 시간도 없이, 각 길드의 대표들은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압박감에 연우가 웅크리고 있자 두 명의 손이 연우에게 달려들었다.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헌의 손을 밀어내고 연우를 부축했다.

“아, 진짜.”

짜증 섞인 목소리에 그 순간 압박감이 사라졌다. 서로를 노려보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표정으로 여자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오빠 옆에 다가오지 말라며 날파리를 쫓듯 손을 휘적거리는 여자의 손짓에 차헌도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한연화 에스퍼. 이게 무슨 일인가?”

센터장의 물음에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차헌을 가리켰다.

“저 사람한테 물어봐야지 왜 나한테 물어요? 내가 불렀나?”

“그렇군.”

뾰족한 목소리에도 센터장은 인자한 미소를 지어 차헌을 바라봤다. 센터장뿐만 아니라 호출에 불려온 길드장들 모두 차헌을 보고 있었다. 차헌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문을 가리켰다.

“갑자기 저 사람이 이걸 쏴서요.”

차헌의 불친절한 설명에 사람들의 시선이 여자와 뒤에 놓인 너프건으로 옮겨졌다.

“납치하러 온 줄 알았죠.”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라운드 길드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를 내려봤다. 그 시선에 여자는 고개를 틀어 연우를 바라봤다.

“도와달라며.”

제게 몰린 시선을 확인한 연우가 목걸이에 달린 벨을 흔들었다.

“고장 났나 봐요.”

연우가 깔끔하게 마무리를 내리니, 무영 길드장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러려고 급하게 구해달라고 하셨습니까?”

“네.”

“그냥 저한테 부탁하시지….”

코웃음으로 대답한 여자는 무영 길드장에게 연우와 자신의 목걸이를 내밀었다. 소중하게 받아든 무영 길드장이 여자에게 손을 뻗었다.

“이 정도 수리는 금방 하니까, 같이 가셨다가 받아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에이, 연화야. 한 번 고장 난 건 또 고장 나잖아. 내가 새로 하나 구해줄게.”

“그나저나, 시간이 이렇게 되었는데 식사는 하셨습니까?”

수많은 러브콜에도 여자는 관심 없다는 듯 하품하며 연우에게 손을 뻗었다.

“나 졸려.”

그 말에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눈이 번뜩였다. 연우가 그 시선에서 여자를 숨기는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지켜보는 차헌의 눈이 불퉁해졌다.

“그런데….”

차헌에게 다가온 백두 길드장이 연우와 차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호출하신 이유는 알겠는데, 왜 두 분이…?”

먼저 입을 연 건 센터장이었다. 차헌의 앞을 가로막은 센터장이 더 이상의 질문은 듣지 않겠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센터 기밀이네.”

백두 길드장이 흥미를 숨기지 않은 눈으로 연우와 차헌을 살피던 때였다.

“풋.”

하는 웃음소리가 들리자 센터장의 고개가 천천히 라운드 길드장에게 향했다.

“기밀이었구나아.”

길게 빼는 말꼬리가 조롱 조였다. 무영 길드장 역시 웃음기가 가득한 눈으로 센터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말없이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는 센터장 대신 부센터장이 안쪽을 손짓했다.

“그럼 아무 일 없던 거 맞죠, 강차헌 에스퍼? 어제 일도 있고 하니 좀 더 쉬시는 게 어떠세요.”

“그냥 들어가지 말고 나온 김에 같이 들어가서 길드 둘러보는 건 어때요? 곧 점심시간이니까 함께 밥 한 끼도 하고.”

“아직 불안정한 에스퍼야. 함부로 밖을 돌아다니는 건 위험해.”

“정영환 에스퍼. 우리 애들이 강차헌 에스퍼 한 명 감당 못 할 것 같아요?”

“글쎄요. 저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강차헌 에스퍼도, 건물도.”

웃음을 흘린 무영 길드장이 차헌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운드 길드장도, 백두 길드장도 손을 내밀고 있었다. 차헌이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누구의 손을 잡든 이 지긋지긋한 센터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세 명의 손을 내려보던 차헌은 손을 뻗어 연우의 옷을 붙잡았다.

“들어가래요.”

부센터장을 눈짓한 차헌이 손에 힘을 주고 당겼다. 연우는 끌려오면서도 온통 여자에게 신경이 쏠려있었다.

“밥은 먹었어?”

“아니, 아직.”

그 말에 연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누가 봐도 자다 일어난 몰골인데 당연히 안 먹었겠지. 그러니 세상 무너진 표정을 지을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내가 알아서 챙겨 먹을 테니까 오빠는 들어가. 무슨 일인지는 대충 봤으니까 나중에 나오면 연락하고.”

잠시 손목을 내려보던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밥 먹고 바로 눕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던 연우가 머리는 또 이게 뭐냐며 여자를 돌려세웠다. 연우의 손이 바삐 움직이며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굵게 땋았다. 끝을 정리해주기도 전에 기다리고 있던 센터장이 이제 들어가라며 문을 가리켰다.

“오빠가 당신처럼 애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죠.”

손목에 걸린 고무줄로 땋은 머리를 고정하던 여자가 서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연우의 앞에 선 여자가 턱을 치켜드는 순간, 여자는 이곳에 모인 그 누구보다 거대해 보였다.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마른침을 삼킨 차헌이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났다. 커다란 코트를 망토처럼 휘두른 여자는 말없이 센터장을 노려봤다.

“오빠를 통제하려 하지 마요, 간섭하지도 말고.”

여자의 경고는 센터장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각 대표들이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걸 쳐다본 여자가 코웃음을 흘렸다. 그 소리에 센터장과 부센터장의 어깨가 작게 튀어 올랐다. 여자는 사납게 혀를 찬 뒤 싸늘한 시선으로 차헌을 올려보았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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