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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70화 (70/143)

70화

길드장들의 수많은 요청을 뿌리친 연화가 제 아공간으로 넘어가려다 말고 배웅하는 연우를 붙잡았다. 연화는 아무것도 없는 공터로 연우를 끌고 간 다음 심기 불편한 얼굴로 강차헌을 흘끔거렸다.

"앞 좀 보고 걸어."

연우가 아까부터 코트를 짓밟고 비틀거리던 연화를 부축하며 버릇처럼 손을 붙잡았다. 두 사람의 손바닥이 마주 닿는 순간, 연화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놀란 얼굴로 연우를 올려보았다.

"이게 뭐야?"

연화의 목소리에 시선이 모여들었다. 차헌이 반사적으로 달려오자, 연우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그를 다시 돌려보냈다. 맞잡은 손을 내려보던 연우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연화에게 물었다.

"왜?"

"아니…."

말끝을 흐린 연화는 연우의 손바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에 확신이 들었다. 자신이 두 가지의 이능을 가지게 된 것은 연화도 모르는 미래였다. 이게 내 부메랑이구나. 연우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손을 놓았다.

"비밀로 해."

연화는 연우의 손목을 붙들며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연화가 당부하지 않아도 알릴 생각은 없었다. 센터장이 먼저 기밀이라고 선수를 쳤으니 당분간은 안심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백두 길드장에게는 들키고 싶진 않았다.

연우가 두 가지 이능을 다룬다는 게 알려지면 백두 길드장은 연우를 에스퍼도, 연화의 오빠도 아닌 실험체로만 볼 게 분명했다. 어떤 방식으로 두 가지 이능을 다루는지 지켜보기만 하겠다며 달려들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알겠다고 대답하자 연화는 연우의 손을 향해 눈짓했다.

"어쩌다가?"

"나도 모르겠어."

연화에게 하얀 거짓말을 한 연우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마주 닿는 순간 연화가 얼굴을 찌푸렸다. 연우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질문하자, 연화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헌처럼 연화 역시 가이딩이 느껴진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 * *

“동생이랑 사이가 많이 좋나 봐요?”

“응? 응.”

연우는 멍하니 손목을 내려보다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연우를 붙잡은 차헌은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는 듯 달싹였지만, 연우는 신발을 벗자마자 제 방으로 달려갔다. 문단속을 한 연우가 방구석에 몸을 숨기며 팔찌를 잡아당겼다.

"들켰어?"

[나는 아니.]

드래곤의 대답에 연우는 제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손바닥 실금 속에 숨기지 못한 마나가 자글자글 고여있었다.

[나는 정말 죽은 듯이 마나를 감추고 있었는데, 연우 너는 그냥 까발렸네? 비밀로 하자며!]

"네 정체를 비밀로 하자는 거였지. 내 이능을 비밀로 하자는 건 아니었어."

[내 정체는 당연히 비밀이지!]

연우는 삑삑거리는 드래곤의 입을 막기 위해 체인 팔찌 위를 쓰다듬었다.

"…나도 알릴 생각은 없었는데, 확신이 필요했어."

[무슨 확신?]

"너랑 계약할 확신."

[그래. 나랑 계약할 확…. 뭐, 뭐…? 뭐?!]

본체를 드러낸 드래곤이 폴짝 뛰어올랐다. 드래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연우의 손목과 손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러더니 입을 벌려 연우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진짜야? 확실해? 이거 걸고 말할 수 있어?!]

이런 건 어디서 배웠지. 연우는 말없이 손바닥을 포개 드래곤의 모습을 숨겼다. 이제 드래곤은 한 손으로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자라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드래곤과 계약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었다. 드래곤과 계약한 연우가 마음대로 미래를 바꾼다면 연화의 이능이 불안정해질 게 분명하니까. 예전처럼 신뢰를 잃은 연화가 피해를 보는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헌의 미래만 앞당기고 떠날 생각이었다.

아직 미성년자인 연화가 걱정되었지만, 연화가 라운드 길드장과 워낙 잘 지냈고 라운드 길드장 역시 연화를 살뜰하게 챙겨주고 있어 그녀에게 연화를 맡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방금 일로 마음이 바뀌었다.

연화를 바라보던 라운드 길드장의 희번덕거린 눈빛을 떠올린 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람에게 연화를 맡길 수는 없었다. 연화가 에스퍼증을 받고,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나이는 돼야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화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약 3년,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서 드래곤과의 계약이 필요했다. 미래는 너무나도 변해버렸고, 연우는 인과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야 했으니까.

연우의 결심에 드래곤은 반짝거리는 눈을 숨기지 않았다. 어서 빨리 계약하자며 꼬리를 내밀 줄 알았는데, 드래곤은 예상과 달리 얌전히 꼬리를 물고 팔찌로 변했다.

[여기서는 못해.]

싱거운 반응에 연우가 팔찌를 잡아 뜯을 듯 흔들었다. 그렇게 계약하자고 사람을 쪼아댈 때는 언제고, 갑자기 왜 이래? 어이가 없어 팔찌를 노려보자 드래곤이 삐죽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온다.]

그 말과 동시에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지금 계약하다가 본체를 들키면 차헌이가 나를 산 채로 발라먹지 않을까?]

그렇…겠지? 수긍한 연우는 작게 하품했다. 드래곤이 계약을 권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해오던 고민을 마무리 짓자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형, 자요?"

눈이 가물가물했지만, 그렇다고 다시 잠이 들 만큼 피곤한 건 아니었다. 연우는 아니라고 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자는 것 같아서 안 깨우려고 했는데….”

문 앞에 선 차헌이 연우의 볼을 감싸 쥐고 안색을 확인했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파리하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좀 괜찮아요?”

연우가 느끼기엔 몸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차헌이 보기에는 아니었나 보다. 연우는 차헌이 쥐여주는 포션을 홀짝거리며 묘하게 풀이 죽은 차헌을 올려봤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바닥을 내려보던 차헌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아까 형 동생이 그랬잖아요. 형을 통제하지 말라고….”

차헌이 손을 꾸물거리더니 몸을 기대왔다. 연우는 어리광을 부리듯 목덜미에 이마를 비비는 차헌의 등을 도닥여주며 연화의 모습을 떠올렸다.

연우에게 연화는 아직도 어린아이였다. 크레파스로 옷을 더럽히고, 연우의 손을 잡고 속상했던 일을 말하며 코를 훌쩍이는 어린아이. 연우가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주고 지켜줘야 하는 아이였는데, 언제 이렇게 큰 건지.

길드장들을 볼 때마다 연우의 뒤에 숨어서 훌쩍거렸던 게 엊그제만 같은데, 어느새 연화는 연우를 지켜줄 만큼 자라있었다. 뿌듯함과 서운함이 공존하는 감정을 느끼고 있던 사이 차헌이 체중을 실으며 연우를 불렀다.

“제가 혹시 그랬다면 죄송해요.”

아련함에 잠겨있던 연우가 반짝, 눈을 떴다. 차헌이 연우를 통제하려 했던 적이 있었나? 오히려 자신이 차헌의 미래를 앞당기겠다고 쥐고 흔들지 않았나? 사과할 이유가 없는데…? 연우가 자신에게 붙어있던 차헌을 밀어낸 다음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차헌의 눈썹은 지구 내핵까지 처져 있었다.

“저야 여기가 숙소니까 갇혀 있든 말든 상관없지만, 형은 아니잖아요. 저 때문에 괜히 휩쓸려서….”

웅얼거린 차헌이 안아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어리광이 왜 이렇게 심해졌지? 연우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팔을 벌려 차헌의 등을 도닥였다.

“말했잖아. 네 잘못이 아니라고.”

차헌이 폭주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그가 폭주했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졌을 텐데 굳이 센터 기밀이라고 시침을 떼는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의 행적만 봐도 폭주를 유도한 배후는 센터장이 분명했다. 던전에서 폭주할 만큼 불안정한 에스퍼라는 이유로 센터가 관리하겠다며 차헌을 묶어둘 심산이었겠지.

그렇다면 폭주는 어떻게 일으킨 거지? 몇 가지 가설이 떠올랐지만, 차헌이 그런 수에 당할 에스퍼는 아니었다. 보통 에스퍼들보다 마나 코어가 배는 클 텐데.

그리고 그때 내 등을 떠민 새끼는 어떤 놈이지? 잡히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를 간 연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너 밥 먹어야지.”

그 말에 차헌이 구부정하게 허리를 폈다. 같이 먹자며 식탁으로 간 차헌이 연우의 옆자리에 앉아, 솟아나는 음식을 앞으로 밀어주었다. 오늘도 역시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오는 광경이라, 연우는 계란말이만 두고 죄다 차헌 쪽으로 밀어주었다.

“형 동생 무슨 사람인지 물어봐도 돼요?”

“에스퍼 중에 내 동생이 무슨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아니다, 너만 모를걸.”

사실이었다. 각성자들에게 아예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도 한연화라는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먼 옛날, 지구의 멸망을 예언했다던 사람의 환생이라며 연화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고, 신의 말씀을 전하러 온 성녀라며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에 제일 심한 건 로터스 길드장이지만. 혀를 찬 연우는 편하게 물어보라며 차헌을 바라봤다.

“뭐 하는 사람이에요? 길드장들이 되게 저자세로 나가던데. 그, 미래를 보는 건 알고 있어요.”

“단순히 미래만 보는 게 아니니까. 연화는 모든 가능성의 미래를 보고 그 미래를 비틀 수도 있어.”

잔치 국수 위에 김치를 올리던 차헌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디까지 말해도 될까. 고민하던 연우는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만 꺼냈다.

연화가 보는 미래는 바꿀 수 없지만, 그 미래를 바꾸려고 시도한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다가 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은 계속 미래를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연화가 미래를 알려준다면? 자신에게 불만을 가진 연화가 미래를 바꾸려 개입한다면? 지금까지 일궈온 것들을 빼앗길 수도 있고, 자신의 미래를 빼앗길 수도 있었다.

브로콜리를 씹던 차헌이 대충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센터장이 눈치만 보고 있었던 거냐며 차헌이 킥킥거리다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편식하는 줄은 몰랐는데. 연우는 브로콜리가 맛이 없는지 턱만 놀리고 있는 차헌에게 계란말이를 권했다. 차헌은 말없이 계란말이만 보고 있다 초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형 동생이,”

“연화야. 한연화. 아까 정신이 없어서 서로 소개해주는 것도 깜박했네.”

“혹시 형 동생이 저한테 말… 걸라고 시킨 거예요…? 형 동생이 센터장 엄청나게 싫어하는 것 같던데요.”

차헌의 질문에 연우는 눈만 깜박였다. 수많은 사람에게 들어왔던 말인데 차헌이 물어보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딱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네가 슬라임 볼 터트린 건 생각도 안 나고?”

안 그래도 홍조가 올랐던 차헌의 볼이 터질 듯 붉어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공격계가 방어계 무기에 눈독을 들이질 않나, 에스퍼가 가이딩 도구에 기웃거리질 않나, 자기가 마나볼을 터트려 먹었으면서 연우에게 바락바락 화냈던 건 싹 잊은 모양이었다. 말을 걸 수밖에 없는 온갖 기행을 해놓고 연화가 센터장에게 복수하기 위해 연우를 보낸 거라고? 자기 혼자 의심하다 시무룩해진 차헌이 너무 웃기고 귀여웠다.

“그 모습을 봤다면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말을 걸었을걸.”

웃지 말라고 악을 쓰던 차헌이 연우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형이 유일했어요.”

차헌이 빤히 바라보자 귀 끝이 간지러웠다. 연우는 그렇냐고 대답하며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귀에서 퍼진 열기가 점점 온몸으로 퍼지는 기분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나는 그렇다 치고, 너는 그때 왜 내 이름 물어본 거야?”

“언제요?”

“그때 왜, C 구역에 견학 왔던 날.”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차헌이 숟가락을 내려 연우를 빤히 바라봤다. 입속에서 말을 고르는지 입술을 달싹이던 차헌은 한참 뒤에야 대답을 내놓았다.

“그냥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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