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준비되었니?]
“아직 신발도 안 벗었어.”
그럼 벗고 들어오라며 폴짝 뛰어내린 드래곤이 식탁을 향해 기어갔다. 신발을 벗은 연우는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집안을 둘러보았다. 고작 일주일 집을 비웠을 뿐인데 늘 안정을 주던 집이 낯설고 허전하게 느껴졌다.
차헌의 숙소에 너무 오래 머물렀나. 눈썹을 긁적인 연우에게 드래곤이 과일 좀 씻어달라며 재촉해댔다. 과일을 씻어서 내려놓자마자 드래곤이 달려들었다. 드래곤은 차헌의 눈치를 보느라 양껏 먹지 못했다며 투덜거리더니, 입을 벌리고 있는 대로 과일을 집어넣었다. 연우는 다른 과일도 씻어서 놓은 다음 식탁에 놓인 쪽지를 확인했다.
[보자마자 연락해.]
연우는 수리가 끝난 목걸이를 목에 걸고 드래곤을 불렀다. 연화는 보자마자 연락하라고 했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다 먹었어?”
연우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드래곤이 달려와 손목에 감겼다.
[드디어 계약!]
“하기 전에 확인받고 싶은 게 있어.”
그 말에 드래곤은 자신이 대답해줄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대답해주겠다며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뿔이 자란 뒤에는 어떻게 할 거야?”
[연우 너는 어떻게 할 건데? 원래는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연우 네가 같이 살자며? 마음이 바뀌었어. 너와 계약한 이후부터 네가 숨을 거둘 때까지 연우 네 곁에 있을 테니 연우 너의 계획이 곧 나의 계획이지.]
“던전으로 안 돌아가고?”
[왜? 연우도 나랑 같이 던전에 갈래? 인간이 살기에 어려운 환경이지만, 연우 네가 살고 싶다고 하면 말리지는 않아.]
드래곤이 던전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연우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음 질문을 했다.
“네가 대답해 줄 수 없다고 했던 것들, 계약한 뒤에는 알려줄 수 있어?”
[내게 제약이 걸려 있지 않은 질문이라면.]
“다음 질문. 정말 너랑 계약하면 인과율에 상관없이 미래를 바꿀 수 있어?”
[물론이지. 네 동생이 무척 뛰어난 인재라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아무리 그 아이라 할지라도 우리까지 속박하지는 못하잖아?]
이후로도 연우는 두드릴 수 있는 돌다리는 모조리 두드리며 질문했다. 드래곤과의 계약이 자신의 수명을 깎아 먹지 않는다는 것, 계약한 이후 연우의 마나 코어를 갈취하지 않겠다는 다짐, 앞으로의 계획에 동참하겠다는 약속 등등을 받아낸 연우는 한숨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꼼꼼하기도 하지.]
수많은 질문에 혀를 내두르던 드래곤은 연우가 내미는 손에 냉큼 꼬리를 올려두었다.
“이제 계약된 거야?”
[그럴 리가. 이제 내게 이름을 지어줘. 내 원래 이름은 알려줄 순 없지만, 애칭이 리리였으니 참고해줄래?]
“이름?”
연우는 입을 다물고 드래곤을 빤히 바라봤다. 진지한 연우의 시선에 무슨 이름을 지어줄까 두근거린 것도 잠시,
“그럼 용용이.”
리리와 전혀 상관없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비늘을 세운 드래곤이 연우의 손등을 깨물었다. 드래곤은 그게 뭐냐며 한참 발광하다 꼬리로 이마를 짚었다.
[용용이라니. 너보고 누가 인간인간이라고 부르면 정말 행복하겠다. 그치?]
냉소적인 드래곤의 반응에 연우는 마음에 쏙 들었던 용용이라는 이름을 버려야만 했다. 다시 한번 드래곤을 쳐다보니 황금색 눈이 노여움으로 물들어 빛나고 있었다. 햇살, 햇빛, 중얼거리며 이름을 고민하던 연우가 핸드폰을 꺼내자 드래곤이 손목을 타고 올라와 기웃거렸다.
<황금색 보석>
검색해보니까 보석의 이름이 우수수 떠올랐다. 연우와 함께 화면을 훑어보던 드래곤이 주둥이로 액정을 쿡, 찍었다.
[이게 좋아.]
“너 글자도 읽을 줄 알아?”
[당연하지? 그때도 봤잖아.]
그냥 그림책 보듯 슥슥 보는 건 줄 알았지. 대단하다며 머리를 쓸어주자 드래곤이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세상에 없어.]
“알았어. 그럼, 헬리오도르.”
[입술에 마나를 담아서 말해. 나랑 꼬리도 잡고.]
연우는 드래곤의 요구대로 꼬리를 붙잡고, 입술에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 상태에서 입을 열자 입술이 아닌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헬리오도르.]
그 순간 허공에 반쯤 떠오른 드래곤이 맞닿은 꼬리로 마나를 불어넣었다. 드래곤의 마나가 마나 코어에 닿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과 애틋함이 연우를 휘감았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코끝에 힘을 주고 있었는데 드래곤이 연우를 불렀다.
[나 헬리오도르는 이름에 긍지를 가지고 계약자 한연우의 뜻을 따를 것을 약속한다. 이 약속은 나와 그대의 심장에 새겨질 것이다.]
평소의 까불거리는 목소리가 아닌 진중한 목소리였다. 연우 역시 신중한 표정을 지은 채, 꼬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는 나를 지켜주고 보호할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해.”
[나 역시 그대의 뜻을 따르고 도울 것을 맹세하지.]
드래곤이 입을 다물자 연우의 주변으로 황금빛 마나가 몰아쳤다. 그에 반응한 연우의 마나 코어가 연둣빛 마나를 내뿜는 것과 동시에 두 개의 마나가 체인처럼 엮어 들었다. 사슬처럼 길게 늘어진 마나 고리가 연우의 몸에 스며들며 심장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끝났어! 계약의 흔적 때문에 좀 불편할 텐데 곧 있으면 적응될 거야. 너와 나를 연결해주고, 계약을 반드시 지키게 만드는 족쇄니까, 나랑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해. 물론 나도 꼭 지킬 거고.]
다시 촐랑거리는 목소리로 돌아온 드래곤이 연우의 새끼손가락을 꼬리로 휘감았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 벌렁 누웠다. 빨대로 숨을 쉬는 것처럼 숨이 턱턱 막히고 불편했다. 심장을 조이는 듯한 뻐근한 감각에 적응하려 애쓰던 중 띠링, 하고 벨 소리가 울렸다. 누운 자세 그대로 손만 움직여 전화를 받자, 일주일 동안 지겹게 듣던 목소리가 들렸다.
-형? 형 맞아요?
“응. 나 맞아.”
대답하는 목소리에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섞였다. 입을 크게 벌리고 산소를 받아들이는데 차헌이 빠르게 형형형 부르며 연우를 찾았다.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누워있지. 뭘 할 시간은 주고 물어보자. 우리 방금 헤어지지 않았어?”
-헤어지기는 무슨, 형이 집으로 들어간 거죠.
이게 무슨 말이지? 이해하기 힘든 말에 연우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갸웃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 너머로 훈련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훈련장이야?”
-네. 몸 좀 풀려고 왔는데, 형도 올래요?
차헌이야 갇혀 지내느라 몸이 간질거렸겠지만, 연우는 아니었다. 일주일 내내 잠보다 게임을 우선시했던 연우의 몸은 몰려오는 졸음을 이겨내지 못했다.
-형 졸리구나. 게임 세이브 해놓을 테니까 주말에 하러 올래요?
“그럴까?”
반색하자 차헌이 웃음을 터트렸다. 훈련 도구를 고르는 건지 웃음소리 뒤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연습해.”
-형형형, 잠시만요. 내일부터 복귀하잖아요. 어떻게 할 거예요?
내일? 차헌의 질문에 생각하기 싫어 밀어두었던 문제가 떠올랐다. 원래라면 C 구역으로 복귀해야 했지만, 가이드로 발현한 이상 가이드 수업도 받아야 했다. 그렇다고 사관학교로 돌아갈 순 없으니 사정을 아는 도민영이 자신이 알려주겠다며 접촉을 해왔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함께 연습할 에스퍼가 강차헌이었으면 좋겠다고 강조를 했던 게 찝찝했다.
차헌은 상관없다고, 오히려 형이랑 연습할 수 있다면 좋다고 환영했지만 뭔가 꺼림칙했던 연우는 응답을 보류했다. 몇 번이나 각인 시도를 했다던 가이드와 차헌을 함께 두기가 뭔가 좀 그랬다.
그뿐만 아니라 차헌은 격리된 일주일 동안 가이딩이 부족한지 쉬지 않고 몸을 붙여왔었다. 그런 차헌이 노련한 가이드와 한방에 머무르다 호로록 각인 당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사태를 미리 방지하려 했지만,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차헌은 지금처럼 같이 도민영과 연습하자며 얘기를 꺼내곤 했었다.
“굳이 연습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왜 연습할 필요가 없어요…? 형 저한테 가이딩 안 해줄 거예요? 형은 제가 다른 사람한테 가이딩 받는 거 보고 싶어요?
그 모습을 상상해보던 연우는 볼만 살살 긁었다. 가이딩 거부가 심해서 그런가, 다른 사람한테 가이딩을 받는 차헌의 모습이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아니면 저 말고 다른 사람이랑 연습하게요? 와, 형 나 그 꼴은 못 봐요.
왜 사서 걱정을 하지? 두 가지 이능을 다루게 되었다는 건 비밀이니 다른 사람에게 가이딩을 해줄 일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연우는 깔깔 웃으며 굴러다니는 드래곤을 붙잡았다.
[쁘하…! 마나를 다루는 법은 알려줄 수 있지만, 그건 나도 못 가르쳐줘.]
드래곤이 할 수 없는 일은 세상에 없다며?
연우가 눈썹을 쓱 들어 올리자, 드래곤은 자신이 가이딩 받을 일이 뭐가 있냐며 삑삑거렸다. 코웃음을 친 연우는 지금까지도 격분 중인 차헌을 진정시켰다.
“나한테는 팀이 있잖아.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상황 보고 결정하려고.”
일단 C 구역에 출근해보고 결정해보겠다고 답했지만, 연우가 결정할 필요도 없이 상황은 급박하게 변하고 있었다.
“최동원 에스퍼가요?”
그날, 방어계 에스퍼 몇몇이 폭주 증상을 보였다고 했다. 차헌의 폭주를 막기 위해 센터의 모든 가이드가 투입된 덕분에 그들을 돌볼 가이드는 넘쳐났으나, 그들에게 신경을 쓰는 가이드는 아무도 없었다. 조희서도 마찬가지였다. 조희서는 자신의 가이딩이 차헌에게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할 뿐, 바로 옆에서 비틀거리는 최동원에게는 조금의 가이딩도 방사하지 않았다.
그러던 도중 드디어 가이딩이 닿았는지 차헌의 폭주가 멈췄고, 차헌이 가이딩실로 이동되고 나서야 가이드들은 지친 모습으로 쓰러진 방어계들에게 가이딩을 나눠주었다. 오직 조희서만이 사뿐사뿐 C 구역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가이드 없이 정신을 차린 최동원은 더 이상 팀을 유지하고 싶지 않다며 박서현에게 상담을 요청했고, 박서현 역시 진지하게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그럼 우리 팀은…?”
“찢어지겠죠, 뭐.”
박서현은 길게 한숨을 쉬었지만,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어차피 오래 못 갈 거 알고 있었으니까요. 어깨를 으쓱거린 박서현이 구석에 선 조희서에게 눈짓했다. 항상 당당하던 조희서의 입매가 찌그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박서현은, 훈련소장이 폭주 중인 에스퍼를 두고 자리를 떠난 조희서를 크게 혼냈다며 설명했다. 그런데도 정신을 못 차렸다며 비아냥거리던 박서현이 연우를 쳐다봤다.
“최동원 에스퍼는 조희서 가이드와 일하느니 차라리 탐색견이 되겠다고 한 상태고, 저는 뭐, 심사를 다시 받아봐야 알겠지만, 공동 구역으로 복귀할 것 같네요. 한연우 에스퍼 생각은 어때요?”
“저는….”
“아, 물어볼 필요도 없었네요. 어차피 팀 나갈 생각이었잖아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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