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형!”
고막 터지겠다. 익숙하게 코피를 닦던 연우는 차헌이 올려주는 얼음으로 콧등을 마사지했다.
“여기 수건이요.”
처음 코피를 쏟았을 때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도민영도 이제 담담하게 수건을 건네고 있는데, 옆에 앉은 차헌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연우는 괜찮다는 뜻을 담아 차헌의 허벅지를 두드린 뒤 터져 나오는 마나를 정리했다.
[쫌! 마나를 남겨두라는 내 말은 씹어 먹었니? 응?]
연우는 땍땍거리는 드래곤의 전음에 인상을 썼다. 내가 그걸 몰라? 아는데 못 하는 거잖아, 이 사기꾼아. 너랑 계약한다면 해결된다면서. 따지는 연우의 말에 드래곤이 허- 하고 한숨을 흘렸다.
[나랑 계약한 덕분에 네가 폭주를 안 하는 거야, 이 바보야. 에스퍼로서 자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능 쓸 때도 마나 다 퍼가면서 활동했니?]
드래곤의 말에 입을 꾹 다문 연우는 눈을 감고 마나 코어를 점검했다. 이건 뭐 간장 종지도 아니고. 에스퍼로서 활동할 때는 자신의 마나 코어가 작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가이딩을 하다 보니 제 마나 코어가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었다.
마나를 남겨놓기는 무슨, 마나 코어의 바닥까지 싹싹 긁어 차헌에게 넘겨줘도 바닷물에 소금을 푼 것처럼 티도 안 났다. 드넓은 드럼통을 숟가락으로 한 술, 한 술 채우는 기분이라 어쩔 수 없이 무리하게 되었다.
[연우 너는 빨리 가겠다고 40층에서 뛰어내리겠다? 조절을 할 줄 알아야지. 그거 배우려고 여기 있는 거잖아.]
내가 왜 뛰어내려? 이능 사용하면 되는데.
[와, 오, 와. 내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잖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으니까 이제 조용히 해. 눈을 뜬 연우는 적신 수건으로 콧등을 닦아주고 있는 차헌을 올려보았다.
“아, 됐다고 할 때까지 눈 감고 있으랬잖아요!”
알았다. 연우는 다시 얌전히 눈을 감았다. 차헌이 뜨뜻미지근한 수건으로 얼굴을 지나, 손가락 사이사이를 닦아주고 나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다시 한번 해볼게요.”
도민영의 말에 연우는 바로 손을 뻗었지만, 차헌은 연우의 손을 마주 잡는 대신 도민영을 노려봤다.
“방금이 마지막이라면서요.”
“시간이 조금 남았잖아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죠.”
그 말에 차헌은 팔짱도 끼고 다리도 끼고 꼴 수 있는 건 다 낀 상태로 도민영을 노려봤다. 훈련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차헌의 비언어적인 행동에 도민영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우를 쳐다봤다.
“강차헌 에스퍼께서는 가이딩 거부가 심하니, 다른 분과 연습을 하,”
“미친.”
팔짱을 푼 차헌이 연우를 붙잡는 것과 동시에 도민영이 방긋 웃었다.
“그럼 한 번만 더 해볼까요?”
어김없이 코피를 쏟아내자 도민영이 드디어 휴식을 권했다. 차헌이 속상한 표정으로 피를 닦아주는 동안 연우는 도민영이 건넨 포션을 조금씩 빨아 마셨다.
“실례인 건 알지만, 두 분 혹시 성적인 접촉을 하셨나요?”
도민영의 질문에 입을 떡 벌린 차헌이 연우의 귀를 틀어막았다. 그래봤자 에스퍼라서 다 들리는데. 대놓고 중얼거려도 차헌은 손바닥으로 연우의 귀를 꾹꾹 누를 뿐이었다. 머릿속에서 깍깍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를 외면한 연우가 차분한 얼굴로 도민영을 쳐다봤다.
“그런 질문을 하신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음, 불쾌하게 들리실 건 아는데… 한연우…님? 도 아시겠지만, 가이딩 효율이 그렇게 높지 않잖아요. 그런데 두 분의 매칭률이 상당히 높게 나와서 혹시… 라도 그런 접촉이 있으셨다면 미리 알아둬야 하니까요.”
“없거든요!”
소리를 지르는 차헌의 목이 터져나갈 듯 붉었다. 연우는 콧등을 마사지하던 얼음팩을 차헌에게 쥐여주고 손을 내려보았다. 드래곤의 마나 친화력 덕분에 마나 코어에는 쉴 새 없이 마나가 차오르고 있었지만, 차헌에게 넘겨줄 때는 한 번에 한 용량만 가능했다. 이 속도라면 온종일 가이딩을 해도 차헌의 마나 코어를 채우지 못할 게 분명했다.
“형이랑 저랑 매칭률이 높은 건, 우리가 인연이라서 그렇거든요.”
“푸하.”
쏘아붙이는 목소리에 연우는 마시던 포션을 뿜었다. 돌아보는 차헌의 얼굴에는 웃었어요? 라는 네 글자가 딱딱딱딱 박혀있었다.
[쁰핰핰핰핰핰.]
연우는 울리는 웃음소리에 맞춰 사레가 들린 척 마른기침했다. 차헌이 운명론자였을 줄이야. 의외라는 얼굴로 웃어주자 차헌이 발끈한 표정으로 손에 묻은 포션을 닦아주었다. 화가 나도 하나부터 열까지 시중을 들어주는 차헌 때문에 손발이 퇴화할 것 같았다. 제가 하겠다고 거절했지만, 차헌은 손이 깨끗해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놓아주었다.
“형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연우가 대답 없이 웃기만 하는 동안 둘을 관찰하던 도민영이 탁, 소리가 나게 서류철을 정리했다.
“그럼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죠. 한연우 에, 음, 님. 진정되시면 나가셔도 돼요.”
도민영이 나가는 길을 얼음길로 만들어 잽싸게 내보낸 차헌이 연우에게 몸을 기댔다. 불퉁한 얼굴은 누가 봐도 기분이 상했으니 풀어달라고 시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연우는 목걸이를 꺼내 벨을 흔들기만 했다.
“동생이요?”
“응. 연락이 안 되네.”
목걸이를 집어넣는 연우의 얼굴에는 미약한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연화가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꿈을 꾸는 이유는 아마, 어쩌면 연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계속해서 차헌의 미래를 바꾸고 있고, 그로 인해 바뀌는 미래를 확인하느라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거였다. 한숨을 쉰 연우는 자신의 무릎에 슬며시 머리를 기대는 차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형 팀원들은 어떻게 됐어요?”
순간 울컥해 차헌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연우가 사과하자 차헌은 아프지도 않다면서 손바닥에 머리를 비볐다. 빈정거리는 박서현의 말투에 화가 나긴 했지만, 솔직히 팀원들과의 훈련보다 차헌과의 훈련에 집중한 건 사실이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해보라며 저주 아닌 축복을 퍼붓고 간 박서현은 최동원과 함께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희서 역시 훈련에 참여하지 않아 연우는 동떨어진 섬처럼 떠돌며 어쩔 수 없이 훈련소장을 찾아갔었다. 연우만 동의하면 팀이 해체되는 상황이라 그런가, 훈련소장은 좀 더 생각하고 오라며 쫓아냈다.
팀원들이 출근을 안 하는데 무슨 생각을 해. 모두가 바쁜 훈련장에 멍하니 앉아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연우는 가이딩실에서 드래곤과 함께 마나를 다루는 연습을 하거나, 방문한 차헌과 함께 가이딩 연습을 하곤 했었다.
“뭐, 이대로 찢어지겠지.”
한숨처럼 대답한 연우가 문을 통과해 날아오는 종이비행기를 낚아챘다.
“또 센터장이죠?”
차헌의 확답처럼 이번에도 종이비행기를 보낸 건 센터장이었다. 센터장은 둘이 격리를 끝내고 출근을 했던 날부터 끊임없이 메모를 보내왔다.
“제가 맞춰볼까요? 강차헌 에스퍼가 무슨 생각인지 좀 물어봐 주겠나? 이거죠?”
“어, 아니?”
아니라는 대답에 벌떡 일어난 차헌이 메모를 살폈다. 센터장의 직인이 찍힌 종이에는 지금 당장 공동 구역으로 오라고 적혀있었다.
“지가 뭔데 오라 가라 해요?”
“내 상사잖아.”
선배가 오라 가라는 거랑 뭐가 다르냐는 말에 차헌은 할 말을 잃은 듯 입술만 달싹거렸다. 연우가 다녀오겠다며 일어나자 연우의 팔을 붙잡은 차헌이 왜 혼자 가냐며 옆에 따라붙었다.
“부를 거면 가까운 센터장실로 부르던가.”
“공동 구역으로 부르는 거 보니까 이번엔 나 때문일지도 몰라. 아니면 네가 팀이 없으니 공동 구역 에스퍼와 함께 팀을 짜보라고 부르는 걸 수도 있고.”
“궁금하면 나를 호출하면 되는데, 왜 매번 형을 불러요?”
그야 너는 호출에 응답을 안 하잖아. 속마음을 숨긴 연우가 방긋 웃으며 놓고 가는 물건이 없는지 가이딩실을 둘러볼 때였다.
[연우야. 나 저거 먹어보고 싶어.]
드래곤의 요구에 주변을 둘러보던 연우가 탁자 위에 놓인 비스킷과 사탕을 몇 개 챙겼다. 드래곤은 연우의 집과 훈련장이라는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자 터져 나오는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것도 궁금하고, 저것도 궁금하다며 보챈 덕분에 연우의 보조 가방 안에는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사람이 없을 때 본체로 돌아가 낮잠을 즐기고 싶다며 우기는 바람에 포근한 담요까지 들어있었다.
“왜요? 배고파요?”
“아니, 입이 좀 심심하네.”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차헌은 입을 딱 벌린 채 연우를 바라봤다.
“나 형이 먹을 거에 관련된 말을 하는 거 처음 들어봐요.”
“내가?”
“네. 그러니까 얼른 해치우고 밥 먹으러 가요. 오늘도 우리 집에 가서 먹을래요?”
“일단 상황 보고.”
확답한 것도 아닌데 차헌이 환히 웃었다. 그런 차헌의 손을 잡은 연우는 공동 구역으로 향했다. 가이드 구역을 빠져나와 C 구역의 포탈로 넘어가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엄마가 누나 보고 뭐라고 해보라니까?”
조희서였다. 복도를 돌아다니며 통화를 하고 있던 조희서는 차헌을 보며 활짝 웃었다가, 그 옆에 선 연우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연우는 그런 조희서에게 방긋 웃어주었다. 어떻게 될진 몰라도 폭주하는 에스퍼를 방치했으니 앞으로 제대로 된 팀에 합류하기는 어려울 거다. 제가 원하는 높은 등급의 에스퍼와 팀을 꾸리기는커녕, 팀도 없이 방황하는 신세가 되겠지.
연우는 차헌의 옆에 선 자신을 노려보는 조희서에게 마지막까지 웃어주며 공동 구역으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데요?”
공동 구역 로비에 도착했지만, 둘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기다려야 하나? 싶어 앉아있자 포탈이 열리며 배재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연우 에스퍼! 강차헌 에스퍼! 두 분 여긴 어쩐 일이세요?”
반가운 얼굴로 다가온 배재영의 손에는 낯익은 종이비행기가 들려있었다. 아, 이거. 연우의 시선에 배재영은 곤란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몸을 숙였다.
“저번에 제가 괜한 말을 해서 센터장님이 뭔갈 오해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잠시만요.”
연우가 차헌의 손목을 붙잡는 순간, 차헌 역시 손을 뻗어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왜요?”
왜애애애 요오오오. 배재영의 물음이 길게 늘어지는 것과 동시에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연우는 뒤틀린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끈적한 마나를 확인하자마자 이능을 사용해 도망가려 했지만, 발끝에 들러붙은 마나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었다.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연우는 몸을 웅크리며 숨을 참았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뜬 연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휘이잉, 몰아치는 바람 소리에 절로 턱이 떨려왔다. 톤 다운된 회색으로 꾸며진 공동 구역의 로비는 온데간데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휘몰아치는 눈보라만이 연우의 눈에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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