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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74화 (74/143)

74화

[어떻게 나한테 이런 짓을!]

분노로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를 무시한 연우가 드래곤을 향해 달려드는 눈송이 슬라임을 낚아챘다. 드래곤은 훌륭한 미끼였고, 눈송이 슬라임은 지능이 높은 마수가 아니었기에 동굴 입구에서 손목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사냥할 수 있었다.

연우는 끽끽, 소리를 내며 바둥거리는 눈송이 슬라임을 물웅덩이에 집어넣고 떠오르지 않게 집게로 꾹꾹 눌렀다. 얼음이 쩍,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눈송이 슬라임이 녹아내렸다. 끈적이는 슬라임의 사체를 해쳐 마석을 찾은 연우는 다시 한번 손목을 내밀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지켜준다며! 지켜준다며!]

연우는 삑삑거리는 드래곤을 쳐다보다 가볍게 팔찌를 흔들었다.

그럼 말해. 우리가 게이트에 휩쓸릴 거라는 걸 어떻게 예상했어?

[말했잖니.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팔찌라고.]

그 말에 방긋 웃은 연우는 더욱 힘차게 팔찌를 흔들었다. 드래곤은 슬라임 따위에게 자신을 내어줄 셈이냐며 온갖 난리를 피우다 결국 꼬리를 들었다. 계약자니까 말해주는 거라며 온갖 생색을 내던 드래곤이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왜 네 동생만 미래를 본다고 생각하는 거니? 나도 내 앞날을 어느 정도 예지할 수 있어. 네 동생처럼 정확한 건 아니지만 마수의 감이라는 게 있단다.]

그런 능력이 있으면서 그동안 숨겼다니. 이러면서 어떻게 자기를 믿으라는 거야?

[확실하지 않았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며 연우가 팔찌를 노려봤다. 그러다 웅덩이에서 튀어 오르는 눈송이 슬라임을 붙잡았다. 웅덩이 속을 확인하자 물이라기보다는 마수의 진액에 가까운 액체가 차올라있었다. 연우는 웅덩이를 흙으로 덮어버리고 동굴 안으로 이동했다.

차헌이 샘을 파서 넓히는 동안, 배재영은 얼음을 녹여서 샘을 채우고 있었다. 그 물을 떠서 입구로 향하려 했을 때 차헌이 연우를 막아섰다.

“이거 그냥 빼는 게 낫지 않아요?”

차헌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반지를 쳐다보다 빨갛게 달아오른 연우의 코끝과 볼, 손가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냉기 저항 아이템이 있으니 자신이 얼마나 추운 건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이제 제가 잡아 올 테니까 형은 좀 쉬어요.”

단검으로 구덩이를 파느라 더러워진 손을 탁탁 턴 차헌이 안을 가리켰다. 얼음을 녹이느라 수증기가 피어오른 동굴 안쪽은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꽁꽁 얼어있던 볼이 녹아내려 피부가 따갑고 간지러울 정도였다. 손등으로 볼을 거세게 문지르는 연우를 차헌이 말리며 물이 든 냄비를 들고 입구 쪽으로 향했다.

연우는 추위로 곱아든 손가락을 억지로 움직이다 걸어가는 차헌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눈송이 슬라임은 주변에 빙결계 이능력자가 있다면, 그 마수는 마나를 먹고 몸집을 키웠다.

이능을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 입구로 이동한 연우는 예상치 못한 광경에 입을 벌렸다. 얼음으로 만든 그물을 던진 차헌이 눈송이 슬라임을 쓸어모으고 있었다. 차헌이 이능을 사용하면 할수록 성긴 그물 속의 눈송이 슬라임들은 쑥쑥 자라 서로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물 입구를 봉한 차헌이 또 다른 그물을 만들어 허공에 던졌다. 그렇게 몇 번 더 그물을 던지자 코앞도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몰아치던 눈바람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한 시간 넘게 사냥할 때는 변화도 없더니….

맑은 하늘을 멍하니 올려보던 연우는 다급히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깊이가 생기자 연우가 동굴 안으로 이동하여 배재영이 끓여놓은 물을 부지런히 옮겼다.

“형은 쉴 생각이 없어요?”

얼음벽을 걷으며 들어온 차헌이 찰랑거리는 물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연우는 코를 훌쩍이며 차헌이 끌고 온 그물을 쳐다봤다. 연우의 예상대로 커질 대로 커진 눈송이 슬라임은 둘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라 그물 통째로 물속에 집어넣어야 했다.

“이런 생각은 어떻게 했어?”

연우가 슬라임 위로 물을 끼얹으며 차헌에게 물었다. 얼음창으로 떠오르는 그물을 꾹꾹 누르던 차헌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렇게 하면 된다고 배운 것 같아서요. 아까 저 사람이 계속 우리는 손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해서 긴가민가했는데,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거 같더라고요.”

마석을 회수한 뒤 그물을 집어넣은 차헌이 얼어붙은 연우의 손을 꾹꾹 주물렀다. 시도라도 해볼 걸 그랬다며, 그랬다면 형이 이런 고생 따위 안 해도 됐다면서 차헌이 사과를 했다. 연우는 어색한 얼굴로 입술을 말아 물었다.

두 사람이 물을 만드는 동안 할 게 없어진 연우가 스스로 슬라임을 잡으러 나선 것이었다. 그러니 차헌이 사과할 필요는 없었다.

“괜찮다는 말 할 거면 하지 마요.”

그 말에 연우는 목 끝까지 올라온 괜찮다는 말을 삼킨 뒤 동굴 안으로 이동했다. 얼음을 녹이고 있던 배재영이 연우의 설명에 밖으로 향했다. 배재영은 맑게 갠 하늘과 그물에 갇혀 끽끽거리는 눈송이 슬라임을 쳐다보며 작게 감탄했다.

“이런 방법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물과 연우가 파놓은 구덩이를 보던 배재영이 둘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차헌과 배재영이 입구 안쪽에 더욱 큰 구덩이를 팔 동안, 연우는 샘에서 솟아오른 물이 구덩이로 향하도록 물길을 만들었다. 구덩이에 물이 고이기 시작하자 차헌은 그물을 모조리 집어넣고 지겹다는 얼굴로 손을 털었다. 연우 역시 구멍을 파느라 얼얼해진 손바닥을 주무르다 엣치, 작게 재채기했다. 그 소리에 차헌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형 감기 걸린 거 아니에요?”

“날씨가 꽤 춥긴 하네요. 일단 제가 처리하고 있을 테니, 두 분은 안에서 좀 쉬세요.”

배재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헌이 포션을 꺼내 연우를 안아 들고 동굴 안쪽으로 향했다. 차헌은 한쪽 구석에서 말리고 있던 담요를 가져와 연우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연우는 담요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쉬어야 할 타이밍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발끝이 불안해 쉴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드래곤을 노린 마수가 쳐들어올 게 분명했다. 한시라도 빨리 눈송이 슬라임을 처치하고 다른 마수를 찾아 나서야 했다.

혹시나 다른 수원지가 있나 감각을 펼치려던 때, 차헌이 손을 뻗어 연우를 눕혔다. 이마를 짚는 손이 서늘했다.

“저 사람이랑 다 찾아봤으니까, 물이 녹을 때까지만이라도 자요.”

[그래, 내가 무슨 일이 있으면 깨워줄게.]

차헌은 차가운 동굴 바닥을 매만지다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연우의 발밑에 버너를 가져온 차헌이 냄비를 향해 이능을 사용하여 얼음을 녹였다. 연우는 녹인 물을 물길에 흘려보내는 차헌의 모습을 보고 있다, 몸살기를 이기지 못하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자면서도 끙끙거리던 연우가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연우의 눈에 파란 불길이 솟아오른 버너가 보였다. 깜짝 놀라 몸을 웅크리자, 멍하니 연우를 보고 있던 차헌이 다가와 연우의 볼을 감싸 쥐었다.

가상 던전의 일을 떠올리는 건가 싶어 일부러 눈을 부릅떠 말똥한 눈을 보여주었다.

“그냥 감기 기운이야. 방금 무슨 소리였어?”

연우의 질문에도 말없이 눈을 맞추고 있던 차헌이 스르르 몸을 기대왔다. 잠깐 잠이 든 줄 알았는데 오래 잤나…? 가이딩이 부족한가 싶어 연우는 마나를 끌어올려 차헌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배재영이 절망에 빠진 얼굴로 쓰러진 냄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닥에 쏟아진 물웅덩이와 냄비를 보아하니 물을 옮기던 차헌이 실수를 한 것 같았다. 애써 시선을 돌린 배재영이 연우를 향해 손짓했다.

“안 그래도 슬슬 깨우려고 했는데, 마침 잘 일어나셨어요. 몸 상태는 어때요?”

연우는 돌바닥에 혹사당한 등과 허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외면하며 일어났다. 끙끙거리는 연우를 부축한 차헌이 버너를 끄자 동굴에 어둠이 찾아왔다.

“잡은 슬라임을 다 녹였는데도 다음 마수가 안 나타나서요. 눈보라도 그쳤으니 슬슬 나가서 찾아봐야 할 것 같죠?”

배재영의 말에 연우는 감각을 넓혀 주변을 살폈다. 던전의 끝에서부터 끝까지 살펴봤는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몰라, 한 번 더 탐색하던 연우가 입을 틀어막고 기침했다. 몸이 으슬으슬한 게 확실히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담요를 목도리처럼 두른 연우가 밖으로 향했다. 눈보라가 그친 하늘을 둘러보는데 출구로 향하는 길이 보였다.

“일단 출구 쪽으로 가보죠.”

배재영이 앞서고, 그 뒤를 연우와 차헌이 순서대로 따랐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손쉽게 치워가며 걸어가던 배재영이 백설 나무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백설 나무에는 아이스 웜의 알이, 보랏빛으로 익은 사과 아래에는 서리 벌레의 알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차헌이 연우를 붙잡는 것과 동시에 뿌득, 뿌드득, 소리를 내며 알에서 깨어난 서리 벌레가 하나둘씩 눈밭에 후득, 후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미친.”

눈밭을 뒤덮는 투명한 벌레떼에 차헌이 연우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었다. 허리를 감싸 안는 힘이 좀 더 강해졌을 때, 서리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색으로 물든 일대를 바라보고 있자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스 웜이 떨어졌다. 서리 비를 피해 눈 속으로 파고든 아이스 웜은 입을 크게 벌려 눈과 함께 서리 벌레를 삼켰다. 서리 벌레의 마석을 섭취하며 성장한 아이스 웜은 계속해서 서리 벌레를 잡아먹었고, 서리 비를 피해 살아남은 서리 벌레는 무리를 지어 그런 아이스 웜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비위가 상하는 광경에 입을 막고 있자 차헌이 얼음벽을 세워 마수들을 가두었다. 그 이후 서리 비 대신 얼음덩어리가 후두둑 떨어졌다.

잠시 후, 차헌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벽을 치웠다. 마수 사체들 사이로 뭔가 삐죽, 솟아올랐다. 삐죽, 삐죽 솟아오른 아이스 웜은 연우의 키를 훌쩍 넘더니 차헌의 키를 넘어 천장에 닿을 듯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런 아이스 웜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머릿속에서 드래곤이 울부짖었다.

[연우야, 살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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