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아이스 웜에 연우가 차헌과 배재영을 붙잡고 공간을 접었다. 아이스 웜이 머리를 쿵, 찧는 것과 동시에 사방으로 눈이 날렸다. 연우를 반쯤 끌어안은 차헌이 거칠게 손을 휘둘러 아이스 웜과 그 일대를 얼려버렸다.
“다른 마수의 마석을 먹고 자란 것 같죠? 어떡하죠? 아이스 웜의 핵은 등에 있는데….”
아이스 웜은 몸을 흔드는 것만으로도 가볍게 얼음 밖으로 벗어나 버렸다. 도망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배재영이 곤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눈 속을 자유자재로 헤엄쳐 다니는 아이스 웜의 위장술도 위장술이었지만, 크기가 너무 컸다. 저 높이에 올라타는 것부터가 걱정이었다. 얼음으로 계단을 만드는 것에 실패한 배재영이 연우를 쳐다봤고, 연우는 곧바로 아이스 웜의 등에 좌표를 잡았다. 아이스 웜이 눈 밖으로 나오는 타이밍을 노린다면 큰 위험 없이 옮겨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우가 할 수 있겠다며 중얼거리자 배재영은 얼음 채찍 대신 얼음창을 만든 다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으려는 순간 차헌이 연우의 손을 낚아챘다.
“저랑 해요.”
“괜찮겠어?”
다른 것도 아닌 곤충형 마수다. 하얗게 질린 안색에 연우와 배재영이 차헌을 말려봤지만, 차헌의 의지는 굳건하기만 했다. 차헌은 혹시 모른다며 연우에게 포션 한 다발을 안겨준 다음 얼음창을 만들어 땅에 쿡쿡 내려찍었다. 배재영은 그동안 남은 알을 처리하고 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배재영과의 거리가 멀어지자 차헌이 사납게 속삭였다.
“저 사람이 형한테 각인 시도하려면 어떡하려고 손을 막,”
“배재영 에스퍼는 나 가이,”
“들으면 어떡해요!”
연우의 입을 틀어막은 차헌이 고개를 빼고 배재영을 살폈다. 기가 막혔다. 자신을 에스퍼로 아는 배재영이 어떻게 각인 시도를 한다고. 차헌의 손을 떼어낸 연우가 입술을 달싹거리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왜요?”
“각…인을 어떻게 하는지는 알지? 서로가 거부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아무리 그래도 사관학교에서 기본적인 성교육은 시켰겠지? 라는 기대는 차헌의 대답에 산산조각이 났다.
“거부할 수 있다는 건 아는데, 어떻게 하는지는 몰라요.”
순진한 표정에 연우는 가만히 눈만 굴렸다. 당장이라도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달라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차헌은 꾸물꾸물 기어 다니는 아이스 웜을 눈짓할 뿐이었다. 이 일은 미래의 자신에게 미뤄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애써 사념을 떨친 연우가 공간을 옮겨 아이스 웜의 자맥질을 관찰했다.
“형, 근데 여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천장을 올려보던 차헌의 질문에 연우도 천장을 올려보았다. 미묘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차헌은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아니, 그냥 좀 느낌이 이상해서요.”
찜찜하다는 차헌의 표정에 연우는 주변을 탐색했지만,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식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 게이트에 휘말려서 그런가?
“형. 저기.”
배재영을 향해 구물구물 기어가던 아이스 웜이 고개를 드러낸 순간, 연우가 차헌을 붙잡고 공간을 접었다. 발이 닿자 자신이 벌레 위에 서 있다는 걸 깨달은 차헌이 헛구역질을 하다, 이내 달려가 껍질을 창으로 내려쳤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 나온 창을 다시 한번 내려찍어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아이스 웜이 눈 속으로 도망갔다. 연우는 다급히 차헌을 붙잡고 등 위에서 뛰어내렸다. 기다려봐도 아이스 웜은 지상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연우가 위치를 감지하는 동안, 이전보다 창을 더 두껍게 만든 차헌이 연우에게 물었다.
“어디 있어요?”
“이쯤?”
이 아래 웅크리고 있다고 알려주자 차헌이 손을 뻗어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언젠가처럼 발이 붕 뜬 채 안긴 연우가 고개를 틀어 차헌을 올려봤다.
“왜?”
“형 혼자 두기 싫어서요.”
그 말과 함께 주변의 시야가 바뀌기 시작했다. 차헌이 쥔 창의 길이가 점점 늘어나면서 두 사람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아까 두드려보니까 제힘으로 뚫을 수 있는 두께가 아니더라고요. 저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 같고.”
차헌은 배재영을 눈짓했지만, 연우는 차헌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래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차헌이 놀란 얼굴로 연우를 돌아봤다.
“무서워요? 형 공간계라서 이 정도는,”
“나 보지 마!”
창에 집중하라고 연거푸 속삭인 연우는 울상을 지으며 아래를 힐끗거렸다. 어느새 땅보다 천장이 더 가까운 높이가 되어있었다. 자신의 훈련복을 움켜쥔 연우를 쳐다보던 차헌은 상황에 맞지 않은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계속 이대로 있을까, 싶었지만 연우가 겁에 질려있는 게 눈에 보여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단념한 차헌이 기겁하는 연우를 달래가며 자세를 바꾸자, 어느새 연우는 차헌의 목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다리도 매달리면 좋을 텐데. 아쉬움에 혀를 찬 차헌은 아래를 내려보다가 연우에게 신호를 주었다.
“지금.”
신호와 동시에 창이 뚝, 부러졌다. 빠르게 하강하는 동안 연우는 비명을 삼켰고, 차헌은 창을 만들어 아이스 웜의 등에 그대로 내리꽂았다. 창의 머리가 박살 나긴 했지만, 자루는 아니었다. 깨진 비늘 틈을 파고든 자루는 아이스 웜의 등에 단단히 박혔다.
아이스 웜이 고통으로 날뛰는 동안 차헌이 갈라진 껍질 사이로 창을 던졌다. 창이 깊게 파고들도록 힘을 준 차헌은 쉬지 않고 창을 만들어 아이스 웜의 등에 박아넣었다. 아이스 웜의 푸른 피가 신발 밑창을 적실 때까지 반복하던 차헌이 후, 하고 손을 털며 일어났다.
창을 박아넣을 때마다 꿈질거리던 아이스 웜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차헌은 연우를 끌어안고 다시 한번 창을 늘렸다.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껍질이 산산조각이 났다. 말랑한 속살에 손을 올린 차헌이 이능을 사용했다. 끼그그극, 안에서 솟아난 창이 껍질을 뚫고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스 웜을 고슴도치로 만들어놓은 다음에야 차헌이 만족한 얼굴로 일어났다.
아이스 웜의 사체를 올려보던 배재영이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확인 사살용이었어요.”
차헌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하며 아이스 웜의 껍질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다. 껍질만 팔아도 제법 돈이 될 것 같아 지켜보고 있었는데, 차헌이 능숙하게 배를 가르고 마석을 꺼냈다. 한꺼번에 많은 마석을 독식해서 그런지, 웬만한 마석보다 크기가 컸다.
[맛있겠다….]
연우는 침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드래곤의 말을 무시하며 사방에 펼쳐진 마석을 탐색했다. 소용돌이 문양이 없는 마석이 나왔으니, 다음 마수가 나타날 차례였다.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아우,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쐑, 하고 무언가 날아가는 소리도 들렸다. 돌아보자 차헌이 단검을 쥐고 있었다. 설원 늑대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간 단검이 정확히 이마 한가운데 꽂혔다. 그대로 쓰러진 늑대의 뒤에서 또 다른 설원 늑대가 뛰어올랐지만, 그 또한 차헌이 던진 단검에 맞아 쓰러졌다.
배재영과 연우의 감탄에도 표정 변화 없이 눈으로 손을 씻어낸 차헌이 연우의 이마를 짚었다. 연우가 깜짝 놀랄 만큼 차가운 손에 펄쩍 뛰자, 차헌이 거칠게 혀를 찼다.
“아까 준 포션은요?”
“감기랑 포션은 상관없지 않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마셔요.”
배재영의 질문을 무시한 차헌이 보조 가방을 뒤적여 포션을 건넸다. 감기에 걸렸을 때 포션을 마신다는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지만, 황홀한 포션의 맛을 잊지 못한 연우는 망설임 없이 포션 병을 기울였다.
포션이 목에 걸리는 듯한 불편한 감각에 그제야 감기에 걸렸다는 실감이 났다. 연우가 코를 훌쩍이는 동안 차헌이 겅중겅중 달려가 설원 늑대의 사체에서 마석을 획득했다. 소용돌이 문양을 확인한 차헌이 나가자며 팔을 흔드는 찰나, 차헌의 모습이 쑥, 사라졌다.
뭐지? 놀란 연우가 배재영을 붙잡고 공간을 이동하려던 순간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추위가 느껴졌다. 매서운 바람을 피해 몸을 웅크리자 배재영이 연우의 어깨를 잡아챘다.
“제 아이템은요?”
새하얗게 질린 배재영의 물음에 연우는 간신히 시선을 내려 손가락을 내려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손가락에서 파란빛을 내던 아이템이 사라져 있었다. 연우의 표정을 확인한 배재영은 경악하며 바닥을 미친 듯이 더듬었다. 연우 또한 몸을 웅크려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다.
보여?
[아무것도.]
혹시 몰라 드래곤에게 물어봤지만,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연우는 빨갛게 얼어붙은 손끝을 바닥에 붙이고 감각을 펼쳤다. 연우의 반응을 기다리던 배재영은 주변의 눈을 굴리며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주위를 살펴도 눈앞의 광경은 새하얗기만 할 뿐, 두 사람이 찾는 파란색이 보이지 않았다.
“아까 동굴에서 잃어버린 건 아니죠?”
채근하는 목소리에 연우가 기억을 더듬었다. 반지를 빼고 있는 게 어떠냐는 차헌의 권유와 자다 일어나자마자 주변을 둘러볼 시간도 없이 밖으로 나왔던 게 떠올랐다. 그때는 이렇게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혹시 몰랐다. 연우는 움직이지 않는 입술로 사과를 건네며 차헌이 사라진 자리를 더듬었다.
연우는 손끝에 걸리는 소용돌이 마석을 챙겨 배재영과 함께 동굴을 향해 공간을 접었다. 공략을 완료했으니 이내 공격대나 후발대가 들어올 차례였다. 아이템 등록을 해뒀을 테니 그런 일은 없겠지만, 아주 가끔 자신이 아이템을 주웠으니 주운 사람이 임자 아니냐며 큰소리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배재영이 입구를 둘러볼 동안 연우는 동굴 안쪽으로 향했다. 연우는 추위에 하염없이 몸을 떨며 주변을 살폈다. 누워있던 자리를 둘러보고 있을 때 우릉,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연우가 이능을 사용해 도망가려 했지만, 발바닥이 땅에 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야?]
떨어지는 바위를 보던 연우가 벽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웅크렸다. 연우의 품에서 기어 나온 드래곤이 황금빛 방어막을 만들었다. 방어막에 튕겨 나간 바위들이 입구 쪽으로 굴러가 그대로 벽이 되었다.
입을 틀어막고 기침하던 연우는 바위틈으로 작게 새어 나오는 빛으로 주변을 확인했다. 연우가 입구를 꽉 막고 있는 바위를 두들겨보며 다시 한번 이능을 사용했지만, 이능이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단순히 튀는 정도가 아니었다. 마나가 연우의 의지를 외면하고 있었다. 코를 훌쩍인 연우가 바위를 옮기자, 어깨에 올라탄 드래곤도 마나로 바위를 옮기기 시작했다.
“한연우 에스퍼? 거기 있어요?”
“배, 큼, 배재영 에스퍼!”
연우의 부름에 배재영은 응답하지 않았다. 안 들리는 건가? 자리를 옮겨 배재영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에도 연우의 목소리는 점점 갈라졌다. 잔뜩 쉰 목소리로 배재영을 부르던 연우가 의아함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배재영이 입을 열었다.
대답 대신 들려온 건 배재영의 웃음소리였다.
“아, 정말.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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