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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76화 (76/143)

76화

“푸하하하.”

배재영은 허리를 접어가며 웃음을 터트렸다. 숨이 모자라기라도 하는지 헐떡인 채 웃던 배재영이 돌연 입구를 막은 바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는 흐느낌과 비슷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한연화가 당신이 여기서 죽을 거라는 걸 안 알려줬나요? 알고도 모른 척한 거면 아, 정말 독하기 짝이 없네요. ”

“네…?”

한연우는 잔뜩 쉰 목소리로 묻다가 기침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한연우의 대답에 배재영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한연화는 다른 사람들이 죽어 나갈 때 모른 척했던 것처럼, 제 친오빠가 죽어가는 것도 모른 척할 모양이었다. 제 오빠를 살리기 위해 제약을 무시하길 바랐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한연화가 제 오빠를 아끼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러니 한연화도 제가 느꼈던 고통과 슬픔을 똑같이 느껴야만 했다.

희열감에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배재영이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나는 이대로 나가서 던전에 눈사태가 일어났다고 보고할 거예요. 한연우 에스퍼는 빠져나오지 못했으니, 어떻게 하면 좋냐고 눈물도 몇 방울 흘릴 거고요. 강차헌 에스퍼가 길길 날뛰겠지만, 뭐, 아무리 강차헌 에스퍼라고 해도 한 번 나온 던전을 다시 들어올 수 없으니 어쩌겠어요? 당신에게 빚을 지우려는 몇몇 인간들이 후발대를 들여보내려 하겠지만, 그때까지 눈사태는 멈추지 않을 예정이랍니다. 눈사태 때문에 다른 에스퍼까지 휘말릴 수 없으니 며칠 기다려야겠죠. 그동안 당신은 우리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곳에서 서서히 말라 죽어 가겠죠.”

배재영은 흡족한 얼굴로 웃으며 아이템을 꼼꼼히 확인했다. 바위틈 사이로 한연우가 설명을 요구했다. 언니처럼 자신이 죽는 이유도 모르고 생을 다하는 건 불쌍하니 조금만 더 설명해주기로 했다.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동생을 향한 원망 몇 줄 남겨주면 더 좋고.

“세상에는 로터스 길드장 같은 미친놈들만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배재영은 한연화가 지나갔던 자리마다 입을 맞출 기세였던 로터스 길드장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한연화를 칭송하고 받드는 무리는 항상 존재했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듯, 한연화가 써 내려간 미래에 반발하는 무리도 어디든 존재했다.

그녀가 입을 열어서, 그리고 그녀가 입을 닫아서 가족과 자신의 미래를 잃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책의 주인공을 칭송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

배재영이 속한 무리에는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하급 에스퍼들도 속해있었다. 등급은 낮지만, 에스퍼로서의 자부심은 넘쳤던 각성자들은 자신의 이능을 인정해주지 않고, 심지어 일반인으로 살아갈 것을 권하는 협회를 원망했다.

그들은 모든 각성자들을 미워했지만, 협회가 아끼는 한연화를 특히 증오했다. 자신들은 평생 감시받으며 살아가야 하는데, 등급이 높다고, 이능이 특이하다는 이유로 대접받는 한연화에게 모든 감정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한연우가 끼고 다니던 반지였다. 지금 설치하고 있는 아이템들이며 공간까지. 그들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니 당신은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거예요. 한연화 때문에.”

한연우는 한연화 때문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과 한연화에게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무리 중 몇몇은 한연우의 살점이라도 보관하고 있어야 속이 후련하겠다고 주장했지만, 흔적이 남을 게 분명했다.

각종 회의 끝에 배재영이 원하는 방식으로 한연우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배재영은 자신의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한연우가 비참한 모습으로 발견되기를 바랐다.

눈물을 훔친 배재영은 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빌어먹을 한연화의 얼굴은 그토록 생생한데, 언니의 얼굴은 기억을 조각조각 짜 맞춰야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간신히 언니의 얼굴을 기억해낸 배재영은 작게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알고 있죠? 던전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우리 언니가 얼마나 외롭게 죽어갔는지, 당신도 한번 느껴봐요.”

주저앉은 배재영이 웃음과 함께 눈물을 터트렸다. 드디어 그 빌어먹을 한연화에게 복수했다. 이날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씹어 죽여도 모자랄 한연우에게 웃어주는 동안 제 마음이 얼마나 새까맣게 죽어갔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배재영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내버려 둔 채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마지막까지 후련하게 웃음을 흘린 배재영이 한쪽 벽면을 바라봤다. 계획과 다르게 강차헌이 휩쓸리긴 했지만, 완벽하게 속여넘겼다. 강차헌과 한연우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곳이 가상 던전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계획에 동참한 직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보내는 배재영의 뒤에서, 멀리서 황금색 눈이 반짝였다.

[쯧쯧쯧.]

기다란 혀로는 혀를 차지 못해 입으로 쯧쯧쯧 소리를 낸 드래곤이 바위틈을 통해 동굴로 기어들어 갔다.

[여기 던전 아니야.]

드래곤의 말에 웅크리고 있던 연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 이건? 진짜야?”

연우가 보관하고 있던 마석을 꺼내며 물어보자 드래곤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헌과 가상 던전에 들어갔을 때 진짜 마수를 집어넣은 게 이상원인 줄 알았더니, 연우에게 앙심을 품은 직원들의 짓이었나보다.

연우는 드래곤의 머리를 매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드래곤조차 헷갈렸을 정도로 정교한 가상 던전이었다.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연화를 노리고 있단 말이지….

혀를 깨문 연우는 드래곤에게 마석을 내밀었다.

[…먹어도 돼?]

조심스러운 질문과 반대로 게걸스레 입을 벌린 드래곤이 마석을 먹어 치웠다. 드래곤은 목이 막히지도 않는지 마석을 꿀떡꿀떡 삼켰다. 드래곤은 흡족한 듯 기다란 혀로 입가를 정리했다. 그러더니 뿔이 더 길어진 것 같지 않냐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제 밥값 해. 바깥에 아이템이 있다고 했지? 들키지 않게 정리할 수 있어?”

드래곤은 자신을 뭐로 보냐며 삑삑거리다가 틈을 통해 기어나갔다. 연우는 드래곤이 아이템을 정리하는 동안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정은영처럼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배재영처럼 음습하게 속마음을 숨기고 접근하는 사람도 많았다. 과거의 삶에서도, 지금의 삶에서도 배재영은 단 한 번도 연우에게 적개심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 믿고 있었는데….

연화 보고 독하니 뭐니 하더니 자기가 제일 독하네. 혀를 찬 연우는 비틀비틀 일어났다. 마나 코어를 옥죄고 있던 갑갑함이 조금씩 사라졌다. 드래곤이 성공적으로 아이템을 파훼한 모양이었다.

연우는 반지가 있던 손가락을 만지며 혀를 찼다. 연화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닌데 왜 화살을 연화에게 돌리는 건지 모르겠다. 미래를 알려줘도 욕하고, 안 알려줘도 욕하고. 우리 연화 욕 많이 먹어서 오래오래 살겠네.

“제발 오래 살아야 할 텐데.”

작게 중얼거린 연우는 이능이 돌아오자마자 동굴을 벗어났다. 기다리고 있던 드래곤이 가볍게 꼬리를 흔들었다. 드래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추위가 몰아치는 것과 별개로 소름이 돋아 올랐다.

드래곤이 없었다면 연우는 배재영이 바라는 대로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전보다 조심스러운 태도로 드래곤을 들어 올린 연우가 동굴을 둘러싸고 있는 아이템을 살폈다. 만지기만 해도 마나 코어가 힘을 잃었다. 마나 제어 아이템인 게 분명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이니 배재영의 무리가 독자적으로 발명한 아이템인듯했다.

설마 차헌이 폭주한 이유도 이것 때문인가? 잠시 아이템을 노려보던 연우가 불쾌감을 억누르며 사방에 널린 아이템을 챙겼다.

[왜 챙겨?]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지금도 필요하고.”

대답한 연우는 열이 오른 머리를 눈 속에 박아넣었다. 시간이 지나면 분명 열이 더 오르겠지만, 지금만큼은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헬리오도르.”

[세상에. 연우야. 너 나를 드디어 이름으로 불러주는구나! 이왕이면 헬리라고 불러보련?]

연우가 달려드는 드래곤의 머리를 문질러주며 저 멀리 보이는 인영을 응시했다.

“헬리. 그때 네가 그랬지. 드래곤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응. 그렇지.]

“나는 저 사람과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아. 해결할 수 있어?”

연우의 말에 드래곤은 아쉬운 얼굴을 한 채 꼬리로 뿔을 매만졌다. 이제 조금 자란 뿔이 아쉽긴 했지만, 계약자가 처음으로 청한 부탁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이트를 열어줄까?]

“…열 수 있어?”

[잠깐이라면.]

잠시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연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조 가방에 마나 제어 아이템을 챙겨 넣은 연우가 이능을 사용했다. 인벤토리 기능 덕분인지 이능을 사용하는데 별다른 제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연우는 담요를 꼼꼼하게 두르고 곧바로 배재영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배재영이 눈이 동그래졌다.

“무, 무슨… 어떻게?”

“당신만 팀원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연우의 말에 드래곤이 배재영의 훈련복에 아이템을 부착하며 눈을 찡긋거렸다. 드래곤이 폴짝 뛰어내리는 것과 동시에 배재영이 연우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이능이 나오지 않자 배재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제 손을 내려보다 이를 갈며 맨손으로 달려들었다. 공간을 접어 도망간 연우가 드래곤에게 눈짓했다. 그 순간 연우와 배재영 사이의 공간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자수하는 게 어때요?”

배재영이 훈련복에 붙어있던 아이템을 찾아내 코웃음을 치며 얼음 채찍을 휘둘렀다. 때마침 완성된 게이트가 배재영의 발목을 붙잡았다. 당혹한 배재영을 쳐다보던 연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나가서 눈사태가 일어났다고 말할 거예요.”

연우는 추위로 굳어가는 입술을 억지로 벌려 말을 이었다. 배재영 에스퍼가 먼저 나오지 않았냐며 눈물도 몇 방울 흘려줄 겁니다. 그리고 이 계획에 참여한 모든 인간을 찾아낼 거예요. 그리고 한 명씩, 한 명씩, 당신에게 보내줄게요. 그때까지 당신이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지만, 당신도 알잖아요. 던전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연우는 게이트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 발악하는 배재영의 손을 바라보며 다짐처럼 중얼거렸다.

“당신들은 절대 내 동생을 해칠 수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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