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77화 (77/143)

77화

“형, 형. 일어나요.”

차헌의 부름에 눈을 뜬 연우가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했다.

8시 20분.

겨우 세 시간 잤다. 연우는 어깨를 흔드는 차헌의 손을 떼어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몸이 물 먹인 솜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많은 시도 끝에 겨우 이불을 덮을 수 있었는데, 차헌이 자비 없는 손길로 이불을 벗겨냈다.

“밥 먹고 약 먹고 자요.”

굶어 죽은 귀신이 붙었나. 차헌은 전보다 심하게 연우의 끼니를 챙겼다. 연우는 침대 밖으로 끌어내는 손짓에 속절없이 이끌리며 코를 훌쩍거렸다. 그 소리에 약을 꺼내던 차헌이 험악한 표정으로 약 봉투를 확인했다.

“이 새끼들 돌팔이 아니에요? 약 먹은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어떻게 차도가 없어요?”

현존 최고의 포션 제작자에게 돌팔이라니. 백두 길드장이 들으면 울겠는데.

차헌은 약 봉투를 내려놓고 서슴없이 연우의 이마를 짚었다. 평소보다 서늘하게 느껴지는 체온에 이마를 기댔다.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던 차헌이 죽그릇을 들고 왔다. 연우가 깨작깨작 떠먹는 동안 차헌은 장조림도 먹어라, 죽만 먹지 말고 김치도 먹으라며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동안 연화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연우는 힘없이 김치를 집어 올리다 현관을 바라봤다. 곧 띵동,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드래곤과 계약한 이후로 연우의 이능은 더욱 예민해졌다. 아공간 밖에서의 기척을 잡아낼 정도로.

“점심때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부탁해놓고 가게요.”

띵동, 띵동, 재촉하는 소리에도 차헌은 느긋한 동작으로 그릇을 치우고 연우가 약을 먹는 것까지 지켜봤다. 그제야 몸을 일으킨 차헌이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오늘도 탐색대랑 같이 움직여?”

“네.”

보조 가방을 건네주던 연우는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배재영의 무리가 밑밥을 깔아둔 건지, 센터에는 세 사람이 게이트에 휩쓸렸다는 소문이 퍼져있었다.

먼저 차헌이 나오고, 연달아 연우도 무사히 빠져나오자 센터장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둘을 반겼다. 부센터장은 그대로 사건을 덮으려 했다. 그러나 센터장의 비서가 이를 말리며 배재영의 행방을 물었다.

달려온 차헌에게 끌어안겨 있던 연우는 표정이 굳어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해두며 입을 열었다.

배재영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눈사태가 일어났다고 보고하자 배재영을 찾기 위해 탐색대가 파견되었다. 차헌은 형이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렇게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옆에 붙어있더니 시간이 지나자, 아무래도 뭔가 찝찝하다며 탐색대를 자처했다.

신발을 신은 차헌이 다녀오겠다며 팔을 크게 벌렸다. 연우가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자, 차헌은 발바닥에 껌이라도 붙은 것처럼 천천히 현관을 벗어났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대기하고 있는 탐색대 대장 다섯 명이 보였다. 십인 부대 다섯팀을 움직일 정도로 배재영이 중요한 사람인가? 아니다. 저 중에 배재영의 무리가 포함된 게 분명했다. 길게 기지개를 켠 연우가 방으로 들어가니, 드래곤이 넋을 잃은 채 거울을 보고 있었다.

몸을 이쪽으로 돌렸다가, 저쪽으로 돌리기를 반복하며 드래곤은 자신의 뿔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거울 속 연우와 눈이 마주치자 가슴을 세웠다. 연우는 뿔이 조금이라도 더 길어 보이게 몸을 세우고 있는 드래곤의 뿔 사이를 슥슥 문질렀다.

“이제 진짜 헤츨링처럼 보이네.”

[그럼 이때까지는 가짜로 보였단 말이야?]

“지금까지는 그냥 보석뱀으로 보였지.”

그 말에 드래곤이 입을 벌리며 달려들었다. 아프지 않게 손가락을 꼭꼭 깨무는 드래곤은 더 이상 보석뱀으로 착각할 수 없을 만큼 자라있었다. 한 뼘도 되지 않던 몸은 몇 번의 탈피 이후로 연우의 팔뚝보다 길어졌다. 이게 다 배재영의 무리가 키우고 있던 마수들 덕분이었다.

이대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싶었다. 간신히 침대에서 시선을 돌린 연우는 잠옷을 벗고 훈련복으로 갈아입었다. 가볍게 몸을 푼 연우가 보조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며 애걸하던 사람이 스스로 바친 무리의 명단이었다.

연우는 열이 올라 흐릿해진 시야로 빨간 줄이 없는 이름과 주소를 확인했다. 나갈 채비를 끝내자 드래곤이 느릿하게 기어와 연우의 손목에 감겼다.

황금빛이 도는 연두색 마나가 일렁이는 것과 동시에, 물컹한 푸딩 속에 온몸이 파묻히는 기분이 들었다. 연우는 팔다리에 감기는 마나를 털어내며 아무것도 없는 광활한 대지를 둘러보았다. 바닥에는 연우의 손가락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작은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있었다. 그동안 연우가 아공간을 오갔던 흔적이었다.

좌표를 잡은 연우가 공간을 접는 순간, 위이잉- 하는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사방에 달린 문을 살펴보는데, 이쪽으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연우는 발걸음의 수를 헤아려보고 숫자에 맞춰 함정을 만들었다.

이전보다 훨씬 섬세해진 이능은 분절된 공간이동이 가능했다. 덕분에 웬 놈이냐며 기세 좋게 쳐들어온 사람들은 무릎 아래의 신체 부위를 잃은 채, 연우의 발밑에 엎드려야 했다.

“너! 여길 어떻게 알고 왔어? 그년이 알려준 거지!?”

“저 문 열 수 있는 사람 있어요?”

나긋나긋한 질문에도 사람들은 핏발 선 눈으로 연우를 노려볼 뿐이었다. 온갖 저주에 보란 듯이 하품을 한 연우가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상을 제때 받지 않으면 연우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차헌이 쳐들어올 것이다. 그러니 시간 계산을 잘해야 했다. 드래곤의 식사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연우가 손끝을 까딱거리자 사람들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하다가 이내 소용돌이무늬를 그리기 시작했다. 눈이 사라지는 잔인한 광경에도 연우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연화에게 위협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망설임 없이 손을 움직일 수 있었다. 점점 사라지는 눈을 더듬거리던 누군가가 비명처럼 외쳤다.

“제가! 제가 열 줄 압니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이 온갖 악을 질렀지만, 연우의 앞까지 질질 기어 온 남자가 제발 살려달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연우가 발을 돌려주자 남자는 엉엉 울면서 제 발을 더듬었다. 그런 남자를 끌고 문 앞에 서자, 남자가 벌벌 떨면서 손을 내밀었다. 문고리를 잡은 남자의 손이 열쇠로 변하며 문이 딸깍, 열렸다.

[다 먹어도 돼?]

“그럼.”

연우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드래곤이 폴짝 뛰어내려 마수들을 향해 기어갔다. 배재영의 무리는 위험 구역을 개조해 아지트로 삼고 있었다. 이때까지 들키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아지트는 크기도 그렇고 종류도 많았다.

아니, 아니지. 들키지 않은 게 아니라 눈을 감아준 거겠지. 명단의 이름을 떠올린 연우가 헛웃음을 흘리며 악을 쓰는 사람들을 내려봤다. 마수를 팔아, 마석으로 연구한 돈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모양인데, 그 칼날에 자신이 베일 수도 있다는 것쯤은 예상했어야지.

연우는 꼬리를 흔들어 마수를 통제하는 드래곤에게 신호를 보냈다. 세뇌당해 스스로 마석을 토해내는 마수들 사이에서 드래곤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연우 옆의 공간이 일렁이며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며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너! 네가 이러는 거 네 동생도 알아!?”

“알면 안 되죠.”

연우는 한 사람 한 사람 친절하게 배웅하며 게이트에 밀어 넣었다. 집어넣기 직전 분리해뒀던 부위를 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왜 이러냐며 울부짖는 사람을 잠시 쳐다보던 연우가 말없이 손을 움직였다.

설명해줄 이유는 없었다. 설명해주면 설명해주는 대로 자기들이 더 억울하다고 날뛰는 바람에 연우만 피곤했다. 연우는 안심하고 있던 남자까지 게이트 안에 넣어 손을 탁탁 털었다. 시간을 확인한 연우가 드래곤을 찾았다. 슬슬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위험 구역으로 들어가자 마석을 삼키고 있던 드래곤이 한쪽 구석을 향해 꼬리를 쿡쿡 찔렀다. 살펴보자 비싼 값으로 판매되는 마수의 부위를 따로 분류해둔 모양이다. 드래곤이 잘했냐는 듯 가슴을 내밀었다. 연우는 드래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보조 가방을 열어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드래곤이 미처 먹지 못한 마석까지 챙긴 연우는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계약 이후 이능의 급이 달라지긴 했지만, 아무래도 아공간을 통과하는 건 몸에 큰 무리가 되었다. 이러니 감기가 안 낫지. 골골거리던 연우는 점심을 먹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차헌이 숙소로 들어갔을 때, 연우는 소파에 앉아 반쯤 졸면서 타자를 치고 있었다. 연우의 옆에 앉은 차헌은 ‘ㅇ’으로 가득한 화면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연우의 머리를 제 어깨로 이끌었다. 그렇게 잠이 들었던 연우가 눈을 반짝 떴다. 언제 왔냐는 질문에 차헌은 대답 없이 연우에게 안겨 올 뿐이었다.

“잠시만, 오늘은 이거 다 써야 해.”

센터장은 두 사람이 어떻게 던전에서 멀쩡히 빠져나왔는지 무척 궁금해했다. 배재영이 놓은 함정에 빠졌다고 사실대로 말했다간 센터장의 비서를 비롯한 무리가 꼬리를 자르고 숨어들 가능성이 컸다. 무리의 뿌리를 확실히 뽑아내기 전까지 그들의 정체를 비밀에 부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가짜 던전 보고서를 쓰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던전 보고서요? 저한테는 안 써도 된다던데.”

“네가 귀찮은 티를 냈으니까.”

정확하게는 센터 내에 게이트가 생성된 것도 알아채지 못했냐며, 휘말린 직원에게 충분한 휴식도 주지 않고 뭐 하는 짓이냐며 괄괄거렸지. 차헌은 말없이 노트북 화면을 쳐다봤다. 연우는 반쯤 졸며 보고서 양식을 채워나갔다.

“첫 번째가 파라 버드였지?”

마수를 처리한 건 제가 아니라 차헌이라 노트북을 내밀었지만, 차헌은 연우의 허리를 감고 있는 손을 풀 생각이 없다는 듯 입만 움직였다.

“두 번째가 눈송이 슬라임이요.”

물로 그들을 녹였다는 것, 알에서 깨어난 아이스 웜과 서리 벌레가 서로를 공격했고, 그 과정에서 부피를 키운 아이스 웜을 창으로 찔러 해치웠다는 것까지. 보고서를 작성하는 동안 스르르 쓰러진 차헌이 연우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며칠 잠을 설쳤다더니 졸음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차헌과 함께 하품하던 연우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이 뭐였지? 스노우 오크? 어떻게 죽였어?”

[연우야, 많이 졸려? 보스는 설원 늑대였어.]

드래곤의 정정에도 연우는 말없이 차헌의 대답을 기다렸다.

“스노우 오크… 들고 있던 무기를 빼앗아서 역공격하는 거요.”

차헌이 잠에 취해 웅얼거리자 쉼 없이 움직이던 연우의 손가락이 굳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서 그런가, 차헌이 잠이 묻은 눈으로 연우를 올려봤다.

“이제 다 썼어요?”

“강차헌 에스퍼.”

습관처럼 차헌이, 라며 지적해주려던 차헌은 심상치 않은 연우의 표정에 몸을 일으켰다. 연우는 잘게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놓기를 반복하며 차헌과 눈을 마주쳤다.

“스노우 오크는, 3년 뒤 나타나는 던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마수입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7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