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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78화 (78/143)

78화

연우는 눈을 피하는 차헌을 보며 작게 웃었다. 맞구나. 기억이 있는 게 맞았어. 연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누가 머리카락을 하늘로 잡아당기는 듯한 긴장감이 일었다. 동시에 궁금증이 해소되었다는 만족감에 어깨가 잘게 떨렸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궁금했었다. 나는 왜 과거로 돌아온 걸까? 나만 과거를 기억하는 걸까?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도 그때의 기억이 있는 건 아닐까? 연우의 의문을 해결해줄 사람이 앞에 앉아있었다. 그러나 섣불리 입을 열기가 두려웠다. 너무 오래 의문을 가지는 바람에 헛것을 들은 게 아닐,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 헛것이 아니다. 연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차헌을 바라봤다.

어떻게라, 제게 관심이 있니, 없니 난리를 쳤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 오래전부터 연우는 차헌을 지켜봐 왔다. 차헌은 얼음에서 냉기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자신의 마나를 줄줄 흘리고 다녔다. 오랜 시간 활을 쏘아온 버릇 때문인지 이능을 사용할 때는 항상 왼손이 먼저 나가고, 그 뒤에 오른손이 움직였다. 그 밖의 사소한 버릇에 대해서는 앉아서 한 시간도 떠들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차헌은 한 손이 아닌 양손으로 이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흘리고 다니던 마나도 완벽히 갈무리했다. 제일 크게 달라진 점은, 처음 보는 것을 발견해도 연우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배재영의 계략에 휘말렸을 때도 이게 뭐냐, 저게 뭐냐 묻지 않고 차분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처음 가상 던전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연우가 하나하나 알려줘야 했던 차헌이었다. 그 뒤에 던전에 한 번 다녀오긴 했지만, 폭주로 끝이 났던 던전에서 제대로 된 경험을 쌓았을 리가 없었다.

처음은 의심이었고, 나중에는 확신이 들었다. 연우가 아는 차헌이라면 마수를 보자마자 저게 뭐냐며 달려왔을 것이고, 연우가 하나하나 알려준 다음에야 차분하게 공략을 시도했겠지. 하지만 차헌은 스스로 공략법을 깨닫고, 던전에서 길을 찾았다.

확실했다. 지금 앞에 앉아있는 에스퍼는 연우가 아는 차헌이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냐니까요.”

연우는 소매를 잡고 흔드는 차헌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대답했다.

“마나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졌으니까요.”

“제가요?”

“원래는 오른손만 사용했잖아요. 지금은 양손으로 사용하고.”

“아.”

연우의 말에 차헌이 자신의 손을 내려봤다. 차헌은 자기 몸인데도 신기하다는 듯 손을 꿈지럭거리다 슬쩍 몸을 기대왔다.

“서른 살인가, 그쯤에 오른팔이 잘려 나갔거든요. 회복되는 동안 왼손으로 이능을 쓰다 보니 버릇이 들었나.”

자기도 몰랐던 버릇인데 어떻게 알았냐며 차헌이 몸을 붙여오는 탓에 연우가 소파 위로 쓰러졌다. 예상한 것보다 태연한 차헌의 반응에 연우가 머릿속으로 드래곤을 불렀다.

[연우야, 손. 접촉에 항상 조심해. 마나 코어에 항상 마나를 남겨놓는 것 잊지 말고.]

드래곤의 경고에 연우는 허리 아래로 파고드는 차헌의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팔 잘린 건 스물아홉 때 아니야?

[음.]

드래곤은 대답해줄 수 없다는 듯 침음을 흘렸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연우가 읽었던 책 속의 차헌은 자신의 세력을 점점 키우며 성장해갔다. 그리고 이를 경계한 센터장이 차헌의 자리를 노리는 에스퍼가 손을 잡고 차헌의 뒤를 치는 일이 발생했다. 그 일을 계기로 정영환을 밀어내고 센터장이 되는 게 차헌의 미래였다.

그런데 책으로 정해진 미래가 바뀌었다고? 누가 미래를 바꾸려 했고, 그 영향으로 미래가 바뀐 것이다. 그럼 누가 미래를 바꾼 거지?

연우는 눈 안쪽이 작열하는 통증을 밀어내려 이를 악문 채 차헌의 옷을 붙잡았다. 연우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던 차헌이 반쯤 풀린 눈으로 연우를 응시했다.

“왜요?”

“그, 그럼….”

생각이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미래에 이명이 울려 퍼졌다.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웅크리자, 연우를 가두듯 손을 짚고 있던 차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차헌은 거친 숨을 토해내는 연우를 제 무릎 위로 올리며 속삭였다.

“협회장이 죽으면서 미래가 좀 비틀렸어요. 그것 때문에 난리가 나긴 했는데, 그때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두통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연우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는 차헌의 손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형형형.”

“응?”

“밥 먹고 자요.”

반쯤 졸던 연우는 차헌의 목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익숙한 온기가 주는 만족감에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버텨보려 해도 어깨를 흔드는 집요한 손길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눈을 깜박, 깜박거리다 부은 눈을 꾹꾹 눌렀다. 졸음의 여파인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대화 중에 잠이 든 것 같은데…. 연우는 작게 하품하다가 등을 미는 손길에 식탁으로 향했다. 따라오는 발소리가 없어 뒤를 돌아보자 차헌이 쿠션을 끌어안고 졸고 있었다.

“강차헌… 에스퍼는 식사 안 하십니까?”

“차헌이.”

차헌은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쿠션에 이마를 묻었다. 잠 좀 깨고 가겠다는 대답에 연우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식탁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다. 자신이 먹을 김밥을 주문하고, 차헌이 먹을 음식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가 비척비척 걸어왔다.

“뭐 먹을 거…?”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요.”

대충 고른 차헌이 턱을 괴고 연우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연우가 가만히 눈만 굴리자, 차헌이 손끝으로 연우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왜 이렇게 낯을 가려요?”

그러게. 연우는 어색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분명히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선명하게 빛나는 하늘색 눈동자 때문에 그런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잡아뗄걸.”

대놓고 물어본 게 아니라 방심했다며 차헌이 입을 삐죽이더니 조심스럽게 연우의 손등을 덮었다.

“솔직히 제가 숨기고 있을 성격도 못되고, 그냥 형이랑 같은 비밀 공유하고 싶어서 말한 건데… 알고 나니까 불편해요?”

불편이라기보다는…. 눈을 내리깐 연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이 상한다며 턱을 끌어내리는 차헌의 손길에 아랫입술이 윗니에 긁히며 빠져나왔다. 이런 거침없는 접촉이 좀 어색하달까.

지금의 차헌과 저는 같은 훈련장을 쓰며 나름 동고동락해온 사이지만, 그전에는 그 어떤 접점도 없었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밥 한 끼 해본 적 없었는데…. 그런 차헌과 같이 살고, 편한 옷을 입고, 밥을 먹는다는 게 조금 어색….

손바닥에 닿는 감촉에 흠칫 튀어 오른 연우는 차헌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지 마. 너 하지 마.”

연우의 경고에도 차헌은 엄지손가락으로 연우의 손바닥을 문지르다 그대로 손을 뒤집었다. 차헌이 손끝으로 손바닥의 금을 따라 쓸어내리자, 연우는 그만하라며 손을 말아쥐었다.

차헌은 손을 꽃봉오리처럼 모아 연우의 손등을, 팔꿈치를, 팔을 타고 올라가 등을 간질였다. 연우는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치다, 저도 모르게 이능으로 도망쳤다. 하마터면 아공간까지 넘어갈 뻔한 연우는 간신히 한쪽 벽에 붙어 차헌을 노려보았다. 연우가 온몸에 남아있는 감각을 없애버리고자 팔을 북북 긁어댔다. 그리고 발갛게 달아오른 차헌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그건 왜 그러는 거야?”

저것 역시 새로 생긴 버릇 중의 하나였다. 차헌은 얼마나 긁었는지 벌게진 목덜미를 더듬어보다 이리 오라며 제 옆자리를 도닥였다. 연우는 차헌이 달려들지 못하도록 경계하며 의자에 앉았다. 연우를 향해 몸을 돌린 차헌이 턱을 치켜들었다.

“센터장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랑 죽자고 싸운 적 있거든요. 그때 화상을 좀 심하게 입었는데, 치료가 좀 늦는 바람에 흉이 이만큼? 생겼었어요.”

차헌은 목덜미에 있던 흉터를 떠올리며 크기를 어림짐작해 목을 더듬거렸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목에 뭐가 닿으면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내 목에는 흉터가 없는데도요.”

피가 맺힐 것 같아 만류하자 차헌이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차헌은 잘 손질된 연우의 손톱을 내려보다 연우와 눈을 맞췄다.

“형은 그런 거 없어요?”

차헌의 물음에 연우는 식탁 위로 솟아오르는 음식을 쳐다봤다. 김이 솟아오르는 뚝배기 음식이나, 지글지글 넘치는 찌개 종류를 즐겨 먹던 차헌은 언제부턴가 그런 음식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먹어보고 맛있는 음식은 꼭 한 입씩 권하는 차헌이었다. 그래서 뜨거운 것을 먹지 못하는 자신에게 한 입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 다른 음식을 시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연우는 잘게 떨리는 차헌의 손을 내려봤다.

알고 있구나,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다 알고 있지만, 연우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사람을 떠보고 있었다.

“지금은 괜찮아?”

연우는 일부러 눈썹을 늘어트리며 차헌의 목을 살폈다. 대놓고 대답을 회피하는 모습에 차헌은 소고기 산적을 연우의 앞에 끌어주더니 다시 한번 또박또박 물었다.

“없냐고요.”

조금이라도 온기가 있는 음식은 멀리, 제게 권하는 음식은 적당히 식혀서 배치하는 차헌을 보던 연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가 뜨거운 음식을 피하는 걸 알고 있고, 그 이유까지 아는 듯한 모습에 연우는 손끝을 비틀었다.

어찌 되었든 과거로 돌아왔으니, 그건 다 없었던 일이다. 괜히 생색을 부리는 것 같아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차헌은 완강한 태도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헌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진 않았다. 그저 우리가 왜 과거로 돌아왔는지 이유를 알고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괜히 물어봤어…. 웅얼거린 연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심한 건 아니고 가끔….”

가끔은 무슨. 불 앞에서만 서면 파랗게 질리면서. 차헌은 한숨을 삼키며 산적과 같이 먹으라며 계란찜을 식혀 내밀었다. 산적 귀퉁이를 뜯어먹던 연우는 입에 맞는 지 몇 번 더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다 서서히 매운맛이 올라오는지 계란찜을 조심스럽게 떠먹기 시작했다.

바삐 움직이는 연우의 입술을 내려보던 차헌이 물을 따라 건넸다. 연우는 그런 차헌의 호의가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컵을 건네받았다. 물을 마시던 연우가 차헌과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형은 언제 알았어요?”

“너는?”

팔짱을 낀 차헌은 고개를 젖혀 천장을 보았다. 자신이 악몽을 꾸기 시작한 건 가상 던전 훈련에 참여했을 즈음부터였다. 훈련 내내 차분하던 연우가 화염 거미를 보고 쓰러졌던 날, 끔찍한 악몽을 꿨다.

그때 이후 차헌은 알 수 없는 위화감과 싸워야 했다.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한 손이 어색했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걸 볼 때마다 소름이 돋아올랐다. 차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꿈은 계속되었다. 꿈은 점점 생생해졌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생생한 꿈을 꿨다는 기억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평소와 다른 꿈을 꾸고 일어난 날,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나는 과거로 돌아왔구나.

“나도…. 그쯤인 것 같아.”

대답한 연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태도에 차헌이 손을 뻗어 연우의 볼을 건드렸다.

“형.”

“으응?”

그동안 다시는 만질 수도, 부를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8년간 그 장면을 얼마나 곱씹었던지, 연우는 꿈속에서조차 차헌을 괴롭혔다. 하지만 괜찮았다. 눈을 뜨면 현실에 연우가 존재하고 있으니까.

“…왜?”

그때 이야기는 죽어도 하기 싫은지 연우는 당장이라도 도망갈 듯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차헌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손에 잡히지도 않는 미련을 붙잡고 8년을 기다렸는데, 눈앞에 있는 연우를 두고 기다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내일 뭐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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