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참나.”
헛웃음을 흘린 라운드 길드장, 최여름은 제게 시선도 주지 않는 차헌을 쳐다봤다.
“폭주한 것 치고는 참 멀쩡하네요, 강차헌 에스퍼?”
삐딱하게 선 차헌은 뻔뻔한 얼굴로 최여름을 맞이한 다음 옆에 선 연우를 바라봤다. 그런 차헌을 외면한 연우가 한 걸음 나와 최여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 연우 너도 잘 지냈어? 네 옆에 선 사람한테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 줄래?”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라고 했잖습니까. 최여름 길드장이 그런 일로 허세를 부릴 줄 몰랐는데, 무리해서 온 겁니까?”
“아니, 그게 비상 버튼을 누르라는 말은 아니잖습니까, 강차헌 에스퍼.”
각인 상대가 없는 S급 에스퍼가 폭주를 일으켰을 때 세상에 끼칠 피해는 무시무시했다. 일반인들과 사이가 나빠지지 않도록, 무소속인 차헌을 보호하기 위해, 빚을 지어준 뒤 언젠가 보답받으려 비상 버튼을 설치하긴 했지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낼 줄은 몰랐다.
저번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지만, 이번엔 왜? 차헌도 연우도 멀쩡해 보이고, 우리 오빠 내놓으라며 너프건을 펑펑 쏘는 연화도 보이지 않았다. 심어놓은 귀에 의하면 둘 다 감금당한 상태도 아니었다. 게이트에 휘말린 이후 감기에 걸려 요양 중인 연우와 달리 차헌은 멀쩡한 얼굴로 센터 사람들과 어울리는 중이랬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한숨을 쉰 최여름은 차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빙결계 에스퍼가 아쉽긴 했지만, 그렇다고 라운드 길드장이 되어 이제 막 각성한 에스퍼에게 휘둘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간 순간 연우가 슬그머니 둘 사이에 섰다. 싸우지 말라는 듯 늘어트린 눈썹에 최여름이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털었다. 실수로 연우가 휘말린다면 아마 자신이 죽을 때까지 연화가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차헌을 노려보던 최여름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연우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 또 사고가 났다며? 우리 연우 센터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소복소복 쌓여서 어쩌지?”
소복, 소복, 이라는 단어에 힘을 준 최여름은 연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쌓인 눈을 터는 듯한 행위에 연우는 눈을 깜박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도 빠르지. 어찌나 기특한지 탐이 날 정도였다. 조금만 가르친다면 금방 책략 팀의 수장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계산이 빠른 아이다. 연화와 함께 손잡고 들어와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는데.
“위약금은 내가 몸을 갈아서라도 벌 테니, 센터 말고 우리랑 계약하는 게 어때?”
“죄송해요.”
망설임 없는 대답에 최여름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몇 개월 전, 다른 곳도 아니고 센터와 계약했다는 소식에 최여름은 한달음에 연우에게 달려가 호통을 쳤었다. 그때 연우는 국가 소속인 센터에 몸을 담고 있어야 제 동생이 안전하다며 또박또박 대답했었다. 어째 그때와 대답이 변하지를 않았다.
“형 위약금이 얼만데요?”
“음. 내가 지금 에스퍼로 각성한 지가… 삼십 년이 넘었지? 연우 위약금 내려면 라운드 길드를 세웠을 때부터 지금까지 개처럼 일한 거 다 쏟아부어야 할걸.”
최여름의 말에 차헌이 미간을 구기며 연우를 내려봤다. 진짜냐는 물음에 연우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월급 자체는 적었지만, 계약 위반 조항에 따른 위약금이 남들의 수백 배였다.
“그 정도 금액이 아니었다면 연우는 벌써 납치당했을걸?”
연화의 예지 덕분에 시도로 끝났지만. 아직도 분수를 모르는 것들은 연화가 어리다는 이유로, 보호자가 C급이라는 이유로 서슴지 않고 손을 뻗어왔다.
최여름은 연화의 명으로 벌써 몇 번째 그 손을 분질러버렸다. 그냥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연우를 영업할 걸 그랬다. 지금이라도…. 혹시 몰라 챙겨온 아공간 보따리를 쳐다보던 순간, 섬찟한 마나가 느껴졌다.
연우의 옆에 바짝 붙은 차헌이 이쪽을 향해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순순히 두 손을 들어 올린 최여름이 차헌을 길게 훑어내렸다. 차헌이 연우를 의지한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건 의지 정도가 아니라…. 최여름은 흥미를 숨기지 못한 채 둘을 보다 차헌에게 물었다.
“그래서, 날 부른 용건이?”
“협회 등록.”
그 말에 최여름이 반색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조건은 그때 말한 그대로? 아니면 더 조율할 수 있긴 한데, 자세한 얘기는 길드로 가서.”
“누가 그쪽이랑 계약한다고 했습니까? 등록할 때 동행 부탁하려고 부른 겁니다.”
덧붙인 설명에 최여름의 헛웃음을 흘렸다. 라운드 길드와 계약하는 것도 아니면서 보호자가 되어달라고? 그것도 저런 태도로? 부탁 아닌 부탁을 한 차헌이 연우에게 들러붙자, 연우는 차헌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한 걸음 멀어졌다.
어디선가 개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둘을 지켜보고 있던 최여름이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태도로 손을 흔들었다. 귀엽다고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길드에 들어올 생각도 없는 차헌과 어울려줄 시간은 없었다.
“도와준다더니, 입만 턴 겁니까?”
“입만 턴다니.”
기가 막혀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분명 도와준다고 약속은 했, 지만…? 순간적으로 스치는 기억에 최여름이 이마를 짚었다. 삐딱하게 선 차헌은 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차림이었지만, 그 위로 검은 제복을 입은 모습이 겹쳤다 사라졌었다.
방금 그건 뭐지? 인상을 쓰며 차헌을 쳐다보자, 차헌도 있는 대로 눈썹을 찌푸린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건방진 것이. 끓어오르는 호승심에 어금니를 악문 최여름이 기운을 끌어올려 차헌을 노려보았다.
그때,
“우와.”
차헌이 뻑뻑뻑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박수를 쳤다. 박수? 힘겨루기를 예상하고 있던 최여름이 삐끗거리자, 발아래 땅이 쩌어억 갈라졌다. 얼음벽을 세우며 연우의 앞을 막아선 차헌이 최여름을 향해 삿대질했다.
“지금 형 앞에서 이능을 쓴 거예요? 치료계도, 가이드도 없는 이곳에서?”
“아니.”
“와, 한연화 에스퍼한테 다 말해.”
“허.”
연우도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차헌을 바라보았다. 그런 시선에도 최여름을 비난하는 차헌의 얼굴은 뻔뻔하기만 했다. 그것도 모자라 연우에게 얼른 동생을 부르라며 목걸이 쪽으로 손짓하고 있었다.
최여름은 설마, 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뒤쪽을 힐끔거렸다. 연우가 사사로운 일로 연화를 부를 리는 없겠지만, 이 광경을 연화가 봤을까 봐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한숨을 쉰 최여름은 강차헌을 향해 손짓했다.
“협회에 동행까지는 해드릴 수 있지만, 저희와 계약하지 않는 이상 보호자까지는 무리라는 건 알죠?”
“본격적으로 활동할 생각은 없으니 에스퍼증만 받으면 됩니다. 타워에 가야 할 일 있어서.”
“타워?”
이제 막 각성한 에스퍼가 타워에는 왜? 최여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지만, 차헌은 질문을 듣지 못했다는 듯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는 것에 집중했다. 결국엔 증명사진 2장과 사관학교 졸업장, 차헌의 피를 담은 병을 챙긴 최여름이 못마땅한 얼굴로 차헌의 어깨를 짚었다.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게 있으니까 해주는 거지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때는 좀 더 공손해야 할 겁니다. 강차헌 에스퍼.”
차헌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남한테 부탁할 일 따위는 없을 거라는 태도에 잠시 울컥했지만, 센터장을 포함한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치이는 게 안돼 보여 도와주겠다고 먼저 말을 꺼낸 게 자신이었다.
떫은 표정을 지은 최여름이 잠시만 기다리라며 워프 아이템을 사용했다. 기척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던 연우는 혀를 깨물며 차헌을 올려봤다.
“그냥 부탁해도 들어주실 분인데….”
“그건 형이니까요. 부탁 하나 들어주고 사람 등골을 뽑아먹는 게 저 꼰대였어요.”
얼마나 지독했는지 아냐며 진저리를 친 차헌이 연우에게 몸을 기대왔다. 그런 차헌의 어깨를 밀어낸 연우가 두 걸음 뒤로 공간을 접었다. 지지대가 사라지자 비틀거리던 차헌이 연우를 찾았다.
“아, 어제는 실수였어요. 진짜.”
실수라는 게 더 문제다. 연우는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운 채 차헌을 노려봤다.
어젯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차헌은 언제나처럼 연우에게 몸을 기대며 안겨 왔었다. 또 악몽을 꿀까 봐 두렵다며 칭얼거리기까지 했다. 그런 차헌을 침대에 눕혀주고 난 뒤, 연우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어떻게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확신했냐고.
“확신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졸린지 작게 하품하던 차헌이 연우의 손가락을 벌리며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뭐, 내가 형을 자주 생각하니까 꿈에 형이 나온 줄 알았는데, 꿈이 조금씩 선명해질수록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졸음에 취해 웅얼거리던 차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형은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나는 그걸 지켜보고만 있어요. 말이 돼요, 그게? 생각할수록 빡이 차오른다며 차헌이 욕을 씹어뱉었다. 그러더니 작게 한숨을 쉬며 연우를 올려봤다.
“형은요? 형은 언제 확신했어요?”
차헌의 질문에 연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런 미친 새끼. 자신을 향해 욕설을 퍼부은 차헌은 팔을 뻗어 연우를 끌어안았다. 그때의 기억은 생각하지 말자는 듯 등을 도닥였다. 잠시 몸을 맡기고 있던 연우가 고개를 들어 차헌과 시선을 맞췄다.
“다른 건 기억나는 거 없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얼굴에서 다 티가 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생 생각하는 건 여전하구나. 한숨을 삼킨 차헌이 눈을 감았다. 릴레이를 하듯 꿈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시작점은 항상 같았다.
감았던 눈을 떠 연우의 존재를 확인한 차헌이 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차헌은 연속적으로 떠오르는 끔찍한 장면을 잊고자 연우와 눈을 맞췄다.
“정확하게 기억나는 건 형이 제 혀를 빨던 기억뿐이에요.”
“뭐?”
차헌은 연우의 관심이 조금이라도 제 쪽을 향하길 바라며 던진 말이었지만, 연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히려 무슨 기억인지 곱씹어보지도 않은 채 다른 기억은 안 나냐며 조용히 채근할 뿐이었다.
내 첫 키스를 그렇게 뺏어가 놓고! 누구는 그때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는데.
“기억 안 난다니까요. 형은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그때는 안 이랬잖아요.”
차헌은 전보다 조금 더 농밀해진 가이딩을 느끼며 맞잡은 손을 힐끔거렸다. 가이딩은 오른손보다 왼손에서 더욱 폭발적으로 느껴졌다. 차헌이 눈을 가늘게 뜨며 팔찌를 노려보자 연우가 슬그머니 이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과거로 돌아온 거랑 연관이 있지 않을까?”
너는 그런 거 없냐는 질문에 차헌은 멍하니 손바닥을 내려봤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확신과 몇몇 기억 말고는 대부분 희미한 기억이라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이 없었다.
“저도 해볼까요? 아프면 말해요.”
차헌은 혹시 저도 가이딩의 능력이 생겼나 궁금해하며 연우에게 마나를 밀어 넣었다. 예전처럼 아프다고 괴로워할까 봐 아주 조금씩, 조금씩 솜사탕을 떼어 물에 녹이는 감각으로 건네자 연우가 잘 모르겠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잘 조절을 못 하는 걸 수도 있으니, 그래서 혹시 몰라 손등에 입을 내린 것뿐이다. 접촉보다 점막 가이딩이 효과가 있다고 하니까. 사적인 감정을 아예 배제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렇게 사람을 변태 취급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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