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아닙니다.”
협회와 약속을 잡고 왔다며 등장한 최여름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둘을 관찰했다. 한 시간 뒤 센터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음에도 최여름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둘을 관찰했다. 진득한 시선에 연우를 제품에 밀어 넣은 차헌이 먼저 걸음을 돌려 숙소로 향했다. 현관을 열자마자 연우의 옷을 붙잡은 차헌이 눈치를 봤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연우가 신발을 벗은 다음 혹시 몰라 챙겨놨던 보조 가방을 내려놓으며 차헌과 눈을 맞췄다. 따지고 보면 차헌이 실수한 건 없었다. 문제는 연우에게 있었다. 연우는 가이드가 아니라 에스퍼였다. 차헌이 누구에게 가이딩을 받았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했던 행동 그대로 연우에게 한다는 게 좀 불쾌했다.
손등에 입술을 내리는 행위가 어쩌나 자연스러웠던지, 평소 차헌이 어떤 식으로 가이딩을 받았는지 쉽게 상상해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리 나에게 가이딩이 느껴진다지만, 에스퍼인 나를 가이드와 똑같이 대하면 안 되는 거지. 연우는 차헌의 입술이 닿은 손등을 거칠게 문지르다 한숨을 쉬었다.
“됐어, 실수라며.”
“아니, 형이 진짜 그렇게 기분 나빠할 줄 몰랐어요. 그냥 저는 저도 형도 둘 다 같이 과거로 돌아왔는데 형만 그런 능력이 생겼다는 게 좀 이상하잖아요. 형도 상관이 있는지 궁금해했고. 그래서 형도 나한테 가이딩이 느껴지나 싶어서 확인해본 건데, 그… 입 문지른 건 미안해요.”
그 말에 눈을 깜박이던 연우는 드래곤을 내려보았다. 쟤도 가이딩 할 수 있어? 그러자 드래곤이 헛기침하며 말을 피했다. 못한다는 건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연우는 신발도 벗지 못하고 눈썹을 늘어트리고 있는 차헌을 올려보았다. 그렇냐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연우는 차헌의 신발 끈을 풀어주며 물었다.
“나를 다른 가이드랑 착각한 거 아니야? 그래서 실수라고 한 거고.”
그 말에 차헌이 아주 잠깐 입술을 끌어올렸다가 그게 무슨 소리냐며 성큼성큼 들어왔다.
“신발.”
“아니, 형은 이 상황에 신발이!”
아니, 아니만 중얼거리던 차헌이 얼른 신발을 벗고 연우의 앞으로 뛰어왔다.
“형 말고 다른 사람한테 가이딩 받은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나는 다 형이 처음인데, 어떻게 그런 오해를 해요!”
차헌이 억울하다면서 눈썹을 있는 대로 치켜올리더니, 갑자기 속이 탄다며 입에 얼음을 밀어 넣다가 연우와 눈을 맞췄다.
“…엉은요?”
형은요, 라는 뜻인가? 연우가 질문을 유추해보는 동안, 차헌은 왜 답이 없냐며 펄펄 뛰기 시작했다.
얘가 누구를 놀리나, 팀 가이드인 조희서가 자신을 어떤 취급하는지 봐왔으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조희서가 제게 제대로 된 가이딩을 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차헌은 각인의 흔적을 찾아 연우의 손바닥을 문질렀다.
“아니, 누가 C급이랑 각인해. 하면 네가 했겠지.”
“무슨, 말했잖아요. 가이딩 받은 적도 없다니까요?”
차헌이 당당하게 손바닥을 펼치자 손을 빤히 훑어보던 연우는 다시 시선을 돌려 차헌의 목덜미도 살폈다.
[흐응. 없어, 없어.]
드래곤에게 확인을 받아낸 연우가 모호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헌이 아무리 대단한 S급이라도, 가이딩 없이는 토벌이 조금 힘들 텐데. 그때도 가이딩을 거부하다가 많이 힘들어하지 않았나? 센터에 아무리 가이드가 부족하다지만, 차헌쯤 되면 페어 가이드는 물론이고 팀 가이드까지 붙여줬….
“아.”
연우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가이딩을 안 받은 게 아니라 못 받은 거다. 다 죽었으니까. 센터 내 유일한 S급 가이드는 이상원과 탈주하자마자 죽었던 걸로 기억한다. 마지막 A급인 도민영까지 죽었으니 센터에는 차헌을 담당할 만한 가이드가 남아있지 않았었겠지.
연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차헌과 눈을 맞췄다. 그 뒤로 어떤 삶을 살아갔을지 궁금했지만, 연우가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할까 봐 물어보기가 두려웠다.
“형.”
다가온 차헌이 조심스럽게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손에 이끌려 소파에 앉아있자, 차헌이 꿀차를 타왔다.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는 컵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뒤이어 차헌이 조심스럽게 연우의 어깨를 끌었다. 평소와 달리 체중을 실어 기대는 게 아니라, 제게 의지하라는 듯 연우의 어깨를 조심스레 안았다.
“우리 둘이 할 얘기가 많은 것 같긴 한데, 일단 그건 뒤로 미뤄요. 오늘 주말이잖아요. 하고 싶은 거 없어요?”
소파에 앉는 순간부터 연화가 쓴 검푸른색 책과 손목에 매달려있는 드래곤을 어떻게 숨겨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연우는 마지막 말에 눈을 깜박거렸다.
“하고 싶은 일?”
연우가 되묻자 차헌은 손에 힘을 줘 연우를 눕게 만들었다. 차헌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댄 연우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일은 몰랐지만 해야 할 일은 머릿속에 가득했다. 아직 리스트의 반도 처리하지 못했고, 연화와도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점점 몸집을 키워가는 드래곤이 머물 곳도 찾아봐야 했고, 팀이 찢어졌으니 앞으로 어떻게 활동해야 할지도 생각해둬야 했다.
할 일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자 차헌의 손이 연우의 눈을 덮었다.
“형 게임 하는 거 좋아하잖아요. 게임 하러 갈래요?”
“게임? …어디로?”
“타워예요. 정식으로 에스퍼증 받고 나면 어디 놀러 가도 좋고.”
태연한 차헌의 목소리에 연우의 속눈썹이 바삐 움직였다.
“아니면, 제일 하고 싶었던 건 뭐예요? 버킷 리스트 같은 건 없어요?”
“제일…?”
차헌의 질문에 연우는 눈썹을 찌푸리며 익숙한 두통을 몰아냈다. 제일 하고 싶었던 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 순간 머뭇거리게 됐다. 그러나 이내 조용히 대답했다.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연우의 말에 차헌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며 동의했다. 차헌 또한 제가 원해 에스퍼가 된 게 아니었다. 누구보다 간절한 마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각성해버린 차헌은 언제 어디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억울해 죽겠는데 세상이 각성자를 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마음껏 외출할 수도 없어, 소속된 단체에서 죽을 때까지 갇혀 지내야 했다.
“그럼 뭐, 일단 영화라도 볼래요?”
“뭐?”
“타워에 영화관 있잖아요.”
[나나나나 가고 싶어!!]
차헌의 권유에 응한 건 드래곤이었다. 연우는 호기심에 날뛰는 드래곤을 진정시키기 위해 뒷짐을 졌다.
“타워는 왜?”
“살 것도 있고, 팔아야 할 것도 있어서요. 에스퍼증 없으면 출입 못 하니까 이번 기회에 만든 거예요.”
차헌은 이제 슬슬 준비하자며 시계를 보다 킥킥 웃었다. 사관학교 졸업증 그거, 센터장이 안 주려고 지랄했는데 센터 내에서 게이트 터진 거 알려버린다고 협박했더니 순순히 내어줬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과거로 돌아오니까 그런 얼굴도 보고, 기분 좋네요. 연우는 일어나려는 차헌을 붙잡고 물었다.
“너는? 하고 싶은 거 없어?”
연우의 말에 차헌이 팔을 뻗어 아직도 김이 오르는 꿀차를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받아 든 연우는 손끝에 닿는 온기에 흠칫 몸을 물렸다. 천천히 컵을 식힌 차헌이 연우의 손을 끌어 컵을 붙잡게 했다.
“형이 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거요.”
그 드래곤 새끼 잡아 족치면 벗어나려나. 그 말에 연우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시간을 확인한 차헌이 그런 연우를 보고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고 일으켰다.
[연우야, 쟤 나 진짜 죽일 것 같아. 연우가 말려줄 거지?]
드래곤의 호들갑에, 차헌의 재촉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연우는 준비하고 나오라는 차헌을 붙잡고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왜요? 가기 싫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나 타워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어.”
* * *
“형. 여기요.”
차헌은 타워 앞에 서서 있는 대로 고개를 꺾고 있는 연우를 불렀다. 탁탁 뛰어와 옆에 선 연우가 여러 가지 감정이 공존한 얼굴로 차헌의 손을 붙잡았다. 조금 전, 에스퍼 등록을 위해 협회에 방문했을 때와의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최여름의 방문에 센터장은 어떻게 자기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협회와 약속을 잡았냐고 길길 뛰었고, 차헌은 무소속 에스퍼가 센터에 하나하나 허락을 받아야 하냐며 대꾸했다. 차헌이 센터와 계약을 안 할 것 같자, 센터장은 배웅하기 위해 나와 있던 연우에게 차헌과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연우는 당연히 센터로 들어올 것이고, 차헌은 그런 연우를 따라 돌아올 거라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짜증 나지만 사실이었다. 차헌은 연우와 함께 최여름의 차에 오르며 센터장을 돌아봤다.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원래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신중한 성격이라, 답답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센터장이었다. 이상원이 왜 죽었는지 이유를 밝혀내라며 청하 길드장이 달려들었을 때 차헌을 지켜준 것도 센터장이었다. 저렇게 초조한 티를 내던 사람이 아니었던지라 차헌은 시야에 센터장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를 지켜보았다.
협회에 도착했을 때였다. 문을 열어주던 최여름은 연우에게 따라 나오지 말라며 손짓했고, 연우 역시 내릴 생각이 없다는 듯 차 문에 몸을 딱 붙이고 있었다. 왜 그러냐는 차헌에게 연우는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센터의 직원보다 협회의 직원들이 더욱더 미친놈들이라고.
그 말에 차헌은 망설임 없이 문을 닫고 협회로 향했다. 센터장이 그렇게 어렵다 복잡하다 강조하던 에스퍼 등록 과정은 생각보다 너무 간단해서 허무할 지경이었다. 소속을 정하는 단계에서 최여름은 차헌의 펜을 잡고 능글맞게 웃었다.
“그냥 우리랑 하죠? 내가 한연우 에스퍼 빼 와줄 수도 있는데?”
사람을 무슨 선물 취급하는 최여름에게서 펜을 빼앗은 차헌이 소속란에 무소속. 이라고 적어 넣었다. 뒤이어 미성년자로서 에스퍼 활동을 할 것이냐는 질문란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미성년자라니, 12년 전으로 돌아왔다는 게 새삼 믿기지 않아 여러 번 읽고 난 뒤에야 서류를 제출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얻은 에스퍼증으로 차헌은 타워에 들어왔지만 심드렁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제 느껴도 불쾌한 기시감이었다. 익숙해지려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팔꿈치에 온기가 닿았다.
차헌의 셔츠를 쥔 연우가 입을 살짝 벌린 채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지하에 갇혀 지내느라 투명할 정도로 희기만 하던 피부에 발그레한 홍조가 물들어있었다.
“뭐부터 할 거야?”
차헌은 가만두지 못하고 동당거리는 연우의 발을 보다가 카드 기능이 포함된 에스퍼증을 들어 올렸다.
“돈지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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