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아직 활동도 시작하지 않은 에스퍼가 돈이 어디 있어서 돈지랄하냐는 연우의 물음에 차헌이 타워의 2층으로 이동했다. 자신을 환영하는 직원들의 인사에도 차헌은 망설임 없이 거래소로 향했다. 유리 벽으로 장식된 거래소 진열대에는 저울이 크기와 용도별로 정리되어있었다. 차헌이 소파에 앉기도 전에 직원이 접대용 카트를 끌고 오며 인사를 건넸다.
“환영합니다, 강차헌 에스퍼님. 강차헌 에스퍼님의 거래를 담당할 한연성이라고 합니다. 오늘 거래할 마석이 어떤 물품인지 제가 미리 확인해봐도 괜찮으실까요?”
직원의 말에 차헌은 챙겨온 보조 가방의 지퍼를 열어 탈탈 털었다. 트레이 위로 우수수 쏟아지는 마석에 직원이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마석에 흠이 가지 않도록 서둘러 특수 장갑을 낀 직원이 탁자에 떨어진 마석을 조심조심 트레이로 옮겨 닮았다.
“감정을 위해 조금의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는 점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혹시 다른 도움은 필요 없으신가요?”
“아, 이건 경매로.”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트레이에 올라온 건 연우의 얼굴만 한 마석이었다. 스노우 웜에서 얻은 마석을 내려놓은 차헌은 최대한 빨리 부탁한다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심상찮은 크기에 직원이 매니저를 호출해오겠다며 빠져나갔다.
연우는 마석이 한가득 쌓여있는 트레이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건 동굴 벌레 마석, 이건 희야루 나방 마석, 이건 파라 버드 마석, 하나하나 구분하고 있자 차헌이 연우의 허리를 당겼다.
“여기서 뭐 보고 싶은 거 있어요?”
화면에 떠오른 건 영화 예매 창이었다. 차헌은 두 남녀가 등을 맞대고 총을 쏘는 포스터와 귀여운 공룡들이 힘차게 뛰어오르고 있는 포스터가 현재 예매 1, 2위를 다투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아. 이건 시간대가 안 맞네. 바로 볼 수 있는 건 이건데, 이거 볼래요?”
여자가 양 볼에 손을 올려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포스터였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차헌이 좌석표를 보여줬다. 연우는 조금 멍청해진 기분으로 차헌이 고르는 자리를 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나초도 추가할래요?”
“마음대로 해.”
“형은 콜라 먹어요? 하나만 할까요?”
“나는 그냥 물 마실래.”
연우는 차헌을 뒤로하고 마석을 크기 별로 정리했다. 연우에게 반쯤 기댄 차헌이 예매를 마쳤을 때, 직원이 매니저와 함께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강차헌 에스퍼님. 오늘 거래를 맡게 될 강송화입니다. 경매를 원하시는 마석이, 아이고, 이렇게 큰 마석은 오랜만에 보내요. 하하하. 확인을 위한 간단한 절차 이후 경매가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지켜보고 가실 건가요?”
“아뇨. 바로 입금해주세요.”
직원은 간단한 절차 안내를 마치고 마석의 무게를 재기 시작했다. 연우는 손톱보다 조금 큰 동굴 벌레의 마석이 개당 사십만 원에 거래되는 모습을 지켜보다 드래곤을 내려봤다. 그동안 이 녀석이 먹은 마석이 얼만지 계산하기도 무서웠다. 못해도 안전 구역의 아파트 세 채는 먹어 치웠을 것이다.
“한연우 에스퍼님은 거래하실 게 없으신가요?”
주전부리를 챙겨오던 직원의 물음에 연우는 가방 가득 쌓여있는 부산물 중에 파라 버드의 꽁지깃을 꺼냈다. 차헌이 언제 챙겨왔냐며 주위를 기웃거리는 동안 연우는 직원의 말을 기다렸다.
“보관 상태가 조금 아쉽긴 한데, 이 정도라면 한 가닥에 8만 원씩에 거래할 수 있으십니다.”
차헌은 에게, 라는 탄식 섞인 소리를 내었지만, 연우는 티 나지 않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얼마 전 배재영 무리의 창고를 털면서 수천 가닥을 획득한 상태였다. 잠시 계산기를 두들겨보던 연우는 일단 열 가닥만 꺼내놓았다.
[더 안 팔고?]
나는 S급이 아니잖아. 어디서 그만큼 사냥했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으니까 조금씩 거래해야지.
가방 안쪽에 들어있는 다른 부산물도 어떻게 팔아넘길지 고민하는 동안 차헌과 연우의 에스퍼증에 거래된 돈이 입금되었다. 안녕히 가시라며 허리 깊숙이 숙인 채 인사하는 직원을 뒤로하고, 차헌은 연우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척척척 걸어갔다.
“어서 오세요!”
차헌은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연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진열된 아이템을 살폈다. 눈으로 상품의 상태를 확인하면서도 연우가 물어보는 말에 꼬박꼬박 답했다.
생활계 에스퍼들이 만든 아이템을 파는 곳이고, 층수가 많을수록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판매한다고. 던전에서 획득한 물건을 사고, 팔기도 하는데 그건 주로 경매로 이루어진다고 답하며 차헌이 아까부터 눈여겨봤던 암녹색 피어싱을 가리켰다.
“이거 냉기 저항 붙어있는 거 맞죠?”
“이거 말씀하세요? 냉기 저항은 완벽하고 옵션이 좀 낮긴 하지만 발열 기능도 약하게 붙어있답니다. 말고는 이런 것도 있는데, 이건 어떠세요?”
“화염 저항 붙은 건 없어요?”
연우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차헌이 보고 있는 아이템의 가격표를 응시했다. 에스퍼의 시력은 누구보다 뛰어나니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손톱보다 작은 피어싱이 연우의 5년 치 연봉보다 비쌌다.
연우는 고개를 빼고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연우의 가방 안에는 수십억가량의 부산물이 있었으나, 거래처가 없는 지금은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7층이니, 좀 더 낮은 등급은 아래층에 있겠지. 차헌의 거래가 끝나면 아래층도 구경하러 가봐야겠다.
“형, 잠시만요.”
연우를 거울 앞으로 이끈 차헌이 양쪽 귓불에 각각 암녹색 피어싱, 노란빛 피어싱을 올려두었다. 왼쪽은 냉기 저항, 오른쪽은 화염 저항이라며 짧게 설명한 차헌이 직원이 갖고 오는 다른 피어싱도 연우의 귓바퀴에 배치했다.
“아니, 잠시만. 내 거야?”
“당연하죠? 저한테 냉기 저항 아이템이 왜 필요해요?”
그 말에 연우는 손을 오목하게 모아 두 귀를 막으며 물러섰다. 차헌의 양손에 들린 저 두 개만 합쳐도 연우의 십 년 치 연봉이었다.
“음. 피어싱이 불편하시면 다른 외형으로 변경시켜드릴까요?”
연우가 귀를 뚫는 것을 무서워하는 거라고 오해한 직원이 적극적으로 영업에 나섰다. 직원은 분실 위험이 제일 적은 게 피어싱이지만 팔찌나 목걸이로 변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팔찌형은 이미 있으시니, 반지도 괜찮으실 것 같은데, 한번 착용이나 해보세요.”
직원의 권유에도 연우는 꼼짝하지 않고 차헌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왜 내 거를 사? 나는 필요 없어.”
“필요 없기는. 형 아직도 콧소리 나는 거 알아요?”
차헌의 지적에 연우는 저도 모르게 코를 훌쩍였다. 저러면서 무슨 필요가 없다고. 차헌이 혀를 찬 뒤 연우를 끌어와 해독, 해주 세트 아이템을 보여주었다.
“나 해독 아이템은 필요 없어.”
“왜요?”
“나는 가이딩 대신 포션을 쓰잖아. 포션도 따지고 보면 던전 부산물로 만들어진 거라 해독 아이템 썼다간 효과 절반도 못 봐.”
“S급 포션 쓰면 효과 절반만 봐도 괜찮을걸요.”
“내가 S급 포션을 왜 써?”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말에 계산을 부탁하던 차헌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럼 그 맛대가리도 없는 포션을 계속 먹을 생각이었어요?”
연우는 혀뿌리를 마비시키는 맛을 떠올렸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며 차헌이 씩 웃더니 종이 가방을 받으며 연우를 재촉했다.
도착한 곳은 백두 길드가 운영하는 약방이었다. 차헌을 알아본 직원은 길드장님이 챙겨주라 특별히 지시했다며 사지도 않은 포션을 안겨주었다. 차헌은 돈을 아끼게 되었다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옷 가게였다.
“여긴 왜?”
“형 옷 사야죠.”
“내 옷?”
연우는 고개를 숙여 옷차림을 살폈다. 회색 후드에 청바지. 차헌이 구해다 준 옷이었다. 이 옷 말고도 집에 가면 옷이 있는데 뭐 하러 옷을 사지? 뒤늦게 말려봤지만 차헌은 냉기 저항이 붙은 옷을 들고 와 연우의 몸에 대보기 바빴다.
“이거면 충분하다니까.”
“이것까지만 해요.”
차헌은 기어코 제게 푹신한 양털 담요를 안겨주고는 다른 것도 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사이 다른 것도 들고 올까 봐 연우는 서둘러 계산대로 향했다. 에스퍼증을 꺼내는데 계산해주던 직원이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이미 계산하셨어요.”
연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포장된 카디건과 담요를 건네받았다. 차헌의 뒤통수를 잠시 노려보던 연우는 따로 챙겨둔 반장갑을 계산했다. 포장된 반장갑을 담요 사이에 잘 챙겨 넣은 연우가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러자 일체형 목도리 모자를 보고 있던 차헌이 호다닥 따라 나왔다.
“영화 시간 아직 남았는데, 왜요?”
연우는 나온 김에 저 가게도 보러 가자는 차헌을 다급히 붙잡았다. 돈지랄하겠다더니 차헌이 사는 것은 하나같이 다 연우를 위한 물건이었다.
어떻게 차헌을 멈출 수 있을까, 고민하던 연우가 코를 훌쩍였다.
“나 솔직히 사람 많은 곳 불편해.”
그 말에 차헌은 타워를 걸어 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인파와 연우를 구분하듯 차헌이 팔을 뻗어 급하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차헌을 데리고 구석으로 향한 연우는 괜찮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좀 덜해졌지만, 어렸을 때는 이능을 다루는 게 많이 서툴렀거든. 밥 먹다가 숟가락이 없어진 적도 있고, 갑자기 물건이 없어져서 도둑으로 몰린 적도 많아. 나랑 스쳐 지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적도 여러 번 있었고.”
연우가 조곤조곤 설명하며 차헌이 들고 있는 종이 가방을 눈짓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비싼 거 사주지 마.”
“잃어버릴까 봐요?”
그렇다고 답하자 차헌이 연우와 눈을 맞추며 작게 웃었다. 팔을 벌린 차헌이 습관처럼 체중을 실으며 안겨 왔다.
“잃어버리면 뭐 어때요, 다시 사면 되는 건데.”
“그래서 돈지랄이라고 한 거야?”
“네.”
단호하게 대답한 차헌은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
“잃어버릴 걸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제가 사준 걸 소중하게 여길 거라는 말이잖아요. 안 버리고, 어디 안 팔고.”
안 그래도 되는데. 자신이 안기는 바람에 헝클어진 연우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준 차헌이 귓가에 속삭였다.
“형, 이건 시작에 불과해요. 나중에는 오늘 뭘 받았는지 기억도 안 날걸요.”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