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형.”
차헌은 자신의 허리 부분을 잡은 연우를 불렀다. 영화관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던 연우는 어색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수 하나를 작살내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은 간질간질한 기분에 차헌은 손을 뻗어 연우와 깍지를 꼈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연우가 자연스럽게 깍지를 마주 끼자 차헌은 반대쪽 손으로 입을 가리며 히죽거렸다. 버릇처럼 연우의 손등을 살살 문지른 차헌이 영화관 옆에 붙어있는 게임장으로 향했다.
“시간 좀 남았는데, 하고 갈래요? 아니면 가서 기다릴래요?”
연우는 뭘 물어보냐는 듯이 게임장으로 성큼 들어가려다 쭈뼛거리며 차헌을 쳐다봤다.
“같이 할거지?”
차헌은 대답 대신 조금씩 몸을 붙여오는 연우의 어깨를 끌어안고 게임장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데이트… 같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풀리려는 눈을 부릅뜨며 연우가 고른 사격 게임기 앞에 섰다. 분홍색 총과 파란색 총을 나눠 든 둘은 날아오는 접시를 향해 스코프를 겨냥했다. 연달아 탕탕탕, 맞추는 분홍색 총과 달리 파란색 총은 접시보다는 허공에 총알을 날리고 있었다. 총알을 낭비하던 연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점수표를 바라봤다.
“형 진짜 사격은 못 하네요.”
“말했잖아.”
입을 삐죽인 연우는 고개를 틀어 시간을 확인했다.
“들어갈 시간 아니야?”
“아직 십오 분 넘게 남았어요. 다른 건 뭐 할래요?”
“그럼 저거.”
연우가 고른 건 손바닥을 아작내기로 유명한 달리기 게임이었다. 호기심 넘치는 얼굴로 버튼을 꾹꾹 눌러보던 연우가 자리를 잡자, 차헌이 그 옆에 앉더니 시작하기 전부터 동전을 쌓아 올렸다.
“이만큼 할 시간 있어?”
“이것도 부족할 거예요.”
차헌의 예지처럼 쌓아 올린 동전은 금세 동이 났다. 연우는 마지막 동전을 밀어 넣으며 버튼을 두들겼다. 연우와 함께 열심히 버튼을 연타해 달리던 차헌이 도망가는 보스의 뒤꽁무니에 대포를 발사했다. 대포에 맞은 보스가 열심히 달려 도망치고, 플레이어는 열심히 버튼을 연타해 도망가는 보스를 따라잡는 아주 단순한 게임이었다.
그런데도 연우가 약이 올라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건, 보스가 궁둥이를 실룩거리며 연우를 농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밍을 잘못 맞춰 넘어지자, 보스가 연우의 캐릭터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런 보스를 삿대질하던 연우가 급히 제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잡히는 동전이 없었다. 차헌은 주머니를 이곳저곳 뒤지는 연우에게 몸을 기울였다.
“형, 나 오른쪽 주머니에 동전 더 있어요.”
버튼을 연타하고 있던 차헌의 말에 연우는 보스가 도망갈까 급히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동전을 집기 위해 손을 오므리다가 그대로 굳었다.
대포를 날려 보스를 공격하던 차헌도 마찬가지였다. 연우는 손끝을 잘라내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누르며 천천히 손을 물렸다. 그 순간 쿠쾅! 하는 소리와 함께 보스의 공격을 맞은 차헌의 캐릭터가 멀리 날아갔다.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하는 물음에 차헌은 아무렇게나 버튼을 연타해 숫자를 줄여버린 뒤 일어나려 했다. 잠시 움찔하던 차헌은 다시 어정쩡하게 주저앉았다.
“형. 가서 다른 게임 좀 하고 있어요.”
왼쪽 주머니에서 꺼내주는 돈을 받자, 차헌이 그대로 게임기 위로 엎어졌다.
…시간이 필요하려나?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한 연우는 눈에 익은 땅따먹기 게임기 앞에 앉았다. 차헌의 등을 힐끔거리며 신경 쓰는 것도 잠시, 연우는 곧 게임에 빠져들었다.
띠로롱, 소리를 내며 레벨 업한 로봇의 몸체에 총이 생겼다. 연우는 왼손으로는 스틱을 움직여 땅을 가로 달렸고, 오른손으로는 버튼을 빠르게 연타하며 달려드는 우주 마수를 해치웠다.
“다 했어요?”
띠로로!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로봇을 따라다니며 실드를 쳐주는 보조 로봇까지 생긴 상태였다.
“영화 시작할 시간이야?”
어렸을 때도, 사관학교 시절에서도, 엔딩을 본 적이 없는 게임이라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옆에 앉은 차헌이 동전을 집어넣었다.
“아직 시간 조금 남았어요.”
연우의 로봇과는 달리 매끈한 몸통인 차헌의 로봇은 귀퉁이를 조금씩 갉아먹으며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연우는 그런 차헌에게 제 영역을 나눠주며 레벨 업을 도와준 다음 두두둥, 소리를 내며 나타나는 보스를 노려봤다.
“그렇게 좋아요?”
차헌은 발끝으로 걷는 연우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까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저게 내가 열 살 때 처음 나온 게임이거든. 아무래도 동생을 데리고 오락실은 갈 수 없으니까 학교 끝나고 친구들이랑 잠깐잠깐 할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 재밌더라고. 그러고 각성하는 바람에 다시는 못하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누가 사관학교에 저걸 기증을 한 거야. 자유 시간마다 조금씩 했는데 보스를 볼 때까지 게임만 할 순 없으니까 도중에 포기했어야 했거든. 그런데 드디어 보스를 죽였으니 안 기쁘겠어?”
차헌이 활짝 웃는 연우를 내려보다 손을 불쑥 뻗었을 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팝콘을 쥐려는 연우에게 콜라를 건넨 차헌이 팝콘과 나초까지 챙겨 영화관으로 향했다.
“이거 보여주면 되는 거야?”
두 손이 꽉 찬 차헌 대신 그나마 손에 여유가 있던 연우가 영화표를 들어 올렸다. 귓가에 닿는 연우의 목소리에 나초 그릇이 구겨졌다. 차헌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나초를 팝콘 통에 쏟아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시 한번 사랑. A관으로 입장하시면 됩니다.”
직원의 안내에 연우는 상기된 얼굴로 A관으로 향했다. 좌석표를 확인한 연우가 차헌을 바라보며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사람이 많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는 달리 좌석은 띄엄띄엄 비어있었다.
광고가 나오는 동안 연우에게 나초를 권하던 차헌이 팔걸이 부분을 뒤로 넘기며 연우에게 몸을 기댔다. 연우는 차헌이 편히 기댈 수 있도록 몸을 기울인 다음 팝콘 통에서 캐러멜 팝콘을 골라내는 작업을 재개했다.
“너무 달아.”
캐러멜 팝콘은 죄다 제게 몰아주는 바람에 연우의 손끝에 달짝지근한 냄새가 배여 있었다. 군침이 돌아 마른침을 삼킨 차헌이 말없이 동의했다. 그리고 몸을 바르작거리며 연우를 내려봤다.
“왜?”
“…자세가 불편해서요.”
몸을 일으킨 차헌은 연우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연우는 그러든가, 하는 표정으로 차헌의 어깨에 몸을 기대왔다. 이대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심장 박동에 연우가 놀라 도망가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차헌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 차헌과 달리 연우는 계속해서 캐러멜 팝콘만 골라내고 있을 뿐이었다.
광고가 끝났는지 주위가 어두워졌다. 차헌은 마른침을 삼키며 연우의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봤다. 천천히 빛이 들어오자 차헌이 애써 연우에게서 시선을 떼어내 스크린을 응시했다.
시작부터 진한 스킨십이 시작되어 괜히 목이 바짝바짝 타 콜라로 입을 축였다. 옆을 힐끔 보니 연우는 눈을 반짝이며 화면을 보고 있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랑 뭘 하겠다고. 남은 손으로 마른세수하던 차헌은 심드렁한 눈으로 영화를 감상했다, 는 무슨 연우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화면이 빛날 때마다 연우의 연갈색 눈동자에 벅참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훈련장에서의 무미건조한 표정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차헌은 복잡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연우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때, 모든 공략이 끝난 다음 차헌은 한동안 방 안에서 꼼짝도 못 했다. 저 혼자만이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데, 이상원의 부모는 제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야겠다면서 하루도 쉬지 않고 차헌을 찾아왔었다.
‘이상원 에스퍼가 도주하는 바람에 몰살당했네요.’
시체에서 기억을 읽어낸 윤석현의 증언에도 그들은 아들의 개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배신자로 낙인찍혀야 했을 이상원은 차헌을 살리고 죽은 영웅으로 포장되었다. 한참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차헌은 뒤늦게 정정하며, 한연우라는 에스퍼가 있었다며 주장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날까지, 차헌은 연우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차헌이 제 아들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며 이상원의 부모가 어찌나 방해하던지. 아무것도 모르는 새파란 애송이가 지껄이는 헛소리를 믿고 싶냐길래, 센터장이 되면 제 말을 믿어줄까 싶어 센터장을 밀어내기까지 했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청하 길드의 눈치를 보다가 이상원이 좀 그런 면이 있었지… 라며 차헌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소문에 눈이 뒤집힌 이상원의 부모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헌을 죽이려 했다. 죽을 고비를 넘길 때마다 연우가 제 앞을 막아서 죽는 환상은 더욱 선명해졌다.
독을 삼키고, 믿었던 동료에게 칼에 찔리고, 마수의 뱃속에 삼켜질 때마다 연우는 손에 잡힐 듯 선명해졌다. 밀어내는 손을 붙잡고 왜 나를 살렸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뻐끔거리는 입에서는 아무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눈을 뜰 때마다 후회가 몰아쳤다. 후회로 잠식된 몸은 헛된 망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무사히 빠져나왔다면 지금쯤 그 사람과 자신은 어떤 사이가 되었을까. 아마도 같은 팀이 되지 않았을까? 무슨 사이든 상관없었다. 연우가 하자는 대로 따를 것이다. 아니, 저를 연우의 손에 쥐여줄 것이다.
천천히 눈을 뜬 차헌이 8년간의 그리움을 담아 연우를 내려보았다. 그 순간 어디선가 왁! 하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얼음창을 쥔 차헌이 연우의 어깨를 끌어안자마자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저게 뭐야.”
이거 로맨스 코미디 아녔어? 스크린 속 남자는 녹아내리는 얼굴을 쥐며 여자의 이름을 애달프게 부르고 있었다. 볼을 감싸 쥔 여자가 악, 악, 비명을 지르며 남자에게 수건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수건을 주워 떨어지는 살점을 수습해보던 남자가 수건을 툭, 툭, 떨어트리더니 갑자기 와악! 달려들었다.
차헌도 흠칫 놀란 순간, 연우가 차헌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몸이 뒤로 벌렁 넘어갔다. 차헌은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가 눈만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화관은 어디 가고,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리된 방이 보였다. 등 뒤로 느껴지는 건 푹신한 감촉이었다. 침대? 침대야, 이거?
“형?”
차헌에게 반쯤 안긴 채로 눈을 꾹 감고 있던 연우가 헉, 하는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차헌은 아직도 겁에 질려있는 연우를 제 위로 끌어올린 뒤 등을 도닥이며 물었다.
“혹시 여기 형 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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