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형, 이거 어디 버려요?”
“거기 위에 두면 내가 알아서 치울게.”
연우는 청소기를 갖고 오겠다는 핑계로 구석에 숨어 달아오른 귀를 문질렀다. 창피했다. 배우가 뭐로 분장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쪽은 정신계 마수인 네크로멘서를 상대해본 적도 있는 에스퍼였다.
살이 녹아내리는 광경을 수도 없이 봐왔는데 가로 18m, 세로 9m짜리 화면에서 송출되는 광경에 겁을 먹고 도망쳤다는 게 너무 창피했다. 눈을 질끈 감은 연우는 벽에 이마를 대고 심호흡했다. 익숙한 공간이 주는 안락함에 솟구친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이거 형이에요?”
진정하고 청소기를 끌고 나오자 장식장을 보고 있던 차헌이 손짓했다. 익숙한 공간 속, 유일하게 이질적인 존재로 있는 차헌은 조금의 위화감도 없이 집에 스며들어 있었다. 벽에 편히 기대 사진을 내려보고 있는 게 제집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연우는 침대 위를 굴러다니고 있는 팝콘 통을 세우며 차헌이 들고 있는 액자를 쳐다봤다. 여섯 살쯤인가, 가족끼리 여행 갔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어린 연우는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한 손으로 꼭 누른 채 있었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연화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아련한 그리움이 몰려와 옅게 웃고 있자, 차헌이 손을 뻗어 연우의 볼을 건드렸다.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린 연우에 차헌이 액자를 껴안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형 찡그릴 때 어릴 때랑 똑같아요.”
그러냐, 대답한 연우가 팝콘 통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혹시나 하고 연화가 남긴 메모가 있나 살펴봤지만, 늘 놓여있던 과일도 없었고 목걸이를 통한 연락도 없었다.
[그거 버릴 거 아니지?]
공간을 이동하며 내용물이 조금 쏟아졌긴 했지만, 통 안에는 많은 양의 팝콘이 남아 있었다. 챙겨달라는 드래곤의 부탁에 연우가 찜찜한 얼굴로 팝콘 통을 갈무리했다. 먹다 남은 거 말고 새로 한 통 사주려고 했는데.
아쉬운 얼굴로 팝콘 통을 쳐다보던 연우가 침대 위로 쏟아진 팝콘을 정리했다. 장식장 위의 액자들을 구경하던 차헌도 침대 위에 올라와 팝콘을 줍고 있었다.
“형, 나 좀 웃어도 돼요?”
“웃지 말라면 안 웃을 거고?”
내내 표정이 이상하다 싶더니만 차헌이 결국 옆으로 쓰러져 웃음을 터트렸다. 원룸을 울리는 웃음소리에도 연우는 말없이 팝콘을 정리했다. 그리고 차헌을 사나운 손길로 옆으로 밀어냈다.
“아, 아, 왜요?”
“이불 빨 거야. 비켜.”
구물구물 비켜나던 차헌이 손을 뻗어 연우의 목덜미를 건드렸다. 연우가 고개를 숙이자 차헌은 불쑥 후드티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팝콘이요.”
차헌의 손가락에는 팝콘 하나가 들려 있었다. 연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옷을 정리했지만, 차헌은 아니었다. 연우의 후드티를 당기는 그 짧은 순간 드러난 목덜미에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달아오른 볼을 감춘 차헌은 몸을 굴려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았다.
“나 때문에 영화 끝까지 못 봐서 어떡해.”
“다른 거 보면 되죠, 뭐. 오늘 나온 예고편 중에 보고 싶은 거 있었어요?”
다음에 또 타워에 가자는 말에 연우는 가방 속 부산물을 떠올렸다. C급 보조계인 연우가 부산물을 자연스럽게 거래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당장 돈이 급한 건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일행이 납치되고 실종된다는 걸 눈치챈 배재영의 무리가 몸을 사리고 있었다. 덕분에 매일 포식하던 드래곤이 쫄쫄 굶고 있었다.
게이트를 열 수 있으니 들어가서 식사하고 나오는 건 어떠냐고 넌지시 권해봤지만, 드래곤은 계약자가 있는 이상 혼자서는 던전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답했다.
드래곤이 성룡이었다면 나는 쉬고 있을 테니 너는 사냥하라며 방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덩치만 컸지 드래곤은 아직 어린 헤츨링이었다. 그리고 게이트에 사람을 집어넣어만 봤지, 뽑아내 본 적은 없어서 둘이 무사히 던전을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는 부산물을 팔고 마석을 사들이는 게 제일 안전한 방법이었다.
“이건 몇 살 때예요?”
연우가 새 이불을 꺼내 정리하는 걸 도와주던 차헌이 침대 옆 액자를 들어 올렸다. 여덟 살 연우가 그네를 밀어주고, 그네를 탄 연화가 밝게 웃음을 터트린 사진이었다. 차헌의 손에서 액자를 받아 든 연우가 애틋한 얼굴로 사진을 문질렀다.
이렇게 활짝 웃는 아이였는데. 이제는 서늘하게 입꼬리만 비트는 연화의 미소를 떠올린 연우가 차헌을 바라봤다.
“여덟 살. 너 언제 갈 거야?”
“자고 갈 생각이었는데요?”
“왜?”
“아, 숙소로 갈 거예요?”
차헌이 폭주 증상을 일으켰을 때부터 지금까지, 며칠을 빼놓고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둘이었다. 그러니 오늘도 같이 자는 게 당연하지 않냐는 차헌의 태도에 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나 오늘은 동생이랑 얘기 좀 하게.”
“동생이 언제 올 줄 알고요? 그때까지 형 혼자 안 심심하겠어요?”
“같이 있어도 되긴 하는데…. 너 내 동생한테 말실수 안 할 자신 있어?”
그 말에 차헌이 입술을 딱 다물었다. 연우는 연화에게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생각 따위 없었다. 자신이 차헌에게 그랬듯, 연화가 확신을 가지고 물어본다면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털어놓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연화에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이건 형이랑 저만의 비밀이에요?”
[아니?]
흐흥. 코웃음을 흘리는 드래곤의 말을 무시한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에게 알릴 생각은 없었다. 물론 차헌도 없어야 하고.
제가 바본 줄 아냐며 입을 삐죽거리던 차헌이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내일은 올 거죠?”
“동생이랑 얘기 좀 해보고….”
제가 준비한 변명거리에 연화가 잘 넘어간다면 다행이지만, 과보호가 도진 연화가 예전처럼 저를 가둘 가능성도 있었다. 저야 갇혀도 상관없지만, 드래곤이 있는 한 감금은 피해야 했다. 드래곤의 식사를 챙겨주다 정체를 들키기라도 하면….
끔찍하군.
연우가 혀끝을 깨물며 차헌을 뒤로 당겼다. 좁쌀 같은 마나가 집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잠시 후, 현관을 통과한 종이비행기 여러 대가 연우의 머리 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센터장이네요.”
차헌의 말처럼 센터장의 직인이 찍힌 종이비행기가 날개를 펼쳐 연우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그중에서 가장 너덜너덜한 것을 확인해보았다. 배재영의 계략으로 가상 던전에 휘말렸을 때 보낸 것 같은 쪽지였다.
종이비행기를 회수한 연우는 시간순으로 배열했다. 쪽지는 할 말이 있으니 센터에 방문하라는 호출 요구부터, 게이트에 휘말린 이후 괜찮은지에 대한 자질구레한 안부를 묻는 말로 끝났다.
몇몇 쪽지에는 차헌과의 궁합이 어땠는지를 노골적으로 캐묻는 내용도 있었다. 그런 쪽지는 차헌의 손에 찢겨나갔다. 찢어진 종이를 그러모아 쓰레기통에 버리던 차헌이 센터장의 직인이 찍힌 메모장을 내려봤다.
“우리 그때, 공동 구역으로 간 것도 센터장이 불러서 간 거죠? 이 새끼가 알고 불렀을까요? 거기 게이트가 생긴다는 걸?”
고민하던 차헌은 침대에 앉아 연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차헌이 다리를 넉넉하게 벌리고 그 안으로 연우를 끌어당겼다. 여전히 손을 쥐고 있던 차헌은 새살이 차오르는 연우의 손끝을 살폈다.
“다 나았다니까.”
“후유증 같은 게 남아 있으면 어떡해요. 그래서 형이 저 무서워하면요.”
울상을 지은 차헌이 연우의 배에 이마를 묻었다. 배재영 그 새끼도 똑같이 던전에 던져버릴 거라고 차헌이 꿍얼거리자 연우가 가만 웃었다. 이미 내가 던져버렸는데.
차헌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연우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차헌에게 어디까지 말해도 될까. 같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지만, 모든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때까지 차헌을 붙잡느라 이에 연우가 휘말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연우를 통해 연화에게 복수하느라 차헌이 휘말리고 있는 거였다.
연우가 아는 차헌이라면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을 씹어뱉으며 자신도 돕겠다고 나설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드래곤과 계약해 인과율을 피할 수 있는 연우와 달리 차헌은 부메랑을 맞을 게 분명했으니까. 차헌은 이대로 센터장이 될 것이고, 그 앞길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감히, 건드리기만 해봐.
“그럼 모레는 올 거예요?”
칭얼거리는 차헌을 뒤로한 채 보조 가방을 열어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이건 뭐예요?”
“네 거.”
연우가 카디건과 피어싱을 꺼내며 차헌의 새끼손가락을 가리켰다. 새끼손가락부터 손바닥까지 동상이 걸렸다가 낫고 있었다.
“이능을 사용하는 속도를 몸이 못 따라가잖아. 마수를 상대하는 것도 좋은데 네 몸도 봐가면서 해야지. 냉기 저항 붙은 거야.”
연우는 노란색 피어싱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시 상자에 챙겨 넣었다. 카디건에 냉기 저항이 붙어있으니까, 화염 저항이 붙은 이것만 남기고 다 환불하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다짐한 순간, 차헌이 연우에게 달려들었다.
트럭이 달려든 것 같은 충격에 연우가 휘청였다. 그 사이 차헌이 몸을 숙이며 연우에게 파고들었다. 그렇게 밀어도 내 덩치로는 널 못 안는다니까. 연우가 있는 힘껏 팔을 벌리고 등을 두드려주자 차헌이 상자를 내밀었다.
“뭐예요? 어떤 거예요? 뭘 샀어요?”
차헌의 채근에 연우가 못 이기는 척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검은색 반 장갑이 들어 있었다. 차헌은 곧장 눈을 반짝거리며 씌워달라는 양, 손을 내밀었다. 연우는 장갑을 들어 한 짝씩 끼워주다 뻑뻑한 느낌에 눈썹을 찌푸렸다.
제일 큰 사이즈를 샀는데도 좀 작네. 뻐근하게 맞는 손가락 부위를 조절해주던 연우가 괜찮냐고 물어보려던 순간 차헌과 눈이 딱, 마주쳤다.
이상…하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입 안이 간질거려 마른침을 삼키고 싶었다. 눈 아래가 잘게 떨려 속눈썹이 눈을 간지럽히는 것 같아 문지르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차헌과 눈을 맞추고 있어야 했다.
“형.”
부르는 소리에 내가 대답했었나? 천천히 다가오는 차헌을 보던 연우가 눈을 내리까는 순간, 머릿속에서 드래곤이 비명을 질렀다.
[연우야!! 연화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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