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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84화 (84/143)

84화

깜짝 놀란 연우가 차헌의 어깨를 밀어냈다. 잠시 버티고 있던 차헌이 조심스레 뒤로 물러났다. 달아오른 얼굴로 눈치를 살피는 차헌과 달리 연우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허공에서 생성되는 문을 바라봤다.

“너 이제 가야겠다.”

“네?”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차헌이 놀란 표정으로 연우를 붙잡았다. 연우는 어수선하게 펼쳐진 물건을 정리하며 허공을 손짓했다. 반쯤 완성된 문을 확인한 차헌이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형, 나 뭐라고 인사하면 돼요?”

카디건을 보조 가방 안에 밀어 넣던 연우가 잠깐 고개를 들어 차헌을 바라봤다. 셋이 만나는 모습을 상상해보던 연우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내가 연락할게. 오늘은 일단,”

아공간의 문이 열리는 순간, 연우는 차헌의 손목을 붙잡고 이능을 사용했다. 동시에 툭, 하는 소리가 났지만 살필 정신이 없었다. 차헌이 현관 밖으로 이동된 걸 확인한 연우가 크게 심호흡하며 연화를 맞이했다.

“나 왔어.”

“왔어?”

“웬일로 집에 있네? 뭐 하고 있었어?”

“아무것도.”

정말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연우는 바삐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차헌이 사라진 자리를 힐끔거렸다. 네모 납작한 것이 있어 발로 밟아 침대 아래로 밀어 넣은 뒤 비틀거리는 연화를 부축했다.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고 있던 연화가 힘없이 식탁으로 다가갔다. 연화는 무너지듯 식탁 의자에 앉아 그대로 식탁 위로 엎어졌다. 그 바람에 두 손 가득 쥐고 있던 공책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반쯤 펼쳐진 공책에는 색색의 포스트잇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깨알 같은 글씨를 바라보고 있자 연화가 발을 들어 공책을 덮어버렸다.

연우는 아무것도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부스스 의자에서 일어난 연화가 작게 하품하며 공책을 정리했다.

“아, 자도 자도 잠이 안 깨냐….”

식탁 위로 공책을 쌓아 올린 연화는 그것을 베개처럼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연우가 연화의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청소기 선을 조용조용 정리하고 있을 때, 침대 아래 못 보던 물건이 보였다. 확인해보니 차헌의 지갑이었다. 아까 떨어진 게 이건가?

“오빠.”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차분히 놀란 연우는 지갑을 책장 위에 올려두고 식탁으로 다가갔다. 마주 앉자 연화는 연신 눈을 깜박거리다 연우와 눈을 맞췄다.

“야, 너.”

깜짝 놀란 연우가 냉장고로 달려갔다. 연화의 눈은 실핏줄이 다 터져 본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허둥허둥 얼음팩을 만든 연우가 연화를 침대로 이끌었다. 누우면 잘 것 같다고 꿍얼거리는 연화의 눈 위로 연우가 얼음팩을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그리고 곧장 포션이 가득 들어있는 가방을 뒤적였다.

피로 회복 포션의 뚜껑을 열어 연화의 손에 쥐여준 연우는 부엌으로 가 찬장을 열었다. 맨드레이크…가 여기 있다. 맨드레이크 뿌리를 잘게 써는 동안, 포션을 마시던 연화는 사지를 늘어트린 채 졸기 시작했다.

연우는 뿌리와 허니 젤리를 섞으며 침대로 이동했다. 연화의 상태를 확인해보니 달뜬 기색도, 열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능으로 인한 후유증은 아닌 것 같았다. 단순히 잠이 모자랐던 모양이었다.

죽은 듯이 잠이 든 연화의 옆에 연우가 쪼그려 앉아 코끝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것만으로도 불안해 연화의 맥박을 확인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손끝을 움찔거린 연화가 얼음팩을 치우며 일어났다.

“지금 몇 시야?”

“얼마 안 잤어.”

가라앉은 목소리에 연우가 맨드레이크 뿌리를 건네자 연화는 오만상을 쓴 채 숟가락을 뒤적거렸다.

“언제부터야?”

앞뒤 다 잘라먹은 질문에 얼음팩을 정리하던 연우가 흠칫 굳었다. 연우는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하며,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있던 연화의 옆에 앉았다. 연우는 준비한 변명을 머릿속으로 한 번 더 되뇌며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우규정 기억나?”

“그 우규정?”

연화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우규정은 엄마의 고향 친구이자, E급 정신계 에스퍼였다. 아빠와 단둘이 고향으로 내려간 엄마는 오랜 친구에게 자신의 딸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존재인지 하소연했다. 손등까지 내려오는 옷으로 마나 제어구를 숨긴 채 일반인으로 살아가고 있던 우규정은 연화의 이야기를 들으며 동경을 품었다.

자신은 고작 태몽밖에 꾸지 못했고 그마저도 형편없어, 마나 제어구를 달고 살게 되었는데…. 그토록 정확한 예지라니. 각성자들의 세상을 염원해오던 우규정은 엄마와 단둘이 남을 때마다 딸의 이야기를 해달라며 졸랐다. 엄마에게 연화의 외모, 버릇, 취향에 대해서 알아낸 우규정은, 머리를 길게 길러 갈색으로 염색했다.

그렇게 연화를 따라 하던 우규정은 어느 순간 연화가 자신의 이능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다. 연화가 누리고 있는 모든 영광은 자신의 것이라고.

그러니 이능을 돌려받아야 한다며 남몰래 망상을 키워나갔다.

연우가 사관 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우규정이 접근해왔다. 그 누구도 마나 제어구를 차고 있는 E급 에스퍼를 경계하지 않았다.

우규정은 부모님의 소식을 전해준다는 핑계로 연우와 오랜 시간을 보냈다. 내심 부모님을 그리워하던 연우가 경계를 허물었을 때, 우규정은 자신의 마나 제어구를 연우에게 채운 다음 그대로 납치했다.

결국 꼬리가 밟혀 연우를 놓아줘야 했지만, 우규정은 잡히지 않았다.

부모님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연화를 버리고 도망가는 와중에도 향후의 돈벌이를 위해 연화가 그린 그림을 잔뜩 챙겼고, 엄마는 은행에 일하는 친구, 우규정에게 그림을 맡겼다. 우규정은 그 그림으로 돈을 버는 것과 동시에 연화의 시선에서 도망 다니고 있었다.

부모라는 게 도움이 되는 게 조금도 없다며 허공에 주먹질하던 연화가 눈을 치켜떴다.

“그 인간이 왜?”

“또… 그러려고 했던 것 같아.”

연화가 벌떡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연우는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거짓말이 들통날 것 같았다.

“이번에도 무슨 아이템을 사용한 것 같긴 한데, 뭔지를 모르겠네. 마나 제어구랑은 좀 달랐던 게 마나가 역류하는 느낌이 들더니, 이렇게.”

연화의 손을 잡은 연우가 티스푼으로 마나를 떠올리는 상상을 했다. 맞닿은 손으로 온기가 퍼지자 연화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마나 제어구랑 느낌이 달랐다고?”

“응.”

“이래서 오빠 미래가 잘 안 보였나….”

중얼거린 연화가 이를 갈았다.

“오빠한테도 접근했단 말이지….”

조용히 뇌까리는 말에 연우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도’라니? 설마 연화한테도 접근했었나?

“그건 내가 처리할 테니까 오빠는 신경 쓰지 마. 그 인간을 처리하면 다시 멀쩡해질 거야. 나 때문에 괜히 미안해.”

“네가 왜 사과를 해.”

괜찮다며 연화를 다독인 연우가 연화의 눈에 손을 올려두었다. 그대로 잠이 들려는 연화에게 연우는 이불을 덮어주며 유순한 미소를 지었다.

연화 역시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이미 연우가 처리했으니까.

명단에서 우규정의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연우는 공간을 접어 이동했다. 감각을 펼쳐 금고를 찾은 연우는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던 스케치북을 발견했다. 연우가 그것들을 차곡차곡 챙겨 연화의 아공간으로 옮긴 뒤, 종아리까지 오는 가방을 챙겨 우규정을 기다렸다.

잠시 후, 집으로 들어온 우규정은 잠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예전의 모습과 달라져 있었다. 우규정이 연우를 보자마자 놀라 달아나려 했지만 연우가 이를 붙잡아 가방에 집어넣었다. 어렸을 때의 자신이 그랬듯, 온몸이 접힌 채 가방에 들어간 우규정은 제가 잘못했다며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연우는 우규정이 제게 그려줬던 미소를 똑같이 지어주며 가방을 닫아버렸다. 잘 보관해두고 있다가 나중에 때를 봐서 협회에 던져놓을 계획이었다.

“오빠, 근데.”

금방이라도 잠이 들 듯 길게 하품하던 연화가 연우를 붙잡았다.

“이능은? 이능은 괜찮아?”

“응. 문제없어.”

걱정 어린 표정에 연우는 보란 듯 녹은 얼음팩을 싱크대로 옮겨 보였다. 연화는 얌전히 싱크대로 옮겨진 얼음팩을 보며 연우의 손을 잡고 눈을 맞췄다. 그 순간 눈 밑이 떨리며 이명이 울렸다.

“정말 문제없는 게 맞아?”

또박또박 묻는 말에 연우는 두통으로 어질한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시야가 흐려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목덜미를 붙잡는 게 느껴졌다.

“정말?”

걱정이 듬뿍 담긴 연화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연우의 이능에는 문제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목덜미를 붙잡은 손이 고개를 가로젓게 했다. 거부하려던 연우는 생각을 바꿔 이명에 따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도 게이트에 휘말렸다면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조금 쉬는 게 낫지 않아? 센터장한테는 내가 말해둘까?”

연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니, 연화는 잘 생각했다며 손등을 두드린 다음 그대로 잠이 들었다. 연화가 잠든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연우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연우는 마나들이 붙잡고 있는 손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결국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자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괜찮아?]

드래곤의 물음에 연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연화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자라 세뇌까지 걸고 있었다.

* * *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아공간으로 향하는 문을 연 연화가 연우의 목걸이를 가리켰다. 연화는 사람을 보낼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리라며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아직 핏발이 가라앉지 않은 눈이 은백색으로 물들고 있었음에도 연화는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오빠.”

잠을 몰아내려는 듯 머리를 흔든 연화가 연우에게 몸을 기대왔다. 연화가 입을 열자 또다시 보이지 않는 손이 연우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거부하려는 마나를 진정시킨 연우는 연화의 말을 기다렸다.

“제발 다치지 마.”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꽉, 쥐었다 놓은 연화가 아공간으로 들어갔다. 문이 사라진 뒤에도 연우는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드래곤을 불렀다.

[아잇.]

드래곤은 흔들리는 식탁을 꼬리로 고정하며 불편한 듯 몸을 굼지럭거렸다. 이제 연우의 허벅지보다 굵어진 드래곤의 몸통은 방안 여기저기에 부딪히며 세간살이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황금빛 눈을 사납게 뜬 드래곤이 꼬리를 흔들어 몸집을 작게 줄였다. 보석뱀 크기로 줄어들 때까지 꼬리를 흔들던 드래곤은 연우의 발목을 타고 올라가 어깨에 자리 잡았다. 몸을 세워 주변을 둘러보던 드래곤이 휘유, 휘파람 비슷한 한숨을 쉬었다.

[우리 지금 갇힌 거 맞지?]

“그럴걸.”

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앉은 연우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때 네가 그랬잖아. 앞날에 위험이 닥칠 걸 마수의 감으로 알 수 있다고.”

[그랬지.]

“내가 너를 죽이러 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렇게 세세하게는 예상 못 해.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지. 그건 왜?]

“…던전에 들어갈 사람이 내가 아니었던 것 같아.”

그때, 보이지 않는 손들이 연우를 덮쳐왔다. 발목에, 머리에, 어깨에 매달린 손들은 제발 기억하지 말라며 연우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잊으라고, 잊어버리라고, 그건 그냥 꿈이었다고.

“아마도 강차헌이랑 내 동생이 들어갈 예정이었겠지. 나는 그 미래를 바꾸기 위해 던전에 들어갔다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비명과 똑 닮은 이명에 눈을 감고 있던 연우는 띵동, 하는 소리에 숨을 들이켰다. 연우가 흐느끼는 이명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핸드폰을 확인하다 작게 웃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차헌이 보낸 문자였다.

>형 혹시 제 지갑 봤어요?

>검은색 체크무늬

>아까 형 방에 놓고 온 것 같은데 내일 가지러 가도 돼요?

>점심때 갈까요?

>내일 뭐 먹을래요?

쉼 없이 날아오는 문자를 보던 연우는 답장을 보류한 채 드래곤과 눈을 맞췄다.

“던전에 들어갔다가 너한테 죽었잖아. 그러고 과거로 돌아왔고.”

눈치를 보던 드래곤이 꾸벅,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연화가 그 사실을 아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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