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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85화 (85/143)

85화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 사서함에,]

또 안 받네.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던 차헌이 손가락을 움직여 연우와 나눈 대화 내용을 확인했다. 지갑을 놓고 왔다는 핑계로 시작된 문자는 점심 메뉴를 묻는 안부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분명 1이 없어졌는데도 답이 없었다.

바쁜가? 잠시 기다리던 차헌은 저녁 메뉴를 물었다. 그래도 답이 없어 밤 인사를 건넸다가 참다못해 전화를 걸었지만 연우에게 돌아온 대답은 하나였다.

>나중에 연락할게.

그 나중이 언젠데! 차헌은 침대에 벌렁 누워 팔다리를 버둥거리다가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연우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아니라 고객님이 어쩌고 하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차헌은 벌떡 일어나 센터로 갈 준비를 했다. 훈련복을 챙겨입는 차헌의 귀 끝이 홧홧했다. 그때 마지막에 좀… 들이대서 그런가? 천천히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 한다는 건 알지만, 연우가 옆에 있을 때마다 절제가 안 됐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단둘이 있다 보니 계속해서 손이 갔,

어?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었나?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기억을 더듬어가던 차헌이 쪼그려 앉아 절규했다. 꿈과 현실과 기억이 뒤섞인 삶을 살다 보니 기억력에 자신이 없었다. 진짜 안 했나? 차헌은 방안을 돌아다니다 뛰쳐나가 연우의 방 앞을 서성거렸다. 여기서 내가 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가서 물어보자. 신발을 신은 차헌이 아공간을 빠져나와 센터로 향했다. C 구역으로 향하려던 때 무언가 눈앞에서 얼씬거렸다. 잡아채자 센터장의 직인이 찍혀있는 종이비행기였다. 내용을 확인한 차헌은 C 구역으로 향하는 포탈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다 센터장실로 이동했다.

비서의 안내에 센터장실로 들어가자 예상했듯 아무도 없었다. 센터장의 고약한 버릇 중의 하나였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불러 지치게 만들거나, 늦게 불러 소외감을 느끼게 만든 다음 자신에게 유리한 판으로 상황을 이끌어가려는 유치한 습성.

혀를 찬 차헌은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니 아련한 기억이 몰려왔다. 그때 저와 함께 뜻을 맞췄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사람들이 그립지는 않았다.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을 모아서 센터를 일으키느라 개고생을 했던 걸 생각하면 마주치기도 싫었다. 그 짓거리 두 번은 못 하겠다.

차헌은 목덜미를 긁적이다 다시 한번 핸드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연우에게서 온 답은 없었다. 아직 출근 안 했나. 중얼거린 차헌은 시선을 틀어 들어오는 부센터장을 바라봤다.

“아하…하하, 강차헌 에스퍼. 그 자리보다 이 소파가 더 푹신해 보이지 않습니까?”

부센터장의 말에 상석을 힐끔 내려본 차헌이 순순히 자리를 옮겼다. 습관적으로 앉긴 했지만, 이젠 제발 앉아달라고 권해도 거절할 자리였다. 그렇게 앉고 싶어 하는 이상원이나 앉히던가. 부센터장이 권하는 포도 주스를 이능으로 얼려버린 차헌이 삐딱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쪽이 주는 거 앞으로 안 먹겠다고 하지 않았나?”

차헌은 빈정거리며 컵을 밀어버렸다. 연우도 없겠다, 얼굴에 확 부어버리려다가 참은 거다. 부센터장은 그만하라는 경고에도 알음알음 정화되지 않은 던전 부산물을 배송했다.

그걸 연우가 먹었다면…. 차헌은 싸늘하게 부센터장을 쳐다봤다. 지은 죄를 알긴 아는지 부센터장이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들어오는 센터장을 과하게 반겼다. 차헌은 팔짱을 낀 채로 눈만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평소였으면 삼십 분은 대기했을 텐데, 바로 찾아온 걸 보니 몸이 달긴 단 모양이었다.

“인사는 생략해도 되겠지.”

차헌은 대답 대신 옆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불편한 심기를 비추기 위해 헛기침하던 센터장이 비서에게 손짓했다. 뒤이어 차헌의 앞에 서류가 쌓였다. 제일 상단의 서류는 <대한 센터 근로 계약서>였다. 차헌은 손가락을 까딱여 계약서를 얼려 깨트린 다음, 아래 서류를 확인했다.

<손해 배송 청구서>

뭘 요구하려나 싶었는데…. 서류를 들어 찬찬히 읽던 차헌이 헛웃음을 흘렸다.

“대한 센터 에스퍼에게는 무상으로 제공되는 물건이지만, 외부 에스퍼에게는 아니지.”

차를 마신 센터장이 차헌을 보며 빙긋 웃었다. 폭주했을 때 무너진 건물을 수리하는 데 들었던 비용과 차헌이 지금 입고 있는 훈련복과 사용하던 훈련장,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무기와 포션의 대금을 요구하는 서류였다. 그것도 모자라 실리를 사용한 대여료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목록을 확인한 차헌의 눈빛은 그저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동안 함께 해온 정이 있으니 2주 주겠네. 그게 힘들다면.”

센터장이 찻잔을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비서가 새로운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어쩔 수 없이 우리랑 계약해야겠지.”

“예전에는 교육비를 포함한 항목 때문에 제외되는 금액이 많았지만, 이제 강차헌 에스퍼도 어엿한 에스퍼가 되었으니 연봉과 비율을 조율했습니다. 한 번 확인해보시는 게,”

부센터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계약서가 얼어붙었다. 잘게 쪼개져 흩날리는 계약서에 센터장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찜찜한 눈으로 지켜보던 차헌은 다음 서류를 확인했다.

<페어 신청서>

이건 뭐지? 차헌이 서류를 펼쳐 읽는 동안 비서가 방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아, 마침 도착했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이상원이었다. 이상원은 차헌과 센터장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천천히 걸어와 차헌의 맞은편에 앉았다.

“한연우 에스퍼는요?”

“몸이 아프다고 연차를 냈다는군.”

그 말에 차헌이 미간이 구겨졌다. 아프다고? 걱정과 동시에 작고 몽글몽글한 불쾌감이 차헌을 덮쳤다. 연우의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들어야 한다는 게 기분이 무척 더러웠다. 차헌은 구겨진 미간을 펴지 않고 서류를 보다가 짧게 웃으며 서류를 집어 던졌다. 센터장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온갖 술수를 쓴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예전, 한연화가 작정하고 예지를 뿌렸을 때, 센터장은 각성자가 대거 이탈한 센터를 재건하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그 방법이 온건하지 못했다는 건 센터장도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제가 세운 센터니, 제가 곧 센터라며 악을 지르던 센터장이 누구 손에 죽었더라.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이상원도 서류를 받아 읽고 있었다.

“이제 슬슬 이상원 에스퍼도 페어 가이드를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파장이 맞는 가이드를 만나지 못해서요.”

그 말에 차헌이 가만히 웃었다. 앞으로 6년 뒤 태어날 S급 가이드를 기다리고 있는 거면서. 그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에스퍼들끼리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수습하느라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모른다.

“추천하고 싶은 가이드가 있으신가요? 반응을 보아하니, 강차헌 에스퍼도 아는 가이드인가 본데….”

서류를 마저 읽어 내려가던 이상원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센터장을 바라봤다.

“한연우?”

이상원은 제가 아는 한연우가 맞냐며 되묻더니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둘이 매칭 테스트를 받았구나. 한연우 에스퍼가 가이드라서.”

차헌은 이상원의 체리 빛 눈동자가 광기로 빛나는 걸 보다가 턱에 힘을 준 채 센터장을 바라봤다. 센터장은 둘의 시선에도 여유로운 태도로 찻잔을 기울이다 이상원과 눈을 맞췄다.

“그 부분은 기밀이니 다른 사람에게는 입을 다물도록. 등급이 좀 낮게 나온 편이지만…. 강차헌 에스퍼의 폭주를 가라앉힐 정도야. 이제 막 가이드로 각성한 모양이라 힘을 어떻게 다루는지 모르는 모양인 것 같더군. 강차헌 에스퍼와 매칭도가 제법 높아 기대하고 있었지. 하지만, 이상원 에스퍼도 알다시피 강차헌 에스퍼는 센터와 계약할 마음이 없다는군.”

찻잔을 내려놓은 센터장은 차헌을 바라보며 진득하게 웃었다.

“센터 소속 가이드가 다른 소속 에스퍼에게 가이딩하는 건, 너무 경우에 어긋나는 행동이지 않나?”

“아하.”

보란 듯 실리를 매만지고 있던 이상원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뭐, 강차헌 에스퍼와 매칭도가 높게 나왔으면 저랑도 비슷하겠네요. 빠른 시일 내로 검사 일정 잡아주세요.”

이상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음벽이 솟아올라 넓게 퍼졌다. 이상원은 여유로운 태도로 손을 움직여 얼음을 녹여버렸고, 센터장은 차를 마시고 있던 자세 그대로 비서에게 손짓했다. 비서의 손짓에 얼음 파편이 날아가자 이를 잡아챈 차헌은 센터장을 뚫어질 듯 노려봤다.

센터장은 지금 대놓고 차헌을 협박하고 있었다. 차헌이 센터와 계약하지 않으면, 연우가 페어를 맺게 될 거라고. 자꾸만 날뛰려는 마나를 잡아 누른 차헌이 센터장과 이상원을 바라봤다.

그냥 지금 죽일까? 이상원은 죽여 마땅한 인간이었고, 센터장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죽을 인간들이니 그냥 미리 죽여버릴까? 빠르게 휘몰아치는 얼음 결정과 함께 팔랑거리던 차헌의 머리카락이 조금씩 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환하게 웃은 이상원이 벌떡 일어나 실리를 칼로 변형시켰다. 어디 한번 덤벼보라며 고개를 까딱거리는 모습에 차헌이 손을 휘두르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 틈새로 연우의 얼굴이 빼꼼 드러나자마자 차헌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얌전하게 자리에 앉았다.

“부르셨어요?”

연우가 차헌의 옆자리에 앉으며 묻자, 이상원이 씩 웃더니 센터장을 바라봤다. 센터장이 연우에게 차를 권함과 동시에 비서가 연우의 앞에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페어 각인서?”

연우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헛기침으로 주의를 끈 센터장이 연우를 바라봤다.

“한연우 에스퍼, 아니 아니, 이제 가이드지. 한연우 가이드가 그랬을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묻겠네. 강차헌 에스퍼와 각인을 했나?”

“센터장님.”

연우가 불쾌한 낯으로 읊조렸다. 각인한 티가 난다고 해도 이렇게 물어보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센터장이 으흠, 헛기침하자 이상원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했어도 인정을 못 받지 않나요? 강차헌 에스퍼는 아직 미성년자잖아요.”

“뭐라는 거야, 저 스무 살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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