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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86화 (86/143)

86화

연우는 대놓고 비웃는 이상원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센터장도, 부센터장도 비슷한 표정이라 연우는 차헌의 손등을 도닥인 뒤 착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각성자의 법적 성인 나이는 스물한 살입니다. 강차헌 에스퍼.”

“차,”

저놈의 차헌이. 입다물라고 손등을 꼬집은 연우는 센터장을 보면서 눈썹을 늘어트렸다.

“사관 학교의 선생님들이 모든 걸 신경 쓰지는 못하니까요.”

너희가 제대로 안 가르쳐놓고 왜 비웃고 난리세요?

“이때까지 일반인으로 살아왔으니, 강차헌 에스퍼가 순간 일반인 기준으로 생각했나 봐요.”

에스퍼로 적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대뜸 끌고 와서 제대로 안 가르쳐준 게 어디의 누구시더라?

안타깝다는 듯 말끝을 흐리는 연우의 목소리에 센터장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시선을 피하는 부센터장까지 보던 연우는 차헌에게 눈치를 줬다.

에스퍼 증을 발급받을 때만 해도 미성년자라는 게 적응이 안 된다며 인상을 쓸 땐 언제고, 갑자기 성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힐난하는 시선에도 차헌은 당당한 표정으로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뭐, 어쨌든. 그럼 두 분은 아무 사이도 아닌 거죠?”

맞잡은 손을 보고 있던 이상원이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쩌다 가이드가 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타이밍 맞게 팀이 찢어졌으니 우리 팀으로 들어오고 자연스럽게 페어 과정을 밟아나가면 되겠네요. 진작에 우리 팀으로 영입하고 싶었는데, 잘됐다. 그쵸? 일단 센터장님이 기밀이라고 하셨으니 임시 가이드부터 시작할까요? 한연우 가이드?”

“뭔 소리예요.”

차헌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기며 이상원의 손을 밀어냈다. 밀리지 않고 버티고 있던 이상원이 재밌어죽겠다는 얼굴로 차헌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한연우 가이드 생각을 물어봤는데 왜 강차헌 에스퍼가 대답을 하죠?”

발끈하는 차헌을 말린 연우는 이상원의 손을 내려봤다.

“저도 임시 가이드부터 시작해도 상관없는데….”

연우의 대답에 차헌의 입이 떡, 벌어졌다. 차헌은 온갖 배신감으로 얼룩진 표정으로 연우를 쳐다보았다. 그런 차헌을 힐끔거린 연우가 이상원의 손을 천천히 잡았다.

“형!”

“이상원 에스퍼께서 괜찮으실까요?”

연우의 말에 이상원이 진하게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이상원은 연우의 손을 넘어 손목까지 움켜쥐며 차헌을 빤히 바라봤다.

“제가 안 괜찮을 게 뭐가 있나요? 우리는 같은 센터 소속인데.”

이상원의 말에 연우는 마나를 끌어올려 맞닿은 손바닥으로 밀어 넣었다. 차헌을 향해 승리자의 시선을 보내던 이상원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허물어졌다. 급하게 손을 빼낸 이상원은 메스꺼운 표정으로 연우를 노려봤다.

“형, 괜찮아요?”

차헌이 연우의 생채기 하나 없는 손을 소중히 감싸 쥐며 이상원을 노려보았다.

“아시다시피 제가 에스퍼였잖아요. 지금도 에스퍼로서 활동할 수 있고요.”

그래서 그런가, 중얼거린 연우가 센터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센터장이 미심쩍은 얼굴로 손을 붙잡자, 연우가 마나를 이끌었다.

“한연우 에스퍼, 잠시.”

“에스퍼의 마나끼리는 반발력이 심한 거 아시죠?”

연우는 거세게 쳐내는 센터장의 손을 피해 손을 물렸다. 불쾌하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 센터장과 이상원을 연우가 번갈아 보며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이래서 미리 괜찮으시겠냐고 여쭤본 거였어요. 부센터장님도 확인해보실래요?”

연우가 손을 내밀자 부센터장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얌전히 손을 거두자 연거푸 차를 들이켜던 센터장이 불현듯 차헌을 쳐다보았다.

“그럼 강차헌 에스퍼는?”

“저는 상관없는데요.”

차헌은 보란 듯 연우의 옆에 딱 달라붙어 손에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처럼 싹싹 닦아 냈다. 노골적인 차헌의 반응에 손을 뺀 연우가 어떻게 할 거냐는 듯 센터장을 바라보았다.

“다른 에스퍼를 데리고 오셔도 상관없지만, 아마 다들 비슷한 반응일 것 같네요. 오는 길에 선우건 에스퍼를 마주쳤는데, 그 또한 비슷한 반응을 보이더라고요.”

“그 사람한테도 가이딩했어요?”

연우는 날뛰려는 차헌의 허벅지를 꾹 누르며 센터장의 말을 기다렸다. 이상원 역시 불쾌감이 남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센터장은 찻잔만 만지작거릴 뿐,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연우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손해 배상 청구서를 바라보았다.

계약 안 할 거면 돈 물어내고 나가라고 불러놓은 자리에 이상원과 자신을 호출한 이유가 뻔했다. 페어 신청서라니. 누가 봐도 차헌을 협박하려고 만든 자리였다. 연우가 이상원과 페어가 되는 걸 내려버려 두고 센터를 나갈 거냐며 차헌에게 으름장을 놓을 생각이었는데, 이상원이 연우의 가이딩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다른 협박 거리를 찾고 있는 거겠지.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센터장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연우는 제 손가락을 가지고 노는 차헌을 내버려 둔 채 눈을 감았다.

헬리. 드래곤을 부른 연우는 천천히 눈을 뜨며 센터장을 바라봤다. 연우의 눈에는 어느새 황금빛의 마나가 감돌고 있었다.

저 사람한테서 느껴지는 게 있어?

[조금도.]

역시. 센터장실의 바깥에서 대기할 때 감지한 마나는 총 네 가지였다. 센터장까지 포함하면 다섯 가지가 감지되어야 했는데, 네 가지라.

눈을 깜박인 연우는 센터장의 뒤를 지키는 비서를 쳐다봤다. 일단 저 인간이 배재영의 무리인 건 확실했다. 센터장한테도 마나 억제 아이템을 부착한 건가? 왜? 혀끝을 깨물며 고민하던 연우가 시간을 확인했다.

잠시 후면 백두 길드장이 방문하기로 약속한 시각이었다. 한숨을 삼킨 연우는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뭔가 오류가 있는 게 아닐까요?”

“형은 내가,”

가만히 있으라며 차헌의 손을 움켜잡은 연우가 센터장에게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저번에도 말했듯, 차헌의 폭주를 가라앉힌 건 자신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워낙 정신이 없는 상황이다 보니 가이딩에 성공했는데 눈치채지 못한 가이드도 있을 수도 있는 거고, 차헌이 센터와 정식으로 계약한 에스퍼가 아니다 보니 가이드가 일부러 숨기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솔직히 에스퍼가 가이딩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 마나 친화력이 아예 없다는 걸 센터장님도 보셨지 않냐는 말에 센터장의 미간의 골이 깊어졌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강차헌 에스퍼랑 한연우 에스퍼가 워낙 친하니까 폭주 이후 익숙한 마나에 안정을 느낀 걸 수도 있고.”

와, 어떻게 에스퍼한테 가이딩이 느껴진다고 주장할 수가 있지? 들으란 듯 중얼거린 이상원이 센터장과 차헌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방금까지는 차헌에게 엿을 먹일 생각으로 장단 맞출 때는 언제고, 태도를 달리하는 모습이 박쥐가 따로 없었다.

“강차헌 에스퍼야 미숙해서 그렇다지만….”

센터장을 빤히 보던 이상원은 말끝을 흐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노골적으로 센터장을 비웃던 이상원이 일어나보겠다며 떠났다. 손해 배상 청구서를 챙긴 차헌 역시 이만 일어나자며 연우에게 손을 뻗었다.

만류하지 않는 센터장을 뒤로한 채 중앙 구역을 빠져나온 연우는 손해 배상 청구서를 확인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제대로 된 금액이 아니라 여기저기 뻥튀기된 금액이 적혀있었다. 혀를 끌끌 차고 있는데, 차헌이 손을 끌어 깍지를 끼더니 반짝거리는 눈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형, 그럼 형은 저만 가이딩 할 수 있는 거예요?”

“아닐걸? 동생도 느끼는 것 같던데.”

“형 동생은 정신계잖아요. 정신계는 딱히 가이딩 안 받아도 되니까,”

“무슨 소리야. 정신계는 에스퍼도 아니야? 왜 가이딩이 필요 없어?”

허리에 손을 올린 연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날카로운 태도에 차헌이 눈을 질끈 감았다. 연우가 동생을 얼마나 아끼는지 잠시 잊고 있었다. 차헌은 눈치를 살살 보며 거칠게 서류를 넘기는 연우의 곁에 붙었다.

“아니, 형 동생은 정신계니까 던전에 들어갈 일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던전에서는 저한테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저는 형한테 반발력도 안 느껴지고, 기분도 너무 좋은데….”

차헌이 슬며시 어깨에 이마를 가져다 대자 한숨을 쉰 연우가 차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을 느끼고 있던 차헌이 연우의 손가락을 옭아맸다.

“그럼… 나중에….”

보조 가방에서 펜을 찾던 연우가 웅얼거리는 차헌을 쳐다봤다. 차헌의 귓가는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걸 본 연우도 괜히 귀가 화끈거렸다.

나중에 뭐?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묻자, 입술을 달싹거리던 차헌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연우는 포션 가격에 물음표를 그려 넣다, 팔짱을 끼며 차헌을 바라봤다.

“그런데 너… 그… 네가 아직 미성년자라는 건 알고 있지?”

“네. 아니, 형은 제가 제 나이도 모를까 봐요?”

기억이 좀 오락가락하나? 연우는 자신도 저런 실수를 한 적이 있는지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다 차헌에게 물었다.

“에스퍼의 법적 성인 나이가 스물한 살이라는 건 알고 하는 소리지?”

원래는 일반인과 똑같은 기준이었지만, 첫 임무에 성공한 각성자들이 무턱대고 각인하는 경우가 많아 개정되었다. 각인이 뺏다 끼울 수 있는 반지도 아니니, 신중히 결정하라는 취지로 법을 바꾼 것이다. 그러니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각인을 한들 페어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아. 맞다. 그럼 지금 형이랑 각인해도 인정 못 받겠네요.”

연우는 체중을 실어 안겨 오는 차헌을 받아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랑? 연우가 차헌의 어깨를 밀어냈다. 차헌은 눈 밑을 붉히고 있다가 연우와 눈이 마주친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표정이 왜 그래요?”

“나랑 각인할 생각이야?”

“당연하죠?”

“너… 각인이 뭔지는 알지?”

“와, 형은 내가 진짜 바본 줄 알아요?”

“어떻게 하는지는 알고?”

그 말에 차헌이 시선을 피하더니 모르겠다며 안겨 왔다.

“그, 전에 해본 적은 없어?”

“말했잖아요. 가이딩도 받은 적이 없다고. 포션이 잘 나와서 가이딩 받을 필요도 없었어요. 형은요? 형은 각인했었어요?”

“조희서 가이드가 나한테 하는 거 못 봤어?”

“그런데 형은 각인하는 법을 어떻게 알아요?”

어떻게 알긴, 사관 학교에서 배웠으니까 알지. 자신은 배운 적이 없다며 차헌이 눈을 반짝였다. 연우가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을 떼어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체액에 마나를 담아서 상대방의 점막에 닿게 해야 해.”

“아….”

차헌이 입을 멍청하게 벌리며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괜히 입이 마르는 것 같아 연우는 연거푸 부채질했다. 그럼에도 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연우는 결국 차헌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위 말고.”

“네?”

“아래.”

“아.”

내려가려는 차헌의 시선을 연우가 다급히 막으며 마저 설명을 이었다.

“한 번으로 끝나는 때도 있긴 하지만, 될 때까지 시도해야 하는 게 대부분이라 과정이 좀 많이 힘들다더라.”

보조 가방에 물이 있었나. 가방을 뒤적거린 연우가 바싹 마른 입술을 물로 축이며 차헌을 바라봤다.

“너는 나랑 그걸 하고 싶은 건 아니잖아.”

“네?”

차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어쩔 줄 몰라 손을 허공에 휘적거리던 차헌이 갑자기 주저앉았다. 차헌은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뭐라 중얼거리더니 벌떡 일어나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진짜 이런 상황에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요.”

“응?”

“하고 싶어요.”

“뭐?”

“형이 허락해주면 지금 당장이라도 하고 싶어요. 준비도 됐고, 어떻게 하는지도 알고.”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연우가 천천히 뒷걸음질 치자 차헌은 속이 후련하다는 듯 환히 웃더니 천천히 따라붙었다.

“에스퍼고 가이드고 상관없어요. 저는 그냥 형이랑 하고 싶어요.”

또다시 이명이 울렸다. 귓가에는 심장박동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차헌이 뭐라고 말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저 형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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