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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87화 (87/143)

87화

“한연우 에스퍼, 그동안 잘 지냈어요?”

백두 길드장은 부드럽게 인사를 건네며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센터장이 허락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에스퍼들이 이곳까지 따라붙기까지 했다. 연우는 주변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의자에 앉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연화가 저한테 감기에 옮은 것 같아서요.”

연우의 맹맹한 콧소리를 듣자 백두 길드장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세상에. 강차헌 에스퍼에게 무례함이 옮기기라도 한 거예요? 감기약 얻겠다고 저를 지금 여기까지 불러내신 건 아니겠죠?”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아냐는 타박에 연우는 말없이 눈만 깜박였다. 하,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린 백두 길드장이 손톱을 세워 탁자를 탁탁 두들겼다.

연우는 면목 없다는 듯 속눈썹을 길게, 짧게, 다시 길게 깜박였다. 백두 길드장이 그 모습을 언짢은 기색으로 쳐다보다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웬만하면 푹 쉬는 게 제일 좋은데 한연화 에스퍼가 그럴 리는 없고. 복용법은 저번에 알려준 거랑 똑같아요. 그래도 안 나으면….”

주머니를 한참 뒤적이던 백두 길드장이 엘릭서를 내려놓았다. 밤하늘에 별을 뿌린 듯 반짝거리는 액체에 연우를 지키고 있던 에스퍼들이 짧게 침을 삼켰다.

“그 골방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한연화 에스퍼도 밖으로 나와서 세상을 둘러볼 필요도 있지 않겠어요? 햇빛을 쐬면 좀 나아질 텐데 말이죠. 어때, 우리 길드에 이쁜 선룸이 있는데 같이 구경하러 가볼래요?”

백두 길드장의 말에 연우를 둘러싸고 있던 에스퍼가 한 걸음 나섰다. 걸음에 무게를 실어 쿵, 내려찍은 에스퍼는 연우의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어깨에 닿을 듯 바짝 붙은 거리가 부담스러워 연우가 의자를 테이블 쪽으로 바투 옮겼다. 그리고 이해해달라는 표정으로 백두 길드장을 바라봤다.

“하여튼 유난이야.”

혀를 찬 백두 길드장이 턱을 치켜들어 경계 태세를 멈추지 않는 에스퍼를 내려봤다.

“한연우 에스퍼. 그거 알아요?”

“뭐를…?”

“제가 지금 여기서 한연우 에스퍼를 정문으로 빼가도 센터장은 아무 말 못 할 거라는 거? 위약금에 대한 말은 입도 뻥긋 못할걸요.”

방긋 웃는 백두 길드장의 말에 연우는 시선을 내리깔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당신들도 알아둬요. 지금 이럴 시간에 차라리 던전을 털고, 위험구역을 정화해서 우리한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거.”

그 말과 함께 백두 길드장이 물러나라는 듯 손짓하자, 혹시 모를 납치를 대비하고 있던 에스퍼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러났다. 에스퍼들과 적당히 거리가 벌어지자 백두 길드장이 포션 병을 체스 말처럼 연우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이상하죠? 한연우 에스퍼는 아파서 요양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는데, 멀쩡히 활동 중이네요?”

그 말에 연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연화와 우규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날, 잠에서 깨어난 연화는 집을 아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헛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책을 숨긴 채 거짓말하고, 이젠 아예 나가지도 못하게 연우를 가둬버린 연화는 그제야 안심한 기색으로 잠이 들었다.

세뇌가 먹힌 척 얌전히 앉아있던 연우는 연화 역시 차헌처럼 기억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잠든 연화를 내려보던 연우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던전에 들어갔던 이유는, 동생이 죽는 미래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과거로 돌아온 이유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이번 삶 역시 연화가 죽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의 미래가 뒤엉키든 말든 상관없었다. 연우는 깊게 잠든 연화에게 오랫동안 가이딩을 불어넣은 다음 아공간을 빠져나와 멀쩡한 얼굴로 출근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래서, 본론은?”

연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웃자, 백두 길드장이 다시 한번 손톱을 두드렸다. 연우 역시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조용히 백두 길드장을 바라봤다. 뒤이어 백두 길드장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앞에 놓인 포션 병을 비틀었다.

작게 새어 나온 연기에 입김을 불어 자신의 마나를 흘려 넣은 백두 길드장이 이제 말해보라며 손짓했다. 뒤를 돌아보자 벽에 붙어있던 에스퍼들이 멍한 눈으로 허공을 올려보고 있었다.

“이 아이템의 출저가 궁금해요.”

[이미 죽었을걸?]

조용히 해.

속으로 드래곤에게 경고한 연우는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자신이 휘말린 이야기는 모조리 제외하고 말이다. 그밖에 연화를 노리고 있는 집단이 만든 아이템을 연우가 손에 넣었다고 얘기하자 백두 길드장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요즘 들어 잠도 푹 못 자고, 예지가 빗나간다던데 아마 이것 때문이지 싶어서요.”

연우의 말을 듣던 백두 길드장이 아이템을 살피더니 흥미로운 얼굴로 눈썹을 치켜떴다.

“설마 맨입으로 부탁하는 건 아니죠?”

“제가 처음 본 물건이니 백두 길드장님께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일 텐데,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그 말에 몇 번 더 아이템을 건드려보던 백두 길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접근하는 방식이 우리랑 완전히 다르네요. 던전 아이템의 구성과도 다르고. 들고 가서 연구팀들을 좀 더 쪼아볼 수 있겠어요. 그러니 이걸 주는 대가로 배후를 밝혀달라?”

연우와 눈을 맞춘 백두 길드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다 알고 있으니 사실대로 말하라는 태도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강차헌 에스퍼 말입니다.”

“음? 한연우 에스퍼가 아니라? 아니, 아니, 뭐, 그래요. 계속 말해봐요.”

“센터와 계약이 불발되면서, 센터 측에서 손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연우가 서류를 내밀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훑어보던 백두 길드장이 흐응, 콧소리를 내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갚아달라?”

“아니요. 그런 부탁을 하려고 부른 게 아닙니다. 음, 강차헌 에스퍼가 사관 학교 졸업장을 받긴 했지만, 제대로 된 던전 교육을 모두 끝마친 상태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계시죠?”

“그럼요. 다들 눈독 들이고 있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죠?”

“아직 미성년자니, 보호자를 동반한 던전 견학을 다녀와야 하는데…. 이전에 한 번 다녀오긴 했지만, 끝이 좋지 않았다 보니 좀 더 든든한 분들과 함께 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네요.”

“아하, 그 든든한 보호자가 저고? 그런데 내가 치료계라는 건 알고 있죠?”

포션으로 마수를 때려죽이면서 겸손한 척은. 연우가 웃고만 있자 서류와 아이템을 번갈아 보던 백두 길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백두 길드장은 연구할 훌륭한 표본이 생기고, 차헌은 이로써 완벽한 에스퍼로 거듭나게 된다.

“대신 이 아이템, 제가 다 가져도 되죠?”

“물론이죠.”

가방에 남아 있는 아이템을 떠올린 연우가 시원스레 미소를 지었다. 백두 길드장은 아이템을 어떻게 챙겨야 할지 고민하다, 자신의 회색 가운을 벗어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그럼 다음에 게이트가 발견되면 연락할게요. 우리도 상도덕이 있으니 화산 지대는 피해서 연락할 테니까 조금 기다려요.”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며 자신의 마나를 끌어모은 백두 길드장이 작게 박수를 쳤다.

“아, 맞다. 한연우 에스퍼도 같이 갈 거죠? 용병 신청할게요?”

“네? 어, 저는 센터 소속이라…. 강차헌 에스퍼는 무소속이라 가능하겠지만, 저는 함께 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세상에. 저를 뭐로 보는 거예요? 저 백두 길드장이에요.”

턱을 치켜든 채 웃는 백두 길드장의 말에 연우가 괜찮다고 거절했다. 정신을 차린 에스퍼들이 시간이 다 되었다며 연우를 에워쌌다. 안 그래도 차헌에게 있는 대로 도발 당한 센터장을 건드리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혹시 다칠까 봐 무리해서라도 따라갔겠지만…. 차헌이 기억을 되찾았으니 너무 싸고도는 것도 좋게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차헌이를 피하고 싶은 게 아니고?]

시끄러워.

“어차피 요즘에 할 일도 없는 거로 아는데, 강차헌 에스퍼랑 같이 가면 좋지 않아요? 백두 길드도 구경하고.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오빠로서 미리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그렇죠?”

센터 보안이 엉망인 건지, 입이 싼 직원들이 많은 건지. 연우의 팀이 찢어졌다는 걸 알고 있다는 태도에 연우가 그저 웃음만 흘리며 다시 한번 거절했다. 절대 차헌을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센터장이 자신을 보내줄 리 없을 테니, 괜히 말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랬는데….

“자, 다들 보급품 확인하시고.”

연우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백두 길드장이 나눠주는 보급품을 받아들였다.

센터장은 백두 길드장과 한연우가 2주 안에 센터로 복귀한다는 계약서를 쓰고-위반 시 원래의 위약금에서 5배나 되는 위약금을 내놓으라는 항목을 덧붙였다- 연우에게 외출을 허락했다.

과거에서는 단 한 번도 허용된 적이 없던 일이라 연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백두 길드로 향했다. 백두 길드장은 직접 연우를 맞이하며 연화가 누릴 수 있는 길드 환경을 소개했다. 백두 길드 직원들도 열정적으로 시설을 소개했고, 연우는 예의를 차린 채 주변을 둘러보려 보았다. 태연한 척했지만, 제약계의 부동의 원탑을 차지하고 있는 백두 길드의 시설은 정말이지 완벽했다.

임시로 지낼 방도 과하게 좋았다. 짐을 푼 연우는 자신을 반겨주는 각성자들과 마나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 루틴이 끝나면 가이드들이 다가와 친절하게 가이딩을 방사해주었고, 그때마다 차헌이 달려와 연우의 앞을 막아섰다. 꽥꽥거리는 차헌을 진정시키며 식사를 하고 나오면 그날 상태에 맞는 영양제가 지급되었다.

그렇게 날은 차근차근 흘러 던전 공략 당일이 되었다.

“형, 이거 받았어요?”

허벅지 벨트를 정리하던 연우가 슬며시 고개를 들자, 차헌이 보급품을 앞으로 내밀었다. 조금 전 가이드가 챙겨준 물품이었다.

“…너는?”

“저도 챙겼어요.”

가방을 더듬어보던 차헌이 연우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헌은 보조 가방을 정리하며 몸을 기대왔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연우가 뻣뻣한 손으로 허벅지 벨트를 채우는 동안에도 차헌은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센터장이 형 보내준 거 있잖아요. 저도 그렇고.”

“응?”

“왜 그런지 알아요?”

정리를 마친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가 모르는 것을 알려줄 생각에 신난 표정 짓고 있던 차헌이 입을 삐죽이며 좀 더 체중을 실어 왔다.

“나야 그렇다지만, 너는 어떻게 알고 있어?”

“그 새끼 장부 정리한 게 저예요.”

투덜거린 차헌이 연우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연우가 어색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지만 차헌은 끊임없이 구시렁거렸다.

예전, 혼란이 찾아왔을 때 센터를 정비하기 급급했던 센터장은 여기저기 손을 벌렸다. 센터장은 센터가 안정되면 갚겠다고 약속했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른 게 사람이 마음이라고. 센터가 충분히 안정되었음에도 센터장은 차일피일 대금을 미루고 있었다.

차헌은 그 돈을 갚느라 취임식은 무슨, 내내 던전에 들락거리느라 죽는 줄 알았다며 연우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품 안 가득 안겨 오는 차헌의 등을 도닥여주던 연우는 눈을 굴렸다.

분명… 고백에 대한 답을 기다려주기로 했던 것 같은데. 이래서야 평소랑 다를 게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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