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게이트는 도로 한복판에 있었다. 공격대로 참여한 건 처음이라 연우가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동안, 차헌이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어깨를 꾹꾹 주물러주었다.
잠시 후, 마나가 일렁거리며 온갖 진액에 찌든 토벌대원들이 게이트에서 빠져나왔다. 수중계 에스퍼들이 쏟아붓는 물로 진액을 씻어내던 토벌대원 중 하나가 공격대 쪽으로 부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안에 진짜 더워요.”
“나 무슨 고기만두로 환생한 줄 알았잖아.”
땀에 찌든 훈련복을 벗어젖히던 토벌대원의 말대로, 이 정글형 던전은 들어서자마자 숨이 턱턱 막혀왔다. 다른 사람들처럼 감각을 찾는 척 연기를 하던 연우는 차헌이 쥐고 있는 손을 어색하게 꼼지락거렸다.
“많이 더워요?”
서리가 맺힌 손이 달아오른 볼에 닿는 순간 연우는 오싹, 소름이 돋아 올랐다. 동시에 후끈했던 볼이 차갑게 식으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볼과 이마, 목덜미에 차례대로 닿는 손에 연우가 나른한 숨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아이고, 뜨겁다, 뜨거워.”
“쪄 죽겠네, 쪄 죽겠어.”
놀림이 다분한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떤 연우가 차헌을 밀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놀리지 마십쇼.”
불퉁한 대답은 차헌이 아니라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주변을 둘러보자, 가이드 옆에 딱 달라붙은 에스퍼가 놀리는 사람들을 향해 꿍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손을 활짝 펼친 에스퍼는 제 가이드가 조금이라도 더울까 봐 걸음걸음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좋을 때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킥킥거리던, 백두 길드원 류지아가 연우에게 눈짓했다.
“저 둘이 얼마 전에 각인했거든요.”
각인이라는 단어에 연우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서 히죽거리는 웃음에 가이드가 그만하라고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제야 길드원들은 흩어져서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일단 팀을 나눠 베이스캠프를 설치할 곳을 찾아보자는 말에 연우가 류지아의 뒤를 따라나섰다. 길이 워낙 험해 조금씩 공간을 접어 이동하던 연우에게 차헌이 다가왔다.
“형, 그때 아이템은요?”
연우가 가방에서 황금색 보석이 박힌 피어싱을 꺼내자, 연우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던 차헌이 중얼거렸다.
“그냥 뚫으면 되나?”
연우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귀를 막고 도망갔다. 그런 연우를 덥석 붙잡은 차헌이 주머니에서 목걸이 줄을 꺼냈다. 혹시 몰라 챙겨왔다며, 차헌은 힘으로 피어싱의 바를 동그랗게 굽혀 목걸이로 만들었다.
땀으로 젖은 훈련복을 펄럭거리고 있는 연우에게 차헌이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자연스레 손을 내린 차헌은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더워.”
연우가 매몰차게 떼어내려 하자 차헌이 얼음을 만들어 연우의 손에 쥐여주었다. 얼른 따라오라는 류지아의 외침에 연우는 공간을 접으려 했으나, 차헌이 연우를 붙잡는 속도가 더 빨랐다.
“언제 대답해줄 거예요?”
“…재촉 안 할 테니까 생각해보라고 하지 않았어?”
“아, 그때는 그냥, 그렇게 말하면 뭔가 멋있어 보일 것 같아서 그랬단 말이에요.”
연우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차헌이 칭얼거렸다.
그날, 대뜸 각인하고 싶다며 고백한 차헌은 이게 아니라며 절규했다. 잊으라고 했다가 아니라고 했다가 어쩔 줄 몰라 하던 차헌은 연우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춘 채 또박또박 고백했었다. 좋아한다고.
답을 기다린다고 할 땐 언제고 슬그머니 재촉하는 차헌의 모습에 연우는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쁘아아앜! 세상에, 연우야! 결혼할 거지?]
머릿속에서 방정맞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만 아니었어도 좀 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을 텐데. 팔찌를 노려보던 연우는 차헌을 붙잡고 공간을 이동했다.
기다리고 있던 류지아가 베이스캠프가 정해졌다며 한쪽을 가리켰다. 울창한 열대림 중간에 가느다란 샘이 흐르고 있었다. 저 부분을 정리하고 이 부분을 정리해서 나뭇잎으로 움막을 짓자. 여러 의견을 주고받으며 회의하는 동안 날아오는 바나나를 막고 있던 방어계들이 짜증을 냈다.
“치키 몽키부터 정리하고 회의하면 안 되겠습니까?!”
허락이 떨어지자 기다리고 있던 공격계들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러나 얼마 전 가이드와 각인했다던 에스퍼와 차헌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염병한다!”
다른 에스퍼들의 구박에도 꿋꿋하게 제 가이드 옆을 지키던 에스퍼는 가이드의 손에서 온갖 잡일거리를 빼앗았다.
졸지에 할 게 없어진 가이드는 연우를 바라봤다. 동지를 보는 시선에 눈을 깜박이던 연우가 자신의 텅 빈 손을 내려봤다. 내 돌? 돌이 어디 갔지? 연우가 찾고 있던 돌은 차헌이 옮기고 있었다. 차헌은 다른 보조계와 함께 터를 닦고 있었다.
“네가 그걸 왜 해?”
“공격계 에스퍼가 터를 닦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요?”
몰랐네. 차헌의 말에 주변 에스퍼들이 짧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진지하게 동의하는 건 각인했다던 에스퍼뿐이었다. 그의 가이드가 뭘 하려고 할 때마다 제가 하겠다며 나서던 에스퍼는 결국 등짝을 한 대 맞고 나서야 치키 몽키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연우의 눈 위로 손이 덮였다. 시야를 막고 있는 손을 밀어내니 차헌이 몸을 붙여왔다.
“뭘… 왜 봐요?”
사람이 눈이 달렸으니 볼 수도 있는 거지. 에스퍼는 치키 몽키를 한 마리 해치울 때마다 가이드에게 달려와서 가이딩을 요청했다. 가이드는 그런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기꺼이 가이딩을 해주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던 연우의 시야가 다시 한번 막혔다.
“임자 있다는 사람을 왜 그렇게 봐요? 볼 거면 나를 봐요.”
친절하게 고개의 각도까지 틀어준 차헌의 손을 연우가 붙잡아, 점점 수가 늘어나는 치키 몽키를 가리켰다.
“너도 이제 다녀와.”
차헌은 이것만 하고 다녀오겠다며 바위를 잡았지만, 연우가 부드럽게 차헌의 손을 떼어냈다. 둘이서 놀러 온 게 아니라 차헌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무리하면서까지 들어온 던전이었다. 조금이라도 백두 길드장과 공격대장의 눈에 띄어야 했다.
연우의 뜻을 이해한 차헌이 터덜터덜 떠나며 계속해서 뒤를 힐끔거렸다. 그런 차헌에게 손을 흔들어준 연우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각인한 에스퍼와 그렇지 않은 에스퍼들이 구분이 되었다. 가이드가 터를 닦는 동안 방어막을 세우고 있던 에스퍼는 시종일관 뒤를 힐끔거리고 있었고, 공격계 에스퍼들 역시 마수를 처리하는 동안 가이드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에스퍼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각인은 가이딩의 효율을 높여주는 수단인 것과 동시에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라는 걸.
자신의 페어를 잃은 에스퍼는 지독한 상실감에 천천히 말라갔다. 가이드를 잃고 텅 빈 껍데기가 된 에스퍼를 수없이 보아왔음에도, 가이드와 하나가 되려는 에스퍼들의 욕망을 연우는 이해하지 못했다.
가이딩이 필요 없는 C급이라 그런 건지,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굳이 각인을 할 필요가 있냐는 게 연우의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자기랑 각인을 하고 싶다니. 연우는 나무를 걷어찬 다음 떨어지는 치키 몽키를 처리하는 차헌을 바라보다가 보조계를 도와 움막을 짓기 시작했다.
좋아한다니. 가이드를 향한 에스퍼의 집착과 헷갈리는 건 아닐까?
[에이. 그건 아니다.]
드래곤은 차헌이가 고생을 좀 하겠다며 혀를 끌끌 찬 뒤 나무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은색 망고가 탐스럽게 열려있었다.
불침번을 설 때 챙겨줄 테니 좀 참아. 팔찌를 만지작거리던 연우가 복귀하는 차헌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요청에 차헌은 큰 얼음덩어리를 만들어 베이스캠프 여기저기에 설치했다. 그것만으로도 후덥지근한 공기가 서늘해져 땀으로 흠뻑 젖어있던 사람들이 환호를 보냈다.
거기에 모자라 몇몇 가이드가 차헌에게 달려가 가이딩을 권하고 있었다. 연우는 가이드와 말을 나누는 차헌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차헌과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시선을 돌려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이왕 본 김에 질투 좀 해주지.”
어느새 다가온 차헌이 투덜거렸다. 그 말에 드래곤이 머릿속에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렸지만, 연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움막을 고정했다. 차헌이 다른 가이드와 있는 모습에 묘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질투할 필요가,
[왜 할 필요가 없는데에에?]
그야.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연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연우의 반응에 히죽히죽 웃던 드래곤의 웃음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차헌이 연우의 허리를 껴안는 것과 동시에, 치키 몽키의 사체를 정리하던 사람들도 경계 태세를 갖췄다. 감각을 펼치지 않아도 마수들이 빠른 속도로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스사사삭,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에 베이스캠프 주위로 방어막이 펼쳐졌다. 그 앞에 선 공간계 에스퍼들이 감각을 펼쳐 마수의 수를 파악하려 했지만, 저마다 외치는 수가 달랐다. 연우 역시 감각을 펼쳐보았지만, 마수가 가까워질수록 수는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허깨비 덩굴이에요. 저기 보여요?”
차헌의 손짓에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들이 베이스캠프를 향해 달려오면 올수록 사람의 형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동그란 잎사귀, 팔 같이 쭉 뻗은 가지, 다리처럼 갈라진 뿌리로 걷고 있는 그것은 보라색 덩굴이었다.
베이스캠프와 멀지 않은 곳에 뿌리를 내린 허깨비 덩굴들은 자기들끼리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차헌이 활을 빌려 얼음 화살을 쏘았다. 연리지처럼 얽힌 가지를 연달아 끊어낸 차헌이 연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날리는 꽃가루에 연우가 손수건으로 눈치껏 입을 가리자, 차헌이 잘했다는 듯 연우의 등을 두드렸다. 연우를 힐끔 살피던 차헌은 원거리 무기를 장전하는 길드원들에게 외쳤다.
“덩굴은 맞추지 말고!”
차헌의 경고에도 눈먼 화살이 허깨비 덩굴을 맞췄다. 그러자 얽혀있던 몸이 두 개로 분리되었다. 새로 돋아난 사지로 다른 덩굴과 수정을 시도하던 허깨비 덩굴에 결국 열매가 맺혔다. 그렇게 주렁주렁 열린 열매에서 하나둘씩 마수가 태어나기 시작했다.
보랏빛 곰이 열리는 덩굴을 향해 차헌이 화살을 날렸다. 숨을 쉴 새 없이 몸을 돌린 차헌은 사자가 열린 덩굴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방어막 앞에 선 공격계 에스퍼들이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앞에서 자라는 덩굴을 처치하고 있을 때였다.
삐요요, 하는 소리와 함께 보라색 새들이 날아올랐다. 날리는 꽃가루에 에스퍼들이 잠시 몸을 웅크리고 있는 틈을 타, 전갈이 방어막 안으로 침입했다.
“으!”
차헌이 얼음 막을 넓게 펼쳐 일대를 얼려버리는 순간 누군가 튀어 올랐다. 그 모습에 누군가 안 된다고 외쳤지만, 이미 에스퍼의 칼은 보라색 전갈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연우는 전갈에서 튀어 오르는 진액을 보자마자 공간을 접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진액은 베이스캠프 여기저기에 달라붙어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그 냄새에 허깨비 덩굴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방어막을 내려치고, 아래로 파고드는 덩굴을 잘라낼 때마다 흘러나온 진액이 발목까지 고였다. 차헌을 붙잡고 이리저리 이동하며 공격하던 연우는 상황이 정리됨과 동시에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제대로 진액을 뒤집어쓴 사람은 아예 속을 게워내고 있었다.
진액으로 흠뻑 젖어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던 공격대장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능으로 다 씻어내기는 무리고, 폭포가 있던데 거기로 갑시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