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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89화 (89/143)

89화

“죄송합니다.”

공격계의 사과에 연우는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순간적인 치기를 이기지 못하고 튀어 나간 어린 에스퍼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차헌만이 연우의 머리카락에 엉겨 붙은 진액을 바라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차헌을 포함한 공격계들이 몸에 묻은 진액을 털어내는 동안, 주변을 탐색하고 온 공간계가 폭포가 있는 쪽으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폭포 아래로 넓게 펼쳐진 계곡에 사람들이 작게 환호했다. 혹시 몰라 전격계가 전기를 흘려 수중 마수를 처리하고, 수중계가 다시 한번 마수가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다음 사람들은 팀을 나눠 몸을 씻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멀쩡한 연우는 상태가 심한 사람들이 먼저 씻는 사이, 버섯처럼 생긴 열매를 찾아 나섰다. 비누 열매 군집을 발견한 연우가 손에 잡히는 대로 열매를 챙긴 뒤 차헌을 향해 공간을 접었다.

“형?”

계곡에 솟아난 벽 뒤에서 차헌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리 오라며 손짓하는 차헌에게 걸어가니 얼음벽으로 만든 샤워장이 보였다. 작은 감탄과 함께, 연우는 각자의 이능으로 만들어진 샤워장을 둘러보았다. 이런 식으로 이능을 사용할 수도 있구나. 매번 인적이 드문 곳이나 간이 막을 사용해야 했던 연우가 작게 감탄했다.

얼음 샤워장 안으로 들어가자 진액에 들러붙은 훈련복과 씨름하고 있는 차헌이 보였다. 몸에 딱 달라붙은 훈련복을 보고 있자니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이 나왔다. 저도 모르게 연우를 따라 웃던 차헌이 종종걸음으로 연우에게 다가왔다.

“왜 웃어요?”

“아니, 네가 슬라임 볼 터트렸을 때가 생각나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차헌이 험악하게 표정을 굳혔다.

“아, 그때가 언젠데 지금까지 그걸 기억하고 있어요!”

차헌은 왁왁거리다가 그나마 깨끗한 손으로 연우의 훈련복을 잡고 칭얼거렸다.

“그런 거 말고 좀, 멋있었던 모습 생각해주면 안 돼요?”

그런 모습이 있었나?

연우가 미간을 찌푸리자 차헌이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한참이나 입을 벙긋거리던 차헌 역시 미간을 심각하게 찌푸렸다.

그 모습에 작게 웃은 연우가 아까 따온 비누 열매를 건넸다.

“뭐, 어때. 귀여웠는데.”

“그래도요.”

꿍얼거리던 차헌은 열매를 받아 들고는 샤워장 안쪽을 손짓했다.

“…온 김에 씻고 갈래요?”

“그럴까?”

연우로서는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샤워장 때문인지 고여있는 물이 꽤 차가웠다. 하지만 후덥지근한 열기 때문에 오히려 반갑기만 했다.

“진심…, 정말요? 같이 씻을 거예요? 여기서?”

“응.”

훈련복을 걷어 올리던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요?”

안으로 들어서자 차헌이 급하게 연우의 앞을 막았다. 제가 권해놓고 왜 이래? 연우는 빳빳하게 굳어있는 차헌을 밀어내며 안으로 들어간 뒤 고여 있는 물에 손을 담갔다. 몇 번 문지르자 손가락 사이사이 굳어있던 진액이 닦여나갔다.

비누 열매로 뽀득, 소리가 날 때까지 손을 문지른 연우가 물기를 털며 일어났다.

“난 다 씻었어. 불안하면 밖에서 망봐줄까?”

“에?

머리카락에 묻은 진액이 찝찝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샤워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보다 상태가 심한 사람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런 거로 호들갑을 떨기는 싫었다. 차헌과 드래곤이 한 공간에 있으니 다가올 마수들도 경계해야 했다.

그 마수들로 실험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

“그럼 씻고 나와.”

연우가 밖으로 향하자 드래곤이 비명을 질렀다.

[너, 너어는 진짜.]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은 연우가 팔찌를 노려봤다.

[어쩐지, 네가 차헌이랑 샤워할 리가 없지.]

왜? 같이 샤워할 수도 있지.

C 구역 훈련장만 가도 공용 샤워장이다. 연우가 적당한 바위에 자리를 잡으며 답하는데 드래곤이 혀를 쯧쯧쯧 찼다.

[이래서 연애 안 해본 애랑은 말이 안 통해.]

샤워가 연애랑 무슨 상관이야?

진지하게 물어본 연우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멀지 않은 나무 위에서 폭탄 바나나를 든 치키 몽키가 이쪽을 겨냥하고 있었다. 연우가 눈을 가늘게 뜨자 흠칫 놀란 치키 몽키가 달아나려는 듯 몸을 돌렸다.

어딜.

-끼익?

치키 몽키의 형상이 반쯤 사라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더니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연우는 밀려오는 두통에 눈을 감고 있다가 떨어진 치키 몽키를 확인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치키 몽키는 몸의 몇 군데가 사라진 상태였다.

또 실패했네. 얌전히 마석만 빼내려고 했는데.

요 며칠 계속 연습 중인 이능이었다. 지금까지는 연우의 발바닥이 땅에 닿아있다는 조건 하에 자신을 포함한 물질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것만 가능했었다. 하지만 드래곤과 계약한 이후 저쪽에서 이쪽으로 가져오는 것도 가능해졌다.

물체를 분절해서 옮기는 것보다 조금 더 세심한 조정이 필요하나, 꽤 유용한 능력이었다. 마나 코어의 크기는 여전했지만…. 이능의 수준이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내년쯤에는 공동 구역으로 이동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 다른 치키 몽키의 마석을 노리던 순간, 서늘한 팔이 연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날아가는 얼음 단검을 보던 연우가 작게 입을 삐죽였다. 내 사냥감이었는데.

“정리했는데도 계속 나오는 걸 보니까 던전이 크긴 진짜 큰가 봐요.”

차헌은 연우의 옆에 앉더니, 진액에 찌든 훈련복을 한쪽으로 던졌다. 저게 저기 있으면 얘는 뭘 입고 있는 거지? 힐끔 돌아보자 백두 길드복을 입은 차헌이 젖은 머리카락을 털고 있었다. 제복 형식의 백두 길드복도 제법 잘 어울렸다. 연우는 차헌을 훑어보며 어깨 부분을 매만졌다.

“작은 거 아냐?”

“조금요. 불편할 정도는 아니고.”

반장갑을 소중하게 말리고 있던 차헌이 연우를 뒤로 당겼다. 차헌의 발아래에서 피어난 얼음꽃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치키 몽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연우의 발목을 타고 올라온 얼음꽃이 손목에서 얼쩡거렸다. 연우가 다급히 팔찌를 노리는 얼음꽃을 쳐내자 신발을 신고 있던 차헌이 날 선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왜?”

[…나 방금 죽을 뻔했어. 쟤가 나 죽이려 했어!]

연우는 드래곤의 호들갑을 무시한 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색 눈동자가 선뜩 빛나는 것과 동시에 얼음벽이 허물어지며 폭포가 쏟아지는 계곡이 드러났다.

연우를 제 곁으로 잡아끈 차헌이 계곡을 노려보았다. 차헌을 시선을 따라 계곡을 향해 뻗어가던 얼음꽃 중 몇 송이가 연우의 발치에서 피어났다. 연우는 제 쪽으로 스멀스멀 기어 오는 얼음 덩굴에게서 팔찌를 숨기며 차헌에게 말을 걸었다.

“네 말대로 계속 나오는 걸 보니까 규모가 크긴 진짜 큰가 봐. 이만 사람들이랑 합류할까?”

차헌은 얼음꽃이 머금고 있는 마석을 챙긴 다음 잠시 기다려보라며 수건에 물을 적셔왔다.

“찝찝하겠지만 씻는 건 좀 있다가 해요. 어디 구멍이 났는지 마수가 계속 흘러들어오고 있는 것 같아요.”

혀를 찬 차헌이 연우의 머리카락에 묻은 진액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러게 아까 같이 씻지. 그러면 우리 연우도 샤워랑 연애의 관계에 대해서 배웠을 텐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따질 틈도 없이 류지아가 수풀을 해치고 나타났다.

“두 분 다 씻었어요?”

류지아는 진액으로 엉망이 된 베이스캠프를 버리고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기로 했다며 안내했다. 류지아를 따라 도착한 곳은 높이 솟아오른 나무였다. 위에는 침낭처럼 둥글게 말린 잎사귀에 길드원들이 한 명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슬슬 어두워지니까, 오늘은 이렇게 보내고 날이 밝으면 다음 구역으로 이동하려고요.”

차헌과 연우는 나란히 뻗은 잎사귀를 고른 뒤 식사 준비를 도왔다. 식사가 끝나갈 때쯤 길드원들은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들썩거렸다.

“다 못 먹는다니까.”

“이것만 먹어요.”

동 떨어 앉은 차헌과 연우만이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자, 지금부터.”

숟가락을 내려놓은 공격대장이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길드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두 시간 동안 자유시간.”

그 소리와 함께 식기를 정리한 길드원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여전히 빵을 씹고 있던 연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두 분도 자유롭게 토벌하세요.”

공격대장 역시 둘을 방생하고는 훌쩍 떠나버렸다. 백두 길드도 센터처럼 자신이 토벌한 건 자신이 취하는 구조인 모양이었다. 간신히 빵을 삼킨 연우가 차헌의 등을 떠밀었다.

“너도 갔다 와.”

“형은요?”

다른 각성자들과 달리 차헌에게는 팀이 없었다. 차헌은 혼자 가기 싫다며 손을 내밀었지만, 연우는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다.

“너는 견학생으로 들어왔지만, 그래도 나는 이방인이잖아. 아무래도 나서는 건 좀 눈치 보여서. 아까 같은 상황이 아니면 얌전히 있어야지.”

떠나지 않은 몇몇 팀이 차헌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저 사람들과 함께 다녀오라며 다시 한번 권했지만, 차헌은 연우의 옆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저 새끼들이 형 납치하면 어떡해요?”

“응?”

“갑자기 접촉한 것부터 존나 수상했어요. 도와주는 척하고 뒤통수치는 걸 수도 있잖아요.”

음, 배재영이 그랬지. 연우가 작게 동의하자 차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스를 권하더니, 이윽고 연우를 들어 올려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빵도, 주스도 거절한 연우는 괜찮다며 차헌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내 몸에 걸린 위약금이 얼마인데,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이번에는 제대로 마무리해야지.”

저번 견학에서 폭주한 경험을 떠올린 건지 차헌의 어깨가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형 덕분에 진정했다며 몸을 기대면서 깍지를 껴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같이 다녀요.”

꽉 잡힌 손을 내려보던 연우가 눈썹을 긁적였다. 슬슬 집으로 돌아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제 계획을 알 리 없는 차헌을 두고, 연우는 눈을 굴리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어…. 난 이제 좀 씻고 싶은데.”

“그럼 샤워장 만들어줄까요?”

동의한 연우가 적당한 곳으로 공간을 접자 차헌이 뚝딱뚝딱 샤워장을 만들었다. 씻는 동안 주변의 마수를 정리하겠다는 차헌의 말에 연우가 알겠다고 답한 뒤, 샤워장으로 들어가며 몸을 풀었다.

성공할 수 있겠지?

[….]

이게 불안하게 왜 대답이 없어.

팔찌를 노려본 연우가 마른침을 삼키며 물속을 바라보았다. 샤워하겠다는 말과 달리 연우는 훈련복을 벗지도 않은 채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백두 길드장이 함께 가자고 제안했을 때, 연우가 싫다고 거절했다면 차헌과 함께 던전에 들어올 필요가 없었다. 차헌도 함께 가자고 강요하지 않았을 테고. 그런데도 던전에 들어온 건 던전에 들어와야 할 수 있는 실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물 아래를 내려보던 연우가 흡, 숨을 참으며 아래로 잠수했다. 땅에 발끝이 닿는 것과 동시에 압박감이 느껴졌다. 압축된 튜브를 통과하는 듯한 괴로운 감각에 발버둥을 치면서도 연우는 반복해서 공간을 접었고, 마침내 좌표를 찾았다.

그곳으로 발을 떼는 것과 동시에 해방감 어린 숨이 터져 나왔다.

엎드린 채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연우가 고개를 들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것 봐, 내가 성공한다고 했지?]

“시끄러워.”

연우는 말없이 드래곤을 흘겨보다 머리카락에 묻은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도착한 곳은 연우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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