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씻고 나오셨습니까.
젖은 머리카락을 올려보던 로터스 길드장은 연우와 눈이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허리를 깊게 숙였다. 감히 눈을 마주쳤다며 자학할 기세에 한숨을 쉰 연우가 들어오라며 문을 열었다. 현관으로 떨어진 로터스 길드장은 연우의 집이 무슨 성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건한 자세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몇 번을 봐왔지만, 익숙해질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았고.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평소 방문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연우가 부르자마자 달려온 로터스 길드장이 공손히 물었다. 가방을 뒤적인 연우는 길드장 앞에 던전 부산물을 담은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곧 연화의 생일이잖아요.”
보따리를 챙기던 로터스 길드장은 연화의 이름이 나오자 머리를 깊게 조아렸다. 그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연화를 예언서로 생각하는 것들도 문제였지만, 자기들 마음대로 신성화하는 것들도 문제였다.
다른 길드처럼 미래를 알려달라며 귀찮게 굴지는 않았지만, 멀쩡한 사람을 보고 성녀라고 부르는 것도 정상은 아니었다. 웬만해서는 광기 어린 그들과 조금도 엮이고 싶지는 않았다.
찝찝한 얼굴로 로터스 길드장의 등을 내려보던 연우는 씻고 나온 척 들고 있던 수건을 목에 둘렀다.
“선물을 준비하고 싶어서요. 적당한 가격에 판매해주시고, 숙면 아이템에 관한 카탈로그가 있다면 챙겨와 주세요.”
“부족함 없이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정해진 시간 말고 제가 따로 호출하는 시간에 방문해주시겠어요?”
“부탁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연화 님의 종이니 언제든 편하게 명령하세요.”
이것 봐, 제정신 아니라니까.
“하지만 연우 님을 챙겨달라는 연화 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연우 님의 안전을 위한 것이니, 부름이 없으셔도 하루 한 번은 꼭 찾아뵙겠습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열쇠를 꺼내 보였다. 연락이 없으면 연화에게 알리겠다는 무언의 경고였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며칠에 한 번 방문하는 걸로 흥정을 봤을 텐데, 상대가 로터스 길드장이다 보니 쉽지 않았다.
매일매일 시간 맞춰 딱딱 방문하는 게 얼마나 칼 같은지, 백두 길드에 머무를 때 시간 맞춰 매번 왔다 갔다 하느라 얼마나 귀찮았는지 모른다.
로터스 길드장이 소중히 챙기는 열쇠를 보고 있자 배신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연화가 허용한 공간을 들락거릴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한연화, 이거는 오빠한테 줄 생각은 안 하고….
로터스 길드장이 내일 다시 오겠다며 공간을 떠난 뒤, 연우는 훈련복으로 갈아입었다.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자신이 이동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공간을 들락거릴 때처럼 그 흔적만 잘 따라가면 된다.
숨을 들이켠 연우가 던전을 향해 공간을 접어가던 순간이었다.
감각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뻗어 나온 손에 멱살이 잡혔다. 깜짝 놀라 도망가려 했지만, 발끝이 닿지 않아 쉽지 않았다. 물속에서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반항하던 것도 잠시, 연우는 익숙한 마나에 몸을 맡겼다.
그대로 수면 위로 끌려 올라간 연우는 숨을 토했다. 물이 들어갔는지 콧속이 따가웠다. 콜록거리던 연우는 온몸을 더듬거리며 놓고 온 부위가 없는지 확인했다. 멀쩡했다. 주먹을 쥐며 자축하고 있는데, 그대로 몸이 끌어안겼다.
“차헌아?”
허리와 목에 감기는 팔 때문에 숨이 턱 막혔다. 차헌의 옷을 잡고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더 압박감이 더 심해질 뿐이었다. 맞닿은 가슴으로 느껴지는 차헌의 심장박동이 너무 거세게 뛰고 있어 덜컥 불안해졌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연우는 고개를 돌려 차헌의 머리카락 색을 확인했다. 검은색. 멀쩡한데?
안긴 자세가 불편해 차헌을 밀어보았지만, 차헌은 자신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차헌이 떨리는 숨을 토해냈다.
“갑자기… 형이 안 느껴져서….”
“어, 음, 놀랐어? 미안. 다른 에스퍼가 실수할까 봐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있었거든.”
변명에 한참 동안 숨을 고르고 있던 차헌이 천천히 몸을 물리며 연우의 볼을 감싸 쥐었다. 차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살펴보다 무너지듯 연우를 끌어안았다.
“아, 형, 진짜….”
연우는 말없이 팔을 벌려 차헌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아니었다. 이동한 시간과 로터스 길드장과 독대한 시간을 합쳐도 5분도 채 걸리지 않은 시간이었으니까.
그 잠깐 동안 보이지 않는다고 이렇게 놀랄 줄 몰랐는데. 연우가 미안함을 담아 차헌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러다 갑자기 바뀐 시야에 연우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차헌이 연우를 끌어안은 채 어디론가 척척 걸어가고 있었다.
“차헌아, 잠깐만.”
벌써 자유시간이 끝난 건가? 싶어 주변을 살피던 연우는 차헌이 어디로 가는지 깨닫고 바둥거렸다. 다리를 있는 힘껏 뻗어봐도 발이 닿는 곳이 없었다. 이능이 섬세해졌으면 뭐 해! 발이 닿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데! 거칠게 혀를 찬 연우가 차헌의 뺨을 붙잡고 눈을 마주쳤다.
“너 지금 출구 찾는 거지.”
“네.”
“이대로 나가려고?”
“네.”
연우야 던전에 들어온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대로 나가도 상관없었지만, 차헌은 아니었다. 이전의 견학에서 폭주한 경험이 있으니 협회에게 눈도장이 찍혔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번 견학에서 중도 포기한다? 예전처럼 무능한 S급 타이틀을 달고 활동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줄 알고?
연우가 출구를 향해 몸을 돌리려던 차헌을 붙잡으며 다시 한번 눈을 맞췄다. 그렇게 눈을 맞추고 있자, 잔뜩 흥분해있던 차헌의 몸이 천천히 풀어지는 게 보였다.
“저번에도 이런 일로 싸웠던 것 같은데.”
“우리가 언제 싸웠어요, 그냥 의견이 안 맞았던 거지.”
그게 그거 아닌가? 눈을 굴린 연우는 차헌의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물을 닦아주었다. 이건 뭐 물에 빠진 생쥐도 아니고. 연우의 훈련복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어 닦아내는 보람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끈질기게 물을 닦아준 연우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나도 알아.”
“형이요? 절대 모를걸요.”
“글쎄….”
눈을 내리깐 연우가 옅게 웃었다. 드래곤과 계약하면서 섬세해진 건 이능뿐만이 아니었다. 과거의 기억 또한 점점 선명해졌다. 떠오르는 문장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흔든 연우는 차헌과 눈을 맞췄다. 처음에는 인과율의 부메랑을 피하고자 차헌을 돕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연화는 물론, 차헌을 위해 확실히 미래를 비틀 것이다. 조금만 떨어져도 이렇게 벌벌 떠는 애를 어떻게 혼자 남겨둬.
연우는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차헌의 머리카락을 털어주다 손목에서 찰랑거리는 팔찌를 쳐다보았다. 던전과 바깥세상을 오갈 수 있다는 게 확인되었으니 계획을 실행에 옮길 날도 머지않았다. 그렇다면,
“형.”
다급히 팔을 잡는 차헌의 손에 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차헌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연우의 눈 밑을 쓸어내렸다.
“방금….”
“방금?”
평소와 똑같은 연갈색 눈동자가 차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연우의 눈동자가 내리쬔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빛 때문에 잘못 본 건가? 분명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그때, 볼을 매만지던 차헌이 얼음벽을 세워 날아오는 단검을 막았다.
“앗, 죄송합니다!”
단검을 쫓아 온 방어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수를 쫓아왔다며 사과하자 연우가 괜찮다고 답했다. 죄송하다는 사과가 몇 번 더 이어지고 나서야 백두 길드원이 자리를 떠났다.
“아무튼 이제 내려줘.”
차헌은 내려줄 생각 따위 조금도 없어 보였다. 품에서 버둥거리던 연우가 옅게 한숨 쉬며 차헌을 올려봤다.
“이번에도 계속하려면 너 대신 마수를 죽여야 해?”
“네?”
“네가 선택해. 나는 나가겠다고 한 적 없어.”
연우의 말에 차헌의 눈썹이 치켜 올랐다 내려앉았다.
“아니, 그때는 형이 다쳤는데도 계속하려고 하니까 그냥 나가자고 한 거잖아요. 아, 제발 잊어주면 안 돼요?”
“지금은? 내가 다쳤어?”
그때 형한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차헌이 칭얼거리며 연우를 살폈다. 차헌에게 멱살이 잡힌 걸 제외하면 연우는 공격받은 적도 없고 멀쩡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차헌이 과민반응 한다는 건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겠지.
“마무리해야 한다는 건 너도 알잖아. 그리고 센터한테 빚을 갚으려면 여기서 마석도 좀 챙겨가야지.”
연우의 설득에도 차헌은 불안한 표정으로 연우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다치면 어떡해요.”
“에스퍼 보험비가 비싼 이유를 이제 알았어?”
연우가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차헌의 표정은 심각하기만 했다. 덩달아 심각해진 연우가 차헌의 어깨를 밀어내며 말했다.
“걱정하는 네 마음은 알겠는데, 너도 알잖아. 에스퍼로 각성한 이상, 평화에 협조해야 한다는 거. 내가 던전에 들어갈 때마다 이렇게 날 밖으로 내몰 셈이야?”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어요.”
한숨을 쉰 차헌이 연우를 조심스럽게 내려주며 손을 붙잡았다. 서늘한 체온과 달리 차헌의 손은 언제나처럼 포근하기만 했다. 차헌은 이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동상 자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요즘은 어때요? 이능은 멀쩡해요?”
멀쩡하다마다. 방금은 집까지 다녀왔는걸.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턱에 힘을 준 차헌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빨리하고 나가요.”
차헌이 몸을 돌리고 발을 뻗자, 얼음 덩굴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차헌이 근방의 마수를 정리하는 동안 보조 가방에서 수건을 꺼낸 연우가 한 장은 자신의 머리에, 한 장은 차헌의 손에 쥐여주었다.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데 손끝이 물에 불어 조글조글해져 있었다.
내일은 어떻게 빠져나가지. 열심히 공간을 왔다 갔다 하며 로터스 길드장을 속이고 있지만, 연화가 꿈에서 깨는 순간 들킬 촌극이었다. 들키기 전에 해결해둬야 할 일이 많았다. 던전에서 던전으로 넘어갈 수 있는지도 실험해보려고 했는데….
혀끝을 깨문 연우는 차헌을 힐끔거렸다. 이번에도 말없이 사라지면 차헌이 자신을 던전 밖으로 끌고 나갈지도 몰랐다. 어떡하지.
네가 나인 척은 할 수 없나?
[나를 여기에 혼자 두고 가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드래곤이 삑삑거리고 있을 때, 머릿속으로 종이 징, 울렸다.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라는 신호였다. 차헌을 붙잡고 공간을 이동하니 길드원들이 신난 얼굴로 나무로 모여들고 있었다.
“와, 강차헌 에스퍼. 길드복이 너무 잘 어울린다. 군청색이랑 하늘색 눈동자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줄은 몰랐는데요.”
“그러게요. 우리 길드복이 이렇게 멋있는 옷이었어?”
노골적인 칭찬에 차헌이 몸을 돌려 연우를 바라보았다. 적당히 웃어주고 있자 길드원이 다가와 연우의 젖은 몸을 말려주었다. 차헌에게도 이능을 사용해준 길드원은 대가로 제 몸만 한 얼음을 받아 갔다.
보송해진 몸으로 저녁을 먹고 자리까지 얼추 정리하니 불침번이 정해졌다. 차헌과 함께 세 번째 순서로 배정받은 연우가 미리 정해둔 나뭇잎으로 했다.
“왜 따라와?”
“혹시 몰라서요.”
연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차헌을 바라보았다. 나뭇잎을 벌린 차헌이 몸을 구기며 연우의 옆에 누웠다. 나뭇잎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굳이 같이 잘 필요가 있나?
다른 사람도 그러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자, 나뭇잎에서 탱자탱자 놀고 있던 백두 길드장과 눈이 마주쳤다. 연우가 민망해하는 모습을 본 백두 길드장은 괜찮다는 듯 웃어주며 자신의 페어를 불렀다.
“원래 페어는 모든 걸 같이 하는 법이지. 안 그래, 자기?”
“꺼지세요.”
“앙칼지긴.”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