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형. 일어날 수 있겠어요?”
조심히 어깨를 흔드는 손짓에 연우는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중간에 자다 깬 연우가 제발 네 나뭇잎으로 가라고 부탁해봤지만, 차헌은 묵묵히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기도 더워서 얼굴이 벌겋게 익어서는 뭔 고집인지. 말없이 훈련복을 팔락거리고 있자 차헌이 얼음팩을 쥐여주었다.
“아직 시간 좀 남았지?”
연우는 다른 사람들이 깰까 조용히 속삭이며 차헌의 손을 잡고 계곡으로 이동했다. 교대 전에 찬물에 씻어야겠다 싶어 소매를 걷는데, 차헌이 건빵을 내밀었다.
눈을 뜨자마자 이게 입으로 들어가나…? 조용히 쳐다보자 차헌은 이미 입 안 가득 건빵을 밀어 넣고 있었다. 목도 안 막히나 보다. 물병을 건넨 연우는 흐르는 물에 손과 목덜미를 씻어냈다. 차헌이 나무 곳곳에 설치해둔 얼음이 아니었다면 벌써 누구 하나 쓰러졌을 살인적인 더위였다.
계곡에 손을 담그고 열을 식히고 있는 동안 불침번을 섰던 길드원들이 하나둘씩 돌아왔다. 그들과 교대하며 베이스캠프 앞에 자리를 잡았는데 길드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해요?”
“네? 불침번 서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하하. 말이 불침번이지 그냥 자유시간이에요.”
길드원은 머쓱하게 웃으며 아무래도 단체 생활하다 보면 억눌러야 하는 것도 있고,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도 있으니 차례를 정해 한 팀씩 날뛰고 온다고 설명했다. 시간 내에 돌아오기만 한다면 상관없다는 말까지 덧붙인 길드원이 멀리멀리 손짓했다.
“센터랑은 다르네요.”
“그러게, 우리는 자리 이탈하면 명령 불복종으로 벌점 받지 않나?”
연우는 신기하단 표정으로 하나둘 떠나는 길드원을 보고 있다가 차헌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도 갈까?”
차헌이 손을 붙잡자 연우는 길드원들과 반경이 겹치지 않는 곳으로 공간을 접었다. 적당한 공터로 자리를 이동한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이 어스름히 밝아오고 있었다. 잠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연우가 찡얼거리는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맛있겠다…. 먹고 싶다….]
혹시 몰라 집에서 실컷 먹이고 나왔는데도 드래곤은 침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보채고 있었다. 드래곤의 입장에서는 눈 앞에 펼쳐진 뷔페 입구에서 주린 배만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 이해는 가지만…. 연우는 떨어질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차헌을 힐끔거렸다.
배재영의 무리를 처리하면서 모아놓은 마석도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배를 채우고 가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드래곤의 본모습을 차헌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차헌이 연우를 붙잡았다.
“카디건 안 들고 왔죠?”
“들고는 왔는데, 왜?”
설마 이 날씨에 입으라는 건 아니겠지? 장난치냐는 연우의 표정을 본 차헌이 나뭇가지 위에 얼음 둥지를 만들었다. 누가 보면 신종 마수의 둥지라고 착각할 정도로 정교한 모양새였다.
“피어싱은요?”
“안 들고 왔는데?”
환불하려고 따려 챙겨뒀다. 연우의 말에 한숨을 쉰 차헌이 오른쪽을 노려보았다. 주변에 마수가 너무 많아 정리를 좀 해야겠다는 말에 연우가 반색했다. 얌전히 둥지에 있을 테니 다녀오라는 인사와 함께 나무 위로 이동하려던 때였다. 연우의 손을 붙잡은 차헌이 깍지를 꼈다.
“가이딩해 주세요.”
아, 맞다.
연우는 차헌의 손을 잡고 티스푼을 떠올렸다. 한 입 먹이려는 순간 차헌이 팔을 벌리고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몇 번 가이딩을 떠먹이자 나른한 한숨을 흘린 차헌이 습관처럼 연우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다 천천히 떨어졌다.
연우는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려 손을 뻗었다가 그대로 굳었다. 이런 비유를 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맹수 앞에 선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시선에 갇힌 연우가 어쩔 줄 모르고 마른침만 삼키고 있자 차헌이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풀며 천천히 몸을 물렸다.
“다녀올게요.”
차헌이 멀어지고 난 뒤에도 연우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드래곤이 본체를 드러내 연우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빨리빨리, 재촉하는 드래곤에게 망고를 따서 내미는 것과 동시에 차헌의 마나가 폭발하듯 뻗어나가는 게 느껴졌다.
손목에 매달린 드래곤이 게걸스럽게 망고를 먹어 치우다 투덜거렸다.
[원래 크기면 한입에 꿀꺽인데!]
“그랬다간 바로 들킬걸.”
턱이 아프다고 꿍얼거리면서도 드래곤은 부지런히 과육을 베어 먹었다. 앞에 망고 씨앗이 수북이 쌓일 때쯤, 하늘이 환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됐다며 만족한 드래곤이 팔찌로 돌아간 뒤 연우는 씨앗을 치우다 말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어?]
그냥, 예뻐서.
파랗기만 하던 하늘에 점점 노란색이 물드는 광경이 제법 아름다웠다. 노란색이 점점 진해지며 황금빛으로 변하는 하늘을 보고 있자 차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금방 왔어?”
“형 보고 싶어서요.”
음. 그렇군. 어색하게 시선을 돌린 연우가 하늘을 바라봤다. 황금색이 점점 진해지며 동이 트는 게 보였다. 씻고 온 건지 차헌이 물기를 털며 나무를 타고 올라와 연우의 옆에 앉았다. 시선에 볼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꿋꿋하게 하늘을 보던 연우가 결국 고개를 돌려 차헌을 바라봤다.
“왜?”
“안아도 돼요?”
시도 때도 없이 몸을 붙여올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허락을 받아? 어이가 없어 미간을 찌푸리자 차헌이 슬그머니 연우의 시선을 피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엉뚱한 소리라는 건 아나 보다. 밉지 않게 피식 웃던 차헌이 새끼손가락만 얽어왔다.
“그냥 앞으로는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안아도 돼요?”
허락을 구하는 말에 연우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매만지던 차헌이 팔을 뻗었다. 평소처럼 체중을 실어 덥석 안겨드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몸을 기대며 연우를 끌어안았다.
등을 받치는 손에 시선을 내린 연우가 손가락을 꿈질거렸다. 기억을 되찾더니 철이 든 건가? 머리부터 등까지 쓸어내리는 차분한 손길에 연우는 조금씩 가이딩을 건네준 뒤 차헌의 어깨를 밀었다.
“이제 우리 들어가야겠다.”
어느새 해가 반쯤 떠올라있었다. 차헌은 말없이 팔을 벌려주었다. 연우가 차헌의 품에서 떨어지려던 그때,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펼쳐놓은 감각에 무언가 감지되었다. 이내 붕, 부웅, 하는 날갯소리도 들려왔다. 차헌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손짓한 연우는 마나 반응이 느껴지는 곳으로 공간을 접었다.
[와우.]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연우의 몸집의 몇 배만 한 벌집이 달라붙어 있었다. 기다란 전투 꿀벌과 배가 통통한 폭탄 일벌을 확인한 연우는 곧바로 차헌에게 돌아가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왜요? 뭐 있어요?”
“넌 들어가 있어.”
연우는 돌돌 말린 나뭇잎 안으로 차헌을 집어넣은 후 공격대장에게 발견한 것을 보고 했다. 다른 길드원들도 다가오는 벌떼를 감지했는지 정신계를 통해 각성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벌이라는 말에 차헌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런데도 나뭇잎에서 꾸역꾸역 빠져나오려는 차헌을 연우가 막아섰다.
“너 벌에 쏘여도 괜찮아? 백두 길드장님이 있지만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냥 안에 있어.”
“그럼 형도 같이 있어요.”
차헌이 자신의 훈련복을 꽉 붙잡느라 연우는 주변 나뭇잎을 몇 장 떼어와 성벽처럼 차헌의 주변에 둘러주었다. 나무 아래에서는 백두 길드가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제일 선봉에 선 백두 길드장이 향을 피우자,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스캠프를 둥글게 둘러싼 전투 꿀벌이 침을 앞으로 내민 채 웽웽거렸다.
공격계 중 하나가 총을 발사하는 것과 동시에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방어계가 포탄처럼 날아오는 침을 굳건하게 막아냈다. 곧 대기하고 있던 보조계들이 침과 연결된 내장을 잡아당겼다.
손을 맞춘 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날개를 제거하는 동안, 꿀벌의 뒤로 이동한 공격계들은 자신의 이능대로 날뛰었다. 연우는 다양한 방법으로 죽어 나가는 꿀벌을 바라보다 입술을 말아 물며 꿀벌 하나를 집중해서 노려보았다. 좌표를 잡은 연우가 그대로 이능을 사용했다.
꿀벌이 추락해 연우의 손 위로 묵직하게 떨어졌다. 마석을 확인한 연우가 뿌듯하게 웃었다. 이제 어떻게 하는지 알겠다.
[그거 나 줄 거지?]
연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이능을 사용하려던 순간, 돌풍이 몰아치며 꿀벌이 찢겨나갔다. 다른 목표를 찾아보았지만 날뛰는 공격계들 덕분에 멀쩡한 꿀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붕붕거리는 날갯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무렵, 강화계의 손에서 간신히 도망간 꿀벌이 하늘 높이 오르더니 8자로 날기 시작했다. 차헌이 긴장한 기색으로 몸을 붙여왔다. 곧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일 정도의 벌떼가 베이스캠프를 에워쌌다.
이번에는 전투 꿀벌뿐만 아니라 폭탄 꿀벌도 사이사이 섞여 있었다. 천지가 무너질 것 같은 날갯소리 사이로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부터 흩어져서 여왕벌을 찾습니다. 다른 벌들과 달리 날지 않으며 퇴화한 날개가 망토처럼 늘어진 게 특징입니다.]
명령이 떨어지자 백두 길드원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연우도 차헌을 붙잡고 공간을 접었다. 벌들에게서 최대한 멀어져야 했다. 연우는 물가에 자리를 잡고 식은땀이 흥건하게 고인 차헌의 손을 닦아주었다. 말없이 손을 맡기고 있던 차헌이 연우를 손을 붙잡았다.
“왜?”
“제가 지금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러는데, 형한테 제가 벌에 쏘인 적이 있다고 말했어요?”
혼란스러운 표정에 연우는 말없이 차헌의 턱 아래를 가리켰다. 차헌이 턱을 긁을 때 제일 먼저 손이 나가는 부위였다.
“그거 벌에 쏘인 흉터 아냐?”
어? 하는 표정으로 차헌이 턱을 더듬어보다 이내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알고 있었구나.
납득하는 차헌을 보며 연우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말한 적은 없지만, 본적은 있었다. 산림형 던전에서 벌에 쏘여 온몸이 부풀어 오른 에스퍼를 간호하던 차헌이 양궁 훈련 중 벌에 쏘였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었다. 아무래도 책에서 봤다는 얘기는 아무래도 안 하는 게 좋겠지…?
불편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보던 연우가 붕붕거리는 소리에 주변을 살폈다. 일부러 물가에 자리를 잡았는데 폭탄 일벌과 전투 꿀벌 몇 마리가 팀을 이뤄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너 때문이지?
[살려줄 거지?]
팔찌를 비튼 연우는 굳어있는 차헌을 붙잡고 공간을 이동했다. 한 마리라면 덤벼보겠지만, 떼로 덤비는 벌과 싸우는 도박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차헌이 쏘이면 위험하기도 하고.
그렇게 몇 번 더 공간을 접으며 도망을 다녔는데, 여왕벌을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베이스캠프로 돌아간 연우의 눈에 포박당한 여왕벌이 보였다.
“이상하네요….”
레이스처럼 늘어진 여왕벌의 날개를 찢어 태웠음에도 벌들은 흩어지지 않고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점점 더 늘어나는 벌떼를 보다가 연우와 차헌을 불렀다.
“견학은 끝났으니 이만 둘은 돌아가요.”
“네?”
“다른 종류의 벌도 섞여 있는 걸 보니 사태가 심상찮아요. S급이 두 명이나 있으니 대비를 하긴 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이러다 다치면 한연화 에스퍼가 나를 산 채로 삶아 죽일걸요.”
차헌 역시 나가는 게 좋겠다고 동의했다. 이에 백두 길드장이 류지아를 불러 출구를 알려주었다. 차헌의 손을 잡고 출구 쪽으로 공간을 접었을 때, 연우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항상 서늘하던 차헌의 체온에 열이 올라 있었다.
“왜요?”
“옷 좀 벗어봐. 너 열나. 벌에 쏘인 거 아냐?”
“네? 아뇨? 그런 적 없는데.”
고개를 저으면서도 차헌은 순순히 길드복을 벗었다. 혹시 제가 못 본 사이에 벌에 쏘인 게 아닐까 몸에 박힌 벌침을 찾던 연우가 몰려오는 현기증에 이마를 짚었다. 류지아 또한 포션 키트를 펼쳐 차헌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침음을 흘렸다.
“음, 강차헌 에스퍼가 각성한 지가 지금….”
“다음 달이면 반년째예요.”
대답과 동시에 탄식이 나왔다. 설마. 중얼거리자 류지아도 뭔가 집히는 게 있다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지금 몇 번째 던전이죠?”
“가상 던전을 포함하면 네 번째입니다.”
“각성열이네요. 보통 일 년째에 오는데, 강차헌 에스퍼는 아직 미성숙한 마나 코어로 던전 마나에 너무 오래 노출되어 시기가 당겨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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