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92화 (92/143)

92화

내가 이걸 또 앓아야 한다니.

멍하니 회색 천장을 올려보던 차헌이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힘들었다. 눈을 감으니 온몸이 끈적하게 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밀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기고 있던 차헌이 눈을 뜨자 이전과 다른 장소가 보였다.

차헌은 주변을 둘러보다 손목을 내려봤다. 손끝으로 손목을 가로지르는 우둘투둘한 흉터를 더듬으며 차헌이 작게 중얼거렸다. 꿈이구나. 물속을 부유하는 듯한 묘한 기분에 차헌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 책상 위에 놓인 신문을 들어 올렸다.

<강차헌 에스퍼, 대한 센터의 센터장이 되다.>

4년 전 S급 던전을 단신으로 공략한 대한 센터 소속 강차헌 에스퍼가 지난 27일,

내용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신문을 던져버린 차헌이 헛웃음을 흘렸다. 단신은 무슨. 그렇게 한연우의 이름을 알리고 다녔는데도 세상은 아직도 차헌의 힘을 강조할 뿐이었다. 커튼을 젖히고 센터 부지를 내려보던 차헌은 유리창에 쿵, 하고 이마를 박았다.

‘진정하세요. 대한 에스퍼 소속 한연우입니다.’

혼자 남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강차헌!’

제게는 던전을 빠져나가는 법을 알려주고, 자신은 영원히 던전에 갇혀버린 사람의 목소리.

이제 무감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한연우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쪽이 공허해졌다. 수북이 쌓인 신문을 바라보던 차헌이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책상 위의 신문은 물론이고 모든 언론이 단신으로 던전을 공략한 차헌을, 그런 차헌을 구하고 죽은 이상원을 칭송하고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한연우의 이름을, 연합팀의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 아들의 욕심이 사람들을 몰살시켰다는 걸 인정하지 않은 이상원의 부모와, 센터에 이상원의 뒤를 이을 만큼 뛰어난 에스퍼가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한 협회의 합작품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다고 무시할 때는 언제고, 센터는 차헌이 혼자서 살아나오자 차헌의 능력을 포장하기 바빴다.

그 과정에서 한연우는 물론, 던전에서 죽어 나간 사람들의 희생은 모두 없던 것들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한연우를, 그 던전에서 죽어 나간 연합팀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차헌은 센터장이 되었다.

궁금했다. 왜 나를 살렸을까. 그렇게 살려고 버둥거렸으면서 왜 마지막에는 미련 없이 자신을 살리고 죽었을까.

눈을 깜박이니 센터장실이 허물어지며 자그만 원룸이 보였다. 원룸 여기저기에는 액자가 장식되어있었다. 활짝 웃는 한연우의 사진을 보던 차헌은 두 손으로 액자를 쥐었다.

한연우.

그렇게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난 것 치곤, 한연우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하게 키우는 동생이 있었다. 웬만큼 돈을 번 뒤에는 독립하고 기숙사에서 산다기에 돈이 없어서 막대한 보험금이라도 걸어놓고 죽었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사람과 자신이 죽고 못 살 만큼 친했나? 대체 무슨 생각으로 처음 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세상을 떠난 걸까.

수많은 의문에 대답해줄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차헌은 말없이 왼손을 내려보았다. 그 사람이 미련으로 남아 손에 매달려있었다. 그래서 한연우에 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처음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덩치가 큰 편이었고, 덕분에 싸움이 생긴다면 제일 앞에 나서는 편이었다. 그때부터 코치진들의 눈에 띄어 양궁부에 들게 되었고, 그 이후로 계속 주장을 맡아왔던 터라 무슨 일이 생기면 차헌이 앞장서야 했다.

에스퍼로 각성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건 이후로 차헌은 항상 S급이라는 이유로 선두에 서야 했다.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한다면 누군가에게 지킴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왜 나를 구했어요?

* * *

눈을 뜬 차헌은 반사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었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갈급증에 짜증이 치밀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던 차헌은 슬금슬금 뻗어오는 가이딩에 주먹을 내려쳤다.

주먹이 침대에 꽂히는 것과 동시에 사방으로 얼음이 날아갔다. 얼음에 마나를 섞어 날리자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이때다 싶어 차헌에게 가이딩을 해보려고 다가왔던 가이드들이 도망가는 소리였다.

이제 한동안 조용하겠지.

돌아누운 차헌은 회색 천장을 올려보았다. 그냥 숙소에서 지내면 안 되나? 사람을 병실도 아닌 컨테이너에 가둬놓고 지켜봐야 하나? 컨테이너 주변으로 방어막이 몇 겹이나 덮여있는 것도 기분이 더러웠다. 안 그래도 각성열로 예민해진 마나 코어는 다른 에스퍼의 이능이 느껴질 때마다 심장을 거칠게 쥐어짜 댔다.

연우가 있었다면 머릿속을 송곳으로 헤집는 두통도,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열도 사라질 텐데. 격리되기 전에 손이라도 잡아볼걸. 연우 대신 베개를 끌어안은 차헌은 몰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형 보고 싶다….

“열이 많이 나네.”

이마에 손이 닿는 순간 차헌이 눈을 반짝 떴다. 현실과 꿈의 경계를 구분하기 위해 미간에 힘을 주자, 시야가 또렷해지며 침대에 걸터앉은 연우가 보였다.

…꿈인가?

“목은 안 말라?”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차헌의 앞으로 물병이 달랑거렸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중얼거리며 물병을 받아 들자, 넘쳐흐른 이능 때문에 물병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이고.”

혀를 찬 연우는 새로운 물병을 꺼내 차헌의 입가에 기울였다. 차헌은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려 물을 받아마시면서도 눈을 끔벅이며 연우를 쳐다보았다.

“형이에요?”

“너 아직도 내 마나 못 알아봐?”

“아니, 알아봤으니까 의심도 하지 않고 물도 받아마시고 그랬죠.”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마에 손을 대자마자 날려버렸을 거다. 차헌은 눈으로 연우의 행동을 쫓으며 얌전히 물을 마셨다. 그러다 시선을 힐끔 돌려 컨테이너 입구를 봉인하고 있는 아이템을 쳐다봤다.

“아니, 근데 어떻게 들어왔어요?”

“조용히 해. 몰래 들어온 거니까.”

검지로 쉿, 손짓한 연우가 차헌의 상태를 확인했다. 젖은 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아주는 행동만으로도 나른한 숨이 흘러나왔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던 차헌이 입술을 깨물며 뒷짐을 지었다.

그대로 침대에 누우니 이마에 손을 얹고 있던 연우가 가이딩을 흘려 넣었다. 열기를 가라앉히는 가이딩에도 입안이 말라왔다. 항상 흘러넘친다고 생각했던 연우의 가이딩이 감질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헌은 충동을 이겨내기 위해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음, 차헌아. 안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 봐.”

연우의 말에 도망가듯 침대 안으로 들어간 차헌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연우가 침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숙소나 센터의 훈련장과 달리 임시로 마련된 컨테이너의 침대는 차헌이 몸을 눕히기에도 빠듯한 크기였다. 차헌은 연우가 누울 수 있도록 몸을 웅크리면서 연신 눈을 깜박였다.

아무래도 꿈이 아닐까? 뺨을 내려치고 싶은 충동에 손을 들어 올리자, 팔을 벌리고 있던 연우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춰왔다.

“안아도 돼?”

“네….”

차헌의 얼이 빠진 대답에 연우가 스스럼없이 차헌을 끌어안았다. 시트를 움켜쥔 손에 땀이 흠뻑 배고,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을까 긴장되는 것과 별개로 어딘가 서러워졌다.

방금 저를 올려보던 연우의 눈에는 조금의 애정도, 긴장감도 없었다. 목을 끌어안고 몸을 붙여오는 행위에는 애정이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얘가 각성열로 고생하니까 가이딩으로 좀 달래줘야지, 하는 의무감뿐이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서운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뭐가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연우랑 닿을 수 있는데 의무감이든, 동정심이든 알게 뭔가. 고개를 숙인 차헌이 연우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볐다.

확실히 닿은 부위가 넓어지자 흘러들어오는 가이딩의 양도 늘었다. 차헌은 두통이 가라앉는 게 느껴지자 천천히 몸을 물렸다. 심장을 짓누르던 마나 코어가 안정을 되찾았고 몸의 상태도 호전되고 있었다.

“좀 괜찮아?”

엉덩이부터 뒤로 뺀 차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아직도 열기가 남은 차헌의 이마를 짚어보며 다시 팔을 벌렸다.

“아직 열나잖아.”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차헌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닿으면 제 욕망을 참을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안 참으면 되잖아? 나는 지금 아프고, 가이딩 중에서는 점막 가이딩이 제일 효율적인 건 나도 알고 형도 아는 사실인데?

차헌은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 채 연우의 어깨를 슬며시 밀어냈다. 연우에게 고백한 그날 이후, 치미는 충동을 참지 못해 나름대로 선을 그어놓았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각성열을 앓게 될 줄 몰랐다.

보고 있으면 닿고 싶었고, 손을 잡으면 안고 싶었고, 안으면….

정말 괜찮냐고 오물거리는 연우의 입술 때문에 차헌은 몸을 돌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연우와의 첫 키스를 이런 곳에서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컨테이너라니! 갇혀있느라 씻지도 못했는데! 첫 키스는 조금 더 분위기 있고, 좋은 곳에서, 형이 내 고백을 받아줬을 때 할 것이다.

근데 그런 다짐을 할 때마다 연우가 제 품에 안겨 정신없이 혀를 빨던 감촉이 떠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차헌아.”

눈치도 없이 어깨를 흔드는 연우의 손길에 팩 쏘아본 차헌이 꿍얼거렸다.

“형한테 뽀뽀하고 싶으니까 떨어져요.”

차헌의 웅얼거림에 침대에서 일어난 연우가 곧바로 공간을 접었다. 결계처럼 겹겹이 쌓여있는 방어막에 걸리지 않도록 바닥을 통해 집으로 향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가려던 연우는 거울을 보고 깜짝 놀라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각성열은 차헌이가 앓는 거 아니었어?]

“조용히 해.”

연우의 어깨를 타고 기어오르던 드래곤이 쿡쿡 웃으며 꼬리로 연우의 볼을 쿡, 찔렀다.

[아주 그냥 터지겠어.]

“시끄러워.”

드래곤을 잡아 침대로 던져버린 연우는 이마 끝까지 붉어진 제 얼굴을 힐끔거리다 뺨을 감싸 쥐었다. 베개에 얼굴을 박은 채 꿍얼거리던 차헌의 모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서둘러 공간을 이동하지 않았더라면 된다고 허락, 아니 제가 먼저 입술을 갖다 박을 뻔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9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