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연우야, 이것 좀 봐.]
드래곤이 코끝에 체리를 올려놓은 채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고개를 요리조리 옮겨가며 중심을 잡던 드래곤이 몸을 움직이자, 또르르 굴러간 체리가 몸을 타고 꼬리로 이동했다. 연우는 흐흥, 웃는 드래곤의 뿔 사이를 쓰다듬어준 뒤 다시 다이어리를 내려봤다.
[연우야, 연우야.]
오늘따라 왜 이러지? 연우가 계획을 짤 때면, 드래곤은 이런저런 참견을 하며 끼어들 때가 많았다. 그래도 보통은 얌전히 똬리를 틀고 기다리는 편이었다. 펜을 내려놓은 연우가 고개를 들자 드래곤이 꼬리 끝으로 체리를 들어 올렸다. 뭐지? 배가 고프다는 무언의 항의인가?
“왜?”
[세상에, 뭐가 연우고, 뭐가 체리지?]
뭔가 했더니. 연우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드래곤의 멱살을 쥐었다. 깔깔깔 웃으며 연우를 놀리던 드래곤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손아귀에서 스르륵 빠져나왔다. 그런 드래곤을 노려보는 연우의 이마는 터질 듯 붉었다.
연우는 도망가는 드래곤을 낚아채 침대로 던져버린 다음, 다시 차분하게 다이어리를 내려보았다.
곧 센터 구역 내에 게이트가 발견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첫 번째 계획을 준비하면 된다. 다시 한번 계획을 복기해보던 연우가 책상에 펜을 두드렸다. 첫 번째 계획은 완성되었지만, 두 번째 계획은 아직 틀도 잡지 못했다.
드래곤이 게이트를 열어준 덕분에 배재영 무리의 잔챙이들은 쉽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수뇌부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무리가 실종되며 몸을 숨긴 수뇌부들을 끌어낼 만한 미끼가 필요했다.
내가 나서는 게 제일 효과적이긴 할 텐데. 어떻게 끌어내지….
한 번에 일망타진시켜야 다시는 까불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무리를 해체해야 했다.
[그동안 차헌이가 떨어져 있으려 할까?]
그러니까.
그동안 강차헌을 어떻게 떼어놓을지 생각도 해놔야 하는데…. 이마에 열이 뻗쳤다. 차헌의 이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몸이 달아올랐다.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이 감각이 뭘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다이어리에 집중하려 했지만, 연쇄적으로 터져나가는 차헌의 생각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날 차헌을 찾아갔던 건 정말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각성열을 앓는 동안 반쯤 방치되어있었던 연우와 달리, 차헌은 알뜰살뜰하게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차헌이 애도 아니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마나 코어가 심장에 완벽히 융화되는 그 기간만 기다리면 되는데…. 그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센터가 차헌을 방치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차헌이 아픈 틈을 타서 다른 가이드들이 각인을 시도할 수도 있었다.
잠깐 보고 올까? 하는 생각보다 이능이 먼저 반응했다.
갑자기 센터로 이동해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상황 파악을 마친 연우는 센터 부지 내에 있는 컨테이너를 바라보았다. 예전 차헌이 폭주했을 때처럼 방어계와 가이드가 차헌을 둘러싸고 있었다. 불투명하게 일렁거리는 방어막을 보던 연우가 작게 혀를 찼다.
저렇게까지 과잉 반응할 필요는 없지 않나? 차헌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도 아니고….
이제 확인했으니 집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저렇게 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은 거면? 잠시 고민하던 연우는 몸을 돌려 컨테이너로 향했다.
내부로 들어서자 걱정이 무색하게도 차헌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따금 작게 끙끙거리는 걸 제외하면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좁은 침대에서 뒤척이던 차헌이 연우의 기척을 느꼈는지 손을 뻗었다. 연우는 칭얼거리는 차헌에게 다가가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열이 많이 나네.”
이마에 손을 올려놓는 순간, 차헌이 눈을 반짝 떴다. 연우는 하늘색 눈동자에 차오르는 이채를 보며 익숙하게 수발을 들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헛소리를 하는 것이, 보기와 달리 열이 많이 오른 모양이었다.
수건을 물에 적셔 식은땀을 닦아주던 연우가 차헌의 이마에 손을 올려두었다. 조심히 가이딩을 흘려 넣자 차헌이 게걸스레 빨아들이는 게 느껴졌다.
[조심.]
드래곤의 경고대로 마나 코어를 확인하며 가이딩하던 연우가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로터스 길드장이 방문할 시간이었다. 떠나기 전에 열이라도 떨어트려 놓고 갈까, 싶어 차헌의 옆에 누웠다.
평소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차헌의 등을 도닥이던 연우가 드래곤에게 물었다. 마나 코어는 크기를 못 키우나? 그럼 한 방에 가이딩할 수 있을 텐데.
[음.]
음? 크기를 키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물어본 거였는데…. 방법이 있는데 말할 수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무는 반응이 수상했다. 연우는 딴청을 피우는 드래곤을 채근하면서도 바르작거리는 차헌을 확인했다. 꾸물꾸물 멀어지는 차헌의 어깨를 붙잡은 연우가 체온을 확인했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 열이 떨어질 때까지 가이딩을 해줄 생각이었는데,
“형한테 뽀뽀하고 싶으니까 떨어져요.”
그렇다면 떨어져 줘야지. 분명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작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뭐가 이렇게 귀엽지? 로 시작된 생각은 하고 싶으면 하면 되잖아, 로 끝났다.
점점 차헌에게로 기우는 몸에 연우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서둘러 집으로 이동했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심장 속에 자리를 잡은 차헌이 내벽을 콩콩콩 내려치는 것만 같았다.
결국 다이어리를 덮고 일어난 연우가 핸드폰을 보고 있던 드래곤에게 손짓했다.
“산책 갔다 오자.”
[고민 끝났어?]
고민은 모르겠고 계획 구상은 끝냈다. 챙겨놨던 훈련복으로 갈아입은 연우가 길게 기지개를 켜자 드래곤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연우는 그대로 눈을 감은 뒤 숨을 참았다. 몸이 아래로 훅 꺼지는 기분과 함께 해방감이 느껴졌다.
저린 손끝을 털어내던 연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번에 도착한 곳은 호수형 던전이었다.
연우는 물가에서 목을 축이는 쇼란 토끼의 마석을 뽑아내 드래곤에게 건넸다. 얌전히 마석을 받아먹은 드래곤이 땅으로 폴짝 뛰어내리며 몸집을 키웠다.
[끄아아아.]
래곤이 본래의 크기로 돌아가 기지개를 쭉 켜자 연우는 흐뭇한 얼굴로 제 얼굴만 한 비늘을 쓰다듬었다.
[좀 있으면 다리도 나올 것 같아.]
다리가 나올 자리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드래곤이 배를 채우고 오겠다며 소리 없이 호수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동안 연우는 윤슬이 어른거리는 수면을 감상하며 호수 주변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이따금 드래곤이 먹이를 사냥하느라 요란한 소리가 나는 것만 빼면 한적해서 생각을 정리하기 좋았다.
[연우야, 이거 봐.]
수면 위로 올라온 드래곤이 연우의 손바닥보다 큰 진주를 코끝으로 굴렸다. 진주를 집어 가방을 열던 연우가 혀끝을 깨물었다. 가방 속 아공간이 던전 부산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들을 팔긴 팔아야 하는데 어떻게 팔지. 획득 경로를 물어보면 대답할 만한 변명거리도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팔아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한두 번이라 돈이 필요할 때까지 모아두려고 했으나,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래도 두고 오기는 너무 아까웠다. 두 손으로 진주를 움켜쥔 연우가 공간을 접어 집으로 향했다.
던전을 오갈 때마다 느껴지던 압박감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던전을 동네 앞 마실 가듯 오갈 수 있게 되었고, 그때마다 드래곤은 쑥쑥 자랐다.
슬슬 드래곤이 머물 레어도 구해야 하는데…. 어느새 보색뱀 크기로 돌아간 드래곤의 머리 사이를 쓰다듬고 있자 허공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불투명한 문을 열어준 연우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꿇는 로터스 길드장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지시하신 것입니다.”
수표와 카탈로그를 받아 드니, 로터스 길드장이 연화의 생일을 축복하는 말을 웅얼거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진짜 제정신 아니라니까…. 카탈로그를 뒤적이며 뭘 사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머뭇거리던 로터스 길드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연화 님과 연락이 됩니까?”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로터스 길드장은 부러운 얼굴로 목걸이를 보다가 앞섬을 매만졌다. 자랑스레 목에 달고 다니던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연화가 허용한 기간이 끝난 모양이었다.
아공간은 던전과 개념이 달라, 아공간의 주인이 허락해줘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사는지 한 번 보고 왔을 텐데. 아무튼, 이제 감금은 끝이라는 건가.
“연화가 별다른 말을 안 했다면, 저도 이제 슬슬 출근하는 게 낫겠네요.
연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로터스 길드장이 뒷걸음으로 문을 빠져나갔다.
드디어 자유다. 그동안 여기저기 쏘다니긴 했지만, 감시를 피해 몰래 돌아다니는 것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길게 기지개를 켠 연우가 침대에 벌렁 누운 다음 잠잠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연화가 잠든 지도 어느새 2주째였다. 바뀐 미래가 재정립되기 전까지 연화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내가 많은 걸 바꿨다는 것이겠지…. 음. 예전에는 한 달 정도 잤던 것 같은데…. 이번에도 그쯤 잔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남은 시간은 2주였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복기해보던 연우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2주 뒤 어떤 미래가 연우를 맞이할지는 몰라도 연화는 영원토록 안전할 것이다.
* * *
“이게 누구야?”
잔뜩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돌아보자 정은영이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정은영은 시선을 돌려 연우 뒤에 선 에스퍼와 인사했다. 그러면서 연우에게 뭘 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찮아서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대놓고 빈정거릴 용기도 없어 다른 사람을 방패 삼는 치졸함이란. 정은영을 위아래로 훑어본 연우는 그대로 C 구역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멈칫, 굳었다.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잊고 살았는데 연우의 팀은 찢어진 지 오래였다.
어디로 출근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 사이, 저 멀리서 조희서가 반가운 얼굴로 뛰어왔다. 연우를 보고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라 설마 나를 찾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설마가 사람 잡았다. 달려온 조희서는 눈웃음을 그리며 연우의 팔을 붙잡았다.
“강차헌 에스퍼 길드 만든다며. 사실이야?”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