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연우는 가만히 조희서를 내려보았다. 차헌이 그러겠다고 한 적은 있었지만, 글쎄. 연우의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차헌은 자연스레 센터장이 될 것이다. 연우가 대답이 없자 재촉하던 조희서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전혀 작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가이드 필요 없으시대?”
이 끝없는 자존감의 원천은 대체 어디서 샘솟는 걸까.
그렇게 쪽을 줬는데도 조희서는 차헌에게 자신이 필요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연우는 작게 감탄하며 조희서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어떻게 오해했는지는 몰라도 연우의 옆에 달라붙은 조희서는 제법 친근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
센터에 있기에는 강차헌 에스퍼가 아까웠다, S급이면 응당 길드를 세워야 한다는 조희서의 말을 흘려들으며 연우는 한 발짝 물러섰다.
멀어진 거리를 보고 있던 조희서가 턱을 치켜들며 연우를 내려보았다.
“내가 무영 길드에서 이직 제안이 들어왔는데도 강차헌 에스퍼한테 물어보는 거니까, 네가 말 좀 잘 전해봐.”
“뭐?”
질문은 연우의 뒤에서 터져 나왔다. 이제 막 출근했는지 포탈을 넘어 들어오던 이수빈이 잘못 들었다는 듯 귀를 후비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우쭐거리던 조희서가 또박또박 말했다.
“무영 길드에서 이직 제안이 들어왔다고.”
“너 거기 응시 자격도 안 되잖아. 근데 이직 제안이 들어왔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따져 묻는 말에 한껏 입술을 끌어올린 조희서가 안쓰럽다는 듯 이수빈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무영 길드에 떨어져서 속상한 건 알겠는데, 너무 과하게 반응하는 거 아냐? 너랑 나랑 급이 다른가 보지.”
눈을 접어 방긋 웃어준 조희서가 휙, 소리가 나게 연우를 돌아볼 때였다. 휘파람 소리와 함께 등장한 종이비행기가 연우의 손에 떨어졌다.
센터장의 직인을 확인한 연우가 펼치려던 순간, 바짝 붙은 조희서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스스럼없는 태도에 허탈함이 밀려왔다. 제게 무슨 오물이 묻은 것처럼 선을 긋던 게 조희서였다. 주변에 박서현도, 배재영도 없으니 이제야 내가 에스퍼로 보이나 보지. 이제 와서.
메모장을 숨긴 연우가 뒤로 물러나자 조희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뭔데 그래? 야, 같은 팀끼리 이런 거 공유하고 그러는 거야.”
“조희서 가이드. 저희가 언제부터 같은 팀이었나요.”
고저 없는 목소리에 조희서가 입을 다물었다. 제가 생각해도 자신이 지나치게 뻔뻔하게 굴고 있다는 걸 아는 모습이었다. 조희서와 연우는 같은 팀으로 묶여있었지만, 같은 팀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같은 팀이었다면 마나 고갈로 괴로워하는 에스퍼를 방치하지 않았겠지. 연우는 조희서를 빤히 바라보다 몸을 돌려 중앙 구역으로 향했다.
[그동안 저런 놈이랑 팀 먹는다고 고생했어.]
드래곤의 위로에 미소 지은 연우는 메모를 확인했다. 예상대로 센터장실에 방문하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 * *
“들어가시면 됩니다.”
안내에 센터장실로 들어가던 연우가 걸음을 멈추고 비서를 돌아보았다. 비서는 필요한 것이 있냐는 듯 상냥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에 마주 웃어준 연우가 발걸음을 옮겼다. 안에는 센터장과 낯익은 정신계 에스퍼가 앉아있었다.
“거기 앉게.”
자리에 앉자 정신계가 영상을 띄웠다. 허공에 펼쳐진 화면에서는 차헌이 폭주를 일으켰을 때의 모습이 송출되었다. 시작된 영상은 지겹도록 반복되었다. 센터장은 아무 말 없이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고, 정신계 에스퍼는 계속해서 영상을 송출하고 있었다. 연우 역시 신중한 얼굴로 배재영을 찾았다.
영상 속 배재영은 총 세 번 등장했다. 폭주한 차헌과 함께 로비에 나타났을 때, 방어막이 허물어졌을 때, 그리고 차헌이 가이딩 실로 옮겨졌을 때. 세 번 다 연우와 동선이 겹치지 않았으니, 일단 연우의 등을 떠민 건 배재영이 아니었다. 소파에 몸을 기댄 연우가 드래곤에게 물었다.
누군지 못 봤어?
[데려오면 알 수 있을 것 같아.]
차헌의 폭주를 막기 위해 센터의 전 직원이 몰려왔었다. 하나하나 다 만나러 다닐 수도 없고…. 작게 한숨을 쉰 연우가 팔짱을 꼈다. 누군지 잡히기만 해라. 그대로 던전에 던져버릴 거다.
센터장이 손을 흔드니, 영상이 중지되었다. 연우와 닿은 차헌이 진정하는 순간이었다. 그 장면을 빤히 보던 센터장은 정신계에게 이만 나가보라고 명한 뒤 부센터장을 불렀다.
“…강차헌 에스퍼가 오지 않는군.”
너 같으면 오겠냐. 빈정거리는데 부센터장이 연우를 쳐다봤다.
“그때 얘기한 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연우 에스퍼?”
“아….”
연우는 난처한 얼굴로 센터장과 부센터장을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 되기는. 센터랑 계약 안 한다고 사방팔방 조건 물어보고 다니는 거 보면 모르겠냐. 그러다 차헌이 덥석 계약이라도 할까 봐 걱정이었다. 물어보고만 다녀서 다행이지, 계약할 김새가 보였다면 무리해서라도 계획을 앞당겼을 것이다.
연우가 대답이 없자 센터장이 입을 열었다.
“강차헌 에스퍼가 한연우 에스퍼를 많이 의지하는 것 같던데.”
그러니 내가 좀 붙잡아봐라? 그동안 너희들은 굿 보고 떡이나 좀 먹겠다? 사람이 이렇게 한결같을 수가 있나. 언젠가 연화에게 책임을 떠넘겼던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에 연우가 말없이 웃음을 흘렸다.
“일단 새로 검사부터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네. 확실히 가이드 판정을 받는 게 좋겠지.”
“같이 가시죠, 한연우 에스퍼.”
부센터장의 재촉에도 말없이 앉아있던 연우가 센터장에게 물었다.
“사과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뭐?”
연우는 팔걸이를 움켜쥐는 센터장의 손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제대로 된 교육도 하지 않고 방치한 차헌에게 사과할 생각이 없냐고. A 구역 각성자들이 차헌을 괴롭히는 걸 정말 몰랐냐고.
센터장은 말도 나오지 않는지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이를 보고 있던 연우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센터장으로서의 능력은 출중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차헌에게 기억이 있다고 한들, 갑자기 센터장이 되어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는 도와줄 사람이 있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숨을 쉰 연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대로 밖으로 나설 때까지 센터장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눈치를 보는 부센터장과 중앙 구역을 빠져나온 연우는 순순히 검사실로 들어갔다. 안내에 따라 은색 구슬에 손을 올려놓자 예전에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던 마나들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게 보였다.
어느새 방안을 가득 채운 마나들이 연우를 감싸왔지만, 연우의 마나 코어는 그것들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다. 덕분에 예전과 똑같은 결과지가 나왔다. 서류를 확인한 부센터장은 참담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연우를 보는 시선이 미적지근하게 식어있었다. 보나 마나 연우가 가이드가 되었다며 차헌을 협박하려 했던 게 분명했다.
“으음…. 이번에 한연우 에스퍼의 팀이 해체되었잖아요? 혹시 들어가고 싶은 팀이 있습니까?”
“팀이 해체되면 자동으로 수색대에 들어가는 거 아니었나요?”
“하하…. 한연우 에스퍼잖습니까.”
대놓고 편의를 봐주겠다는 말이었다. 이러니 정은영이 연우만 보면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지. 하하, 어색하게 웃음을 흘린 부센터장이 연우를 이능 테스트실로 이끌었다.
“일단 남아있는 팀과 최대한 조율을 해볼 건데, 그 전에 테스트를 새로 받아봐야 할 것 같군요.”
차트를 넘기던 부센터장은 얼마 전 검사한 결과지를 내려보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조희서 가이드와…?”
“절대요.”
단호한 대답에 부센터장이 볼펜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강차헌 에스퍼의 폭주에 휘말려서 검사 결과가 이상하게 나온 것 같단다. 부센터장의 말에 동의한 연우가 캡슐로 들어갔다.
녹진한 마나에 몸을 기댄 연우는 기대와 불안을 안고 이능을 사용했다. 드래곤과 계약한 이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능이 섬세해졌다. 등급이 높아졌을 거라는 기대와 함께, 만약 결과가 높게 나온다면 어떤 변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캡슐에서 빠져나오자 직원이 당황한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해볼게요.”
몇 번이나 테스트를 해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측정 불가.
결과에 당황한 연우가 결과지를 붙잡고 이능을 사용했다. 결과지는 연우가 그린 좌표에 정확히 나타났다. 이능이 튀는 느낌도 받지 못했는데 왜 측정 불가야?
[그거야 네 마나가 온전한 에스퍼의 마나가 아니기 때문이지.]
너 때문이야? 팔찌를 노려보던 연우는 저보다 더 당황한 것 같은 부센터장을 바라봤다. 이대로 쫓겨나나? 검사를 진행하던 직원이 유일하게 침착할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능 불안정자 신고할까요?”
센터에서 쫓겨나는 건 계획에 없었는데. 헛웃음을 흘린 연우가 결과지를 내려보았다. 측정 불가라니. 이능이 그렇게 미친 듯이 튈 때도 받아보지 못한 결과였다.
“잠시만, 잠시만 있어 봐요. 한연우 에스퍼. 이능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니죠?”
고개를 끄덕인 연우가 공간을 접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했다. 그 모습에 바삐 고개를 끄덕인 부센터장이 직원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아무래도 기계가 고장이 난 것 같으니 다음에 다시 테스트하는 걸로 하고, 한연우 에스퍼는 그동안… 어… 그래요, 위험 구역에 남는 자리가 있으니 거기로 이동해서 당분간 정화 작업을 합시다. 그리고 기계가 수리되면 다시 팀으로 복귀하는 걸로 해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연우가 부센터장이라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에스퍼를 다른 팀과 엮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능 불안정자로 낙인찍어 센터에서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내일부터 위험 구역으로 출근하니까, 지금처럼 못 만날 거야.”
소식을 전하자, 차헌이 조용히 입가를 가렸다.
“그러니까, 형이 이능 불안정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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