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무슨 말이야?”
연우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차헌을 올려보았다. 닦아도 닦아도 차헌의 볼은 눈물로 젖어만 갔다. 연우가 닦을 것을 가져오겠다며 몸을 돌리려던 그때, 차헌이 연우를 붙잡았다.
“제가 정신을 차린 다음 제일 먼저 한 일이 뭔지 알아요?”
차헌이 핏발 선 눈으로 연우를 쳐다보다가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집안을 둘러보았다.
“형 집에 찾아왔었어요. 물건을 정리할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부모는 연락을 끊고 지낸다고 했고, 동생인 한연화는 며칠 전부터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무슨 정신으로 연우의 짐을 챙겼는지, 몇 번을 망설이다 연우의 집을 찾았는지 모른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간신히 들어간 집안을 보고 차헌이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얼마나 울었는지 연우는 꿈에도 모르겠지.
연우를 놓지 못하는 차헌을 보며 누군가는 미련하다며 혀를 찼고, 다른 누구는 잊어버리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위로했다. 그렇게 며칠을, 몇 년을 들락거리던 차헌은 검푸른색 표지의 책을 발견했다.
* * *
“언제까지 비밀로 할 생각이었어요?”
어떤 걸 말하는 거냐고 반문할 필요도 없었다. 과거 던전에 들어가기 전날, 연우는 잠도 자지 않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며 책을 보고 있었다. 새벽녘 들이닥친 연화와 싸운 다음, 도망치듯 출근하느라 책을 숨길 정신도 없었다. 물건을 챙긴다고 집에 왔으면 당연히 책도 봤겠지. 작게 한숨 쉰 연우는 차헌에게 손짓했다.
“일단…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해.”
연우의 손짓에 신발을 벗던 차헌이 또다시 눈물을 후드득 흘렸다. 연우는 부모 잃은 아이처럼 서럽게 우는 차헌을 달랬다. 그리고 의자에 앉힌 뒤 자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다 알고 있다는 애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할 말을 고르는 동안 차헌이 연우의 옆으로 와 손을 붙잡았다. 아예 의자까지 질질 가져온 게 옆에 눌러앉을 생각인가 보다.
심각한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껴안는 건 허락을 받겠지만, 손은 그냥 잡겠다는 건가. 연우는 차헌이 깍지를 낄 수 있도록 손가락을 벌려주며 손수건을 꺼냈다.
“그래서, 책을 읽었어?”
“대충은요.”
대답하는 목소리가 울먹울먹했다.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는 차헌을 연우가 막은 뒤 손수건을 쥐여주었다. 물이라도 먹이고 얘기를 나눠야겠다 싶어 일어나려는 순간 허리가 붙잡혔다. 어깨가 들썩이는 걸 보니 또 우는 모양인데, 이러다 탈수라도 올까 봐 걱정이었다.
“목 안 말라?”
“안 말라요.”
“그래도 마셔.”
차헌을 붙잡고 냉장고 앞으로 이동한 연우가 물병을 건네니, 차헌이 남은 손으로 물병을 받아 들었다. 훌쩍거리던 차헌이 조금씩 물을 빨아 마셨다. 이를 지켜보던 연우가 작게 한숨 쉬었다. 언젠가 차헌과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은 했었다. 만약 그럴 생각이 없었더라면 차헌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눈치챘어도 그냥 모른 척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연우가 원한 방식은 이런 게 아니었다. 모든 게 해결된 다음 차분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연우는 눈 밑이 발갛게 달아오른 차헌을 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슬퍼할 줄 몰랐다. 그냥 그런 에스퍼가 있었지, 하고 잊고 살 줄 알았는데 유품까지 챙겨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다 마셨어요.”
물통을 내려놓은 차헌이 연우의 눈치를 봤다. 실컷 울고 나니 뒤늦게 민망해진 모양이었다.
“술은 좀 깼어?”
“네.”
고개를 끄덕인 차헌이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의자에 앉은 연우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뭐가… 궁금한데?”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에요?”
연우가 차헌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차헌에게 어디까지 말해도 괜찮을까. 고민하던 연우는 왼손을 뒤로 숨겼다. 다른 건 몰라도 드래곤과 계약한 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비밀로 해두고 싶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할 거예요? 저번처럼?”
잡힌 손이 아팠다. 미간을 찌푸려도 차헌은 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저번처럼이라면 이번에도 연화를 대신해서 죽을 거냐는 질문이겠지. 드래곤과 계약하기 전에는 그러려고 했지만, 연우에게 능력이 생겼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고개를 젓자 차헌이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쉬다 말고 표정을 굳혔다.
“형 저한테 지금 거짓말하는 건 아니죠?”
“아니야.”
그럼 됐다며 고개를 끄덕이던 차헌이 그대로 몸을 숙여 연우의 손에 이마를 묻었다. 차헌의 숨결이 손에 닿을 때마다 손바닥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손끝을 오므리자 고개를 든 차헌이 이제 알겠다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형 이능이 튀었구나. 원래는 형이랑 저랑 접점이 없었잖아요. 그랬는데 저희 둘이 친해지니까 형한테 이상이 생긴 거 맞죠? 다른 문제는 없어요? 친해진 것 말고도 뭐가 많이 달라졌잖아요. 저 이 시기에 던전 근처에도 못 가봤다고요. 그 영향으로 형이 가이딩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이번에 측정 불가 나온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잠시만, 일단 내 이능에는 문제가 없어.”
연우가 물병을 쥐고 이능을 사용하자 쓰레기통에서 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헌은 직접 쓰레기통을 확인하고 온 다음에야 조금 누그러진 기세로 연우의 손을 잡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정해진 미래를 바꾸면 페널티인지, 부메랑인지 부작용 있다면서요. 지금 바뀐 게 한둘이 아닌데 앞으로 형한테 부작용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없을 거야.”
[물론이지.]
호언장담하는 드래곤의 목소리에 연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해줄 수는 없지만, 방법이 있어.”
“나한테만 말해주면 안 돼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안 된다고 대답한 연우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일련의 경험으로 무거워진 입은 차헌 앞에서도 쉽게 열리지 않았다.
연우가 시선을 피하니까 차헌이 조르듯 손을 움켜쥐었다.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요.”
“안 돼.”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차헌의 눈썹이 서러움을 담아 아래로 축 처졌다. 드래곤과 계약하며 인과율에서 벗어난 연우와 달리 차헌은 책의 주인공이었다. 정해진 세계선을 따라 걸어야 하는 차헌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미래를 바꾸는 건 연우 혼자만으로도 충분했다.
“왜요? 내가 도와줄 수 없는 거예요?”
차헌이 도와주면 수월하게 끝날 일이 몇 개 있었지만, 연우 혼자 해야 했다.
“네가 다치면 어떡해.”
그 순간 온몸을 잠식하는 감정에 연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모른 척 외면한다면 스쳐 지나갈 감정이었다. 연화만 챙기기도 벅찬 삶에 드래곤까지 끼어들었는데, 거기에 차헌까지 포함할 수는 없었다. 차헌과는 그냥 지금 같은 관계로,
“형.”
볼을 감싸 쥐는 손에 연우가 흠칫 놀라 몸을 웅크렸다. 차헌의 손이 평소보다 더욱 서늘하게 느껴졌다. 저를 좀 봐달라는 말에도 연우는 고집스레 아래를 내려 보다 차헌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연우를 내려보는 차헌의 하늘색 눈동자는 환희에 물들어있었다.
“제가 다치는 게 싫어요?”
“…당연하지.”
“왜요?”
“그거야…”
같은 센터 에스퍼고, 아는 동생이니까. 항상 자신을 칭찬해주고, 연화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이니까. 온갖 이유를 덕지덕지 붙여 가려봐도 연우의 감정을 가릴 수가 없었다. 눈에 눈물이 고이듯 열기가 어려 연우가 급히 시선을 피했다. 도망가듯 의자에서 일어났지만, 차헌은 끈질기게 따라붙어 연우와 눈을 맞췄다.
“왜요? 왜 제가 다치는 게 싫어요?”
좁은 방 안에서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결국 차헌에게 붙잡혔다. 연우는 이마 끝까지 붉어진 얼굴로 차헌을 노려봤다. 꼭 이유를 들어야 속이 시원하겠냐는 눈빛이었지만, 응. 꼭 들어야겠다.
“차헌아.”
연우에게 이름을 불리는 것만으로도 목덜미가 오싹했다. 네, 얌전히 대답한 차헌은 연우의 손을 꼭 쥐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맞닿은 손바닥으로 콩콩콩, 바삐 뛰는 연우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항상 느릿느릿 평정심을 유지하던 연우의 심장박동이라고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차헌은 창문을 열고 소리치고 싶은 욕구를 애써 누르며 연우의 입술만 바라봤다.
“기다…려준다고 했잖아.”
눈을 꾹 감은 차헌이 참지 못하고 조그맣게 욕설을 씹어뱉었다. 멋진 척 한번 해보려다가 이마에 피가 마르게 생겼다. 이대로 드러누워서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못 간다고 떼를 써볼까. 고민을 실행에 옮기기 직전 연우가 차헌의 손을 붙잡았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되면요?”
“…그때.”
짧은 대답에 차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가 근심이 짙어졌다. 그때 거절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대답해도 될까…?”
터질 듯이 달아오른 연우의 얼굴에 차헌이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답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연우의 입에서 좋아한다는 말이 나오는 걸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얼마나 걸려요?”
“2주 안에는 끝나.”
2주. 중얼거린 차헌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팔을 벌려 연우를 끌어안았다. 이러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을까. 차헌은 거세게 뛰는 심장에 비실비실 웃으며 연우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이후 당연한 절차처럼 따라와야 할 연우의 도닥거림이 없었다.
아, 허락받는 거 깜박했다.
조심히 몸을 물린 차헌은 눈을 꼭 감고 있는 연우를 보자마자 입을 틀어막았다. 그동안 차헌이 뭘 하든 신경도 쓰지 않던 연우였다. 손을 잡으면 손을 잡는 대로, 껴안으면 껴안는 대로 얘가 또 이러네, 하는 눈으로 차헌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던 연우였다고.
그런 연우가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자 심장이 이대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 형.”
차헌이 환히 웃으며 연우를 제품에 밀어 넣는 동안, 연우는 눈을 감은 채 제발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빌었다. 제 몸이 통제를 따르지 않는 이 감각이 민망하고, 떨리고, 두려웠다. 차헌의 숨이, 손이 닿는 모든 부위가 불이 붙은 듯 화끈거렸다.
“뽀뽀해도 돼요?”
“뭐?”
깜짝 놀란 연우가 어깨를 밀어냈다. 순순히 뒤로 물러난 차헌이 연우의 손끝을 붙잡고 제 쪽으로 끌었다.
“저번에 해봤잖아요.”
손등에 닿는 숨결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도망가고 싶어 이능을 사용하려던 순간, 차헌의 입술 산이 손등에 닿았다. 말캉한 입술이 손등을 짓누르는 감각이 지나치게 생경했다. 얼마나 닿아 있었을까, 천천히 입술을 뗀 차헌이 연우의 볼을 감싸 쥐었다.
“괜찮죠?”
연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차헌이 몸을 숙였다. 일 초가 영겁 같이 느껴져 연우가 눈을 질끈 감자 차헌의 입술이 볼에 닿았다. 쪽, 하고 입술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연우의 입술에서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목덜미까지 솟아오른 긴장감 때문에 온몸이 떨렸다.
“어때요?”
볼을 감싸 쥔 차헌이 연우와 눈을 맞췄다. 차헌은 그대로 시선을 내려 연우의 입술을 바라보다 인사하듯 살짝 고갯짓했다.
밀어내야 했다. 차헌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건 모든 일을 끝낸 다음이어도 늦지 않았다. 하지만 연우는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차헌을 제 삶에 끌어들이고 싶었다. 욕심이나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인정한 연우는 허락의 의미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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