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꽤 오랜 시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입술에 닿는 온기가 없었다. 살며시 눈을 뜨자 차헌이 어벙한 얼굴로 연우를 내려보고 있었다.
“…진짜요?”
“음, 하기 싫으면 말고.”
진심이었다. 차헌이 할 생각이 없다면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방금까지 그렇게 들이밀더니 갑자기 저러는 게 조금 괘씸할 뿐이었다. 뒤로 물러나자 차헌이 성큼 따라붙었다.
“아니, 제가 미쳤다고 싫대요? 진짜 해도 되는 거 맞아요? 정말요? 제가 뭐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안 할 거면 좀 놓고 말하자.”
“싫어요!”
그럼 힘을 풀던지! 양 볼이 붙잡혀 입술이 뾰족 튀어나온 연우가 손목을 탁탁 내려쳤다. 손에 힘을 얼마나 주고 있는 건지 붙잡힌 곳이 얼얼할 정도였다. 그렇게 버티고 있던 차헌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괘…괜찮아요, 진짜?”
저를 지켜보는 눈빛에도, 그리고 볼을 감싸 쥔 손에도 걱정이 가득했다. 그러면서 시선은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는 게 상당히 귀여웠다. 일부러 대답을 보류했는데 차헌의 손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볼 위에서 옴짝거렸다.
“별로였어요?”
시무룩한 질문에 조용히 웃던 연우는 발끝을 세워 차헌에게 입을 맞췄다. 차헌이 그랬던 것처럼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질 생각이었는데, 다급히 몸을 숙여 따라붙은 차헌 때문에 맞닿은 입술은 뒤꿈치가 땅에 닿을 때까지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 행위가 싫은 것도 아니고, 나도 더 하고 싶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지?
침도 삼키고 싶고, 숨도 편히 쉬고 싶었다. 연우가 조심히 물러서자, 물러선 거리만큼 차헌이 따라붙었다. 어깨를 밀어봐도 차헌은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목덜미와 허리를 받치고 있는 손 때문에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아니, 잠시만.”
차헌이 각도를 바꾸는 순간 연우가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그대로 차헌과 거리를 벌린 연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왜요?”
“아니, 숨, 숨 좀 쉬자.”
“싫은 건 아니죠?”
차헌은 고개를 끄덕이는 연우를 내려보며 다행이다, 중얼거렸다.
“싫었으면 닿자마자 도망갔겠지.”
별걸 다 걱정한다며 다독여주는 말에 차헌이 연우의 볼을 감싸 쥐었다. 그 손에 기대 숨을 가라앉히는 동안 차헌의 시선은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딘가 민망해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는 가리는데, 차헌이 손을 떼어내어 깍지를 꼈다.
“한 번만 더 해도 돼요?”
“…아까처럼 안 할 거면.”
“숨 쉴 수 있게?”
“응.”
차헌은 연우의 대답을 듣자마자 부드럽게 입술을 겹쳐왔다. 동시에 연우의 허리와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맞닿은 부위마다 오싹거려 서 있기 힘든 것도 잠시, 약속했음에도 입술을 꾹꾹 눌러오는 차헌 때문에 또다시 숨쉬기가 곤란해졌다. 코끝이 부딪힐 정도로 세게 짓이기고 있어 숨을 쉬어보려 해도 쉽지 않았다.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어지러운 게 입맞춤 때문인지, 산소 고갈 때문인지 모를 정도였다. 연우는 차헌의 손목을 붙잡고 떼어내려 애쓰며 뒷걸음질 쳤다. 등에 딱딱한 벽이 느껴지는 순간 이능을 사용할까, 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차헌과 어색해지겠지만 숨이 막혀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좌표를 그리기 직전 차헌이 천천히 몸을 물렸다.
연우가 급하게 숨을 몰아쉬는 동안, 차헌은 저와 벽 사이에 갇힌 연우를 내려보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은 마찰 때문인지 도톰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열이 올라 달아오른 볼처럼 발그레하게 색이 물든 입술을 보고 있자니 자꾸 군침이 돌았다. 고개를 숙이는 것과 동시에 텁, 하고 무언가 입술을 덮었다.
“잠시, 기다려.”
연우의 손이었다. 어떻게 손도 이렇게 이쁘지. 손바닥에, 손가락에, 손등에 입술을 마구잡이로 문지르던 차헌은 몸을 숙여 연우의 볼에, 이마에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부딪쳤다. 귀로 입술을 옮기려는 순간 연우가 흠칫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거기는 아파. 하지 마.”
연우가 아직 발갛게 부어 있는 귀를 가린 채로 차헌을 밀어냈다. 언젠간 저 귀를 입에 넣고 굴려보고 말 것이다. 다짐한 차헌은 귀를 가리고 있는 연우의 손을 바라보다 시선을 입술로 옮겼다.
“이제 해도 돼요?”
“내 몸에서 손 떼면.”
입을 맞출 때마다 조건이 하나씩 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조건이었다. 얌전히 손을 벽에 올려놓은 차헌이 몸을 숙이자, 연우가 손을 뻗어 차헌의 볼을 감싸 쥐었다. 밀어내려는 건가? 형이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 그만해야겠다, 는 생각과는 다르게 몸이 달려들었다.
꾹, 하고 입술이 맞닿는 순간 힘이 풀려 무릎이 휘청거렸다. 닿아 있어도 믿기지 않는 촉감이었다. 이대로 입을 벌려 베어먹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는 사이 연우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내며, 곧 각도를 바꿔 다시 다가왔다.
다리가 풀릴 만큼 짜릿했지만, 왠지 모르게 안달이 났다. 조금만 더…. 차헌이 고개를 내리자, 연우가 그만큼 물러나더니 또다시 깃털처럼 가볍게 입술을 부딪쳤다.
차헌은 멀어지는 입술을 보며 연우와의 거리를 조금씩 좁혔다. 몸이 겹칠수록 입안이 말라왔다. 연우의 허벅지가 닿는 순간 머리가 핑 돌 정도로 강한 쾌감이 온몸을 덮쳤다. 무릎으로 연우의 다리를 벌린 차헌이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달려들 듯이 입을 벌려 그의 입술을 감쳐물었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입술에 힘을 줘 혀를 뻗던 순간, 연우가 차헌을 밀어냈다.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차헌은 빠르게 팔랑이는 속눈썹을 내려보다 팔을 벌려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충만함을 느끼고 있는 차헌과 달리 연우는 곤란함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좀… 떨어지자.”
“왜요?”
왜기는. 연우는 제 골반 쪽을 꾹꾹 누르는 차헌의 하체를 힐끔거렸다.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찌르는 감각이 조금 불편했다.
“아.”
차헌이 뒤로 물러나자마자 연우는 다리를 오므려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런 연우의 허리를 껴안은 차헌이 귓가에 속살거렸다.
“괜찮아요. 형만 그런 것도 아니고.”
귓가에 울리는 웃음소리와 엉덩이를 짓누르고 있는 감촉 때문에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차헌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했다.
“형, 저 좀 봐요.”
“조금만 있다가….”
기다려도 연우가 얼굴을 보여주지 않자, 차헌은 벽에 이마를 박고 있는 그를 들어 올려 침대로 향했다. 침대는 왜? 긴장으로 몸이 경직된 연우와 달리 차헌은 휘적휘적 걸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워후. 우리 연우 머릿속이 아주.]
조용히 해.
연우는 저를 허벅지 위에 앉히려는 차헌의 손을 밀어내고 침대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손을 끌어간 차헌이 깍지를 꼈다. 그대로 기대는 몸을 받아주고 있자 차헌이 설렘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우리… 이제 사귀는 거예요?”
“응?”
응? 연우를 따라 중얼거린 차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몽실몽실 풀려있던 차헌의 얼굴이 사납게 물들었다.
“우리 방금… 뽀뽀도 하고, 마음도 나눴잖아요. 근데 왜 그런 표정이에요?”
연우가 급히 눈을 돌리자, 차헌은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며 대답을 채근했다. 연우는 이마 끝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순간적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 뽀뽀…를 하긴 했지만 분명 대답은 2주 뒤에 들려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고. 연우의 말에 차헌이 그대로 쓰러졌다.
다시 한번 과거로 회귀해서 그딴 말을 한 자신을 패버리겠다며 침대를 내려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묘한 충동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연우는 애써 시선을 떼며 천장을 올려보았다. 차헌이 욕심나는 것과는 별개로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오오. 우리 연우 드디어 연애하는 거야?]
응. 너부터 떼어놓고.
조용히 있어도 신경이 쓰였고, 그렇지 않아도 신경이 쓰였다. 드래곤을 제대로 독립시키지 않는 이상 차헌과 만날 때마다 드래곤이 신경 쓰일 게 뻔했다.
[안 써도 되는데.]
능글맞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팔찌를 노려보던 연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급히 숨을 토해내며 뒤를 돌아보니 차헌이 제 등허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평소와 똑같은 접촉인데도 몸이 잘게 떨렸다.
그런 반응을 눈치챈 건지 차헌이 슬그머니 손을 물렸다. 민망함이 몰려와 이대로 어디든 도망가고 싶었다.
“손은… 잡아도 돼요?”
연우는 민망함에 몸부림치다 침대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손이 맞닿는 순간 뒤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가쁘게 뛰고 있었지만, 연우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상태로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두 사람 모두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짐을 싸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때마다 연우는 맞잡은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한 번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더 이상 외면할 수가 없었다.
“형, 근데 있잖아요.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뭘?”
“저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언제부터…? 고민하고 있자 차헌이 손을 잡아당겼다. 끄는 힘을 이기지 못한 연우가 침대 위로 쓰러졌다. 팔꿈치로 자신의 몸을 받친 차헌이 눈을 맞춰왔다. 하늘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 보고 있으니 의문이 들었다.
“너는?”
의문과 함께 심장 한쪽을 덜컹거리게 하는 불안도 밀려왔다. 연우는 잠시 입술을 말아 물고 있다 머뭇거리며 물었다.
“너… 혹시, 내가 너를 구해줬으니까…? 영웅 심리? 그런 감정이랑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야?”
“뭔 소리예요. 첫눈에 반한 게 분명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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