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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99화 (99/143)

99화

“아니! 형 같으면 안 반하고 버티겠어요?”

얘는 어떻게 이런 말을 그냥 하지?

연우는 신기한 얼굴로 차헌을 쳐다봤다. 차헌은 멀쩡한 얼굴로 연우를 처음 만났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설명하고 있었다. 말하는 동안 볼이 점점 상기되긴 했지만,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열이 받아서 달아오른 듯했다.

“제가 그동안 형을 꼬시려고, 네?!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걸 그렇다고 오해를 해요!”

이젠 제대로 말도 안 나오는지 침대에 누워 씩씩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차헌이 연우의 손을 끌어 제 심장 위에 올려두었다. 연우는 쿵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애정을 드러낼 때면 민망하고 쑥스러웠다. 감추려고 숨기려는 자신과 달리 차헌은 제 감정을 솔직하게 반짝반짝 드러내고 있었다.

“형이 제 영웅이긴 해요. 하지만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형도 알잖아요.”

차헌은 손을 뻗어 연우의 볼을 감싸 쥐었다. 그대로 입술을 문지르는 손길에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에서 느릿느릿 떨어진 손이 연우의 손 위로 겹쳤다. 차헌이 손등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그래서 형은요?”

“나는….”

눈을 깜박이던 연우가 기억을 더듬었다. 언제부터 차헌을 의식하기 시작했더라…. 연우는 가만가만 기억을 더듬어가다 겸연쩍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확실하지 않은데….”

“그래도요. 제가 좀 멋있어 보였던 장면이 있을 거 아니에요.”

차헌은 생각해보라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재촉하면 생각이 더 안 나는 법이다. 차헌은 눈썹을 찌푸리며 열심히 고뇌하는 연우를 보며 작게 절망했다. 저렇게 고민해야 할 정도라고?

괜찮다. 지금부터라도 이미지를 잘 쌓으면 된다. 다짐하는 차헌을 보던 연우가 몸을 돌려 방 안을 훑어보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네가 옆에 없는 게 너무 어색해서….”

“그래서요? 제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계속?”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차헌이 입이 찢어지라 웃으며 팔을 벌렸다. 차헌은 어서 달려들지 않고 뭐하냐는 듯 손을 까딱이다 참지 못하고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대로 입술로 달려들려는 차헌의 볼을 붙잡은 연우가 고개를 돌렸다.

“안 돼요?”

“나 이제 입술도 아프고….”

습관적으로 시선을 내리깔던 연우가 급히 고개를 들었다. 차헌이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웃는 연우를 순순히 몸을 물려주었다.

“형 짐 싸야 한다면서요.”

“응. 그래서.”

안 그래도 차헌이 늦은 시간에 방문했는데, 둘이 그런…다고 어느새 날이 바뀌어있었다.

“…얼마 자지도 못하고 출근하겠네요.”

연우를 다시 침대에 눕힌 차헌이 창고 문을 열고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그냥 보조 가방에 챙겨가면 되는데.”

“백두 길드 방문할 때야 그랬죠. 큐브에 가면 진짜 아무것도 없어요.”

연우는 저 대신 짐을 싸려는 듯 옷장을 여는 차헌을 보다 벌떡 일어났다.

“어디에 뭐가 있는 줄 알고, 내가 할게.”

“제가 여기서 지낸 게 몇 년인데 그것도 모를까 봐요.”

대충 챙겨놓을 테니 형은 잠이나 자라며 손짓하던 차헌이 순간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몇 시간 전 현관에서 울음을 터트렸을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저러다 또 울진 않을까, 조마조마한 얼굴로 서 있던 연우가 차헌을 붙들고 침대로 이동했다. 짐이야 뭐, 큐브에서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되는 거니까 굳이 챙길 필요가 없었다.

연우는 제 손에 이끌려 얌전히 침대에 눕는 차헌을 보다가, 불을 끄려다 말고 물었다.

“아, 먼저 씻을래?”

집에 차헌이 입을 만한 옷이 있나, 고민하던 연우가 얼굴을 붉혔다. 왜 당연히 같이 잘 생각을 하고 있지? 이제 가라고 돌려보내도 되는데?

“형,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또? 이번엔 뭔데?”

“침대가 왜 이렇게 커요?”

매트리스를 통통, 내려치는 차헌의 얼굴이 뚱했다.

“형 혼자 사는 집이잖아요.”

“동생이 툭하면 자러 오니까 따지면 혼자는 아니지. 침대 두 개를 두기에는 좁아서 침대라도 큰 걸 샀는데. 왜?”

“아. 동생?”

고개를 끄덕이자 차헌의 얼굴이 단번에 환해졌다. 대충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알겠는데, 그러는 자기도 훈련장이나 숙소의 침대가 다 크지 않나? 연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차헌을 바라보다 곧 웃음을 흘리며 표정을 풀었다.

쟤가 다른 사람 만날 시간이 어디 있었다고.

차헌이 먼저 씻고 오겠다며 화장실로 들어간 뒤 연우는 대강이나마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나중에 다시 오면 된다고 생각하니 생각보다 짐이 단출해졌다. 마지막으로 타워에서 산 물건까지 잘 챙겨 넣은 캐리어를 현관 옆에 세우는 것과 동시에 차헌이 나왔다. 새 칫솔이 어디 있는지, 수건을 어디 보관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혼자서 척척 찾아내 씻고 나온 걸 보니 정말 이 집에서 오래 생활한 모양이었다.

…기껏 센터장이 됐으면 좋은 곳에서 지낼 것이지.

불편한 마음으로 씻고 나가자 차헌이 드라이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연우의 머리카락을 보송하게 말려준 차헌이 침대 안쪽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불을 끈 연우가 어색하게 침대에 누웠다. 같이 잠을 잔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이상하게 민망했다.

“옷은… 우리 집에 이런 옷이 있었나?”

“아까 샀던 거예요. 근데 아까 형이 산 거,”

“아, 맞다. 정신이 없어서 까먹을 뻔했어.”

연우는 팔을 뻗어 따로 챙겨두었던 종이 가방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차헌에게 내미는데 어두운 방 안에 반짝, 핸드폰 불빛이 빛났다. 불빛에 의지해 종이 가방 안을 확인하던 차헌이 검은색 안대를 집어 들었다.

“안대? 안대예요?”

“응. 계속 악몽 꾼다며.”

안대를 목에 걸친 차헌은 몸을 돌려 연우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쉽게 연우의 손을 찾아낸 차헌이 기도하듯 손을 붙잡았다.

“선물 고마워요. 그래도 아이템보다 형이 더 필요한 거 알죠?”

차헌이 꾸는 악몽의 원인은 연우의 부재다.

얼른 과제를 완료하고 찾아갈 테니 그때까지 제발 조심하라는 차헌의 부탁에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저를 걱정하던 사람이 연화 한 명뿐이었는데 어느새 두 명으로,

[세 명.]

명?

[내 걱정이 곧 네 걱정이니까.]

당당한 목소리에 작게 웃은 연우가 차헌의 손을 꼭 쥐었다. 연화도 차헌도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그 걱정의 싹을 잘라낼 날이 머지않았다. 울다 지친 건지, 술기운이 이제 올라오는 건지 차헌은 곤히 잠이 들었다. 고르게 숨을 내쉬는 차헌을 바라보고 있던 연우도 눈을 감았다.

* * *

-오늘은 뭐해요?

차헌은 매일 전화하겠다며 약속했고, 그 약속을 매일 지키고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을 가리지 않고 전화를 건 차헌은 그때마다 연우의 일정을 확인했다. 문제는 연우의 일정이 매일같이 똑같다는 거다.

연우가 발령된 131번 큐브는 놀이터보다 작은, 아담한 위험 구역이었다. 균열이 거의 닫히고 정화가 끝난 이후라, 호수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물웅덩이에 카시노 옥잠이 둥둥 떠다녔다. 이곳 위험 구역의 유일한 마수였다.

가끔 뿌리만 관리해주면 될 정도의 규모가 작은 곳이라 굳이 에스퍼가 지키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자신을 이런 곳에 배정한 건 이능이 튀어도 놓아주지 않겠다는 센터의 뜻이겠지.

“오늘도 카시노 물옥잠 줄기 손질하려고. 너는?”

-저는 오늘 라운드 길드 방문해서 백운 버팔로 잡으러 가요.

이전에 차헌은 완벽한 점수로 필기시험에 통과했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한 협회는 길드장들이 직접 확인해볼 것을 요청했고, 길드장들은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였다. 협회가 차헌에게 내준 과제는 간단했다.

던전의 특징과 그곳에서 출몰하는 마수의 특성에 대해 알아 올 것. 사관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실행했다면 하지 않아도 될 과제들이었다. 연우는 투덜거리는 차헌을 위로해준 다음 전화를 끊고 꽃가위를 집어 들었다.

큐브 밖으로 나서자 호수에서 자맥질하고 있던 드래곤이 다가왔다. 연우는 손목에 감기는 드래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다음 숨을 참았다. 아래로 쑥, 꺼지는 느낌과 함께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해도 해도 너무 어두운데요.”

“마수도 너무…. 많이 나오지 않아요?”

여기저기 빛무리가 동동 떠다니며 앞을 밝혀주고 있었지만, 여전히 동굴 안은 어두운 상태였다. 연우는 조심조심 걸어가는 토벌대 무리와 쓰러진 마수 무리를 쳐다보다, 다시 한번 공간을 접었다. 도착한 곳은 화산계 던전이었다.

연우가 눈을 질끈 감고 풍경을 외면하고 있을 때, 폴짝 뛰어내린 드래곤이 마수들을 향해 꼬리를 흔들었다.

[이리 온, 이리 온. 아가.]

됐다, 는 드래곤의 신호에 연우는 떨리는 손을 뻗어 미끈거리는 꼬리를 붙잡았다. 그대로 공간을 접은 연우가 꼬리를 내팽개치는 것과 동시에 거친 숨을 뱉어냈다.

“잠시. 저기 뭐가 있는데?”

연우는 구석에 숨어 거칠게 손을 문질렀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 샐리맨더를 발견했는지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뭐야, 드래곤이에요?”

“멍청아. 뿔이 없잖아.”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놀란 샐리맨더가 화륵, 온몸에 불을 붙이며 토벌대를 경계했다. 그 모습에 이상원이 눈을 빛내며 대검을 뽑아 들었다. 자신을 엄호하라는 말과 함께 이상원이 튀어 나갔다. 뒤이어 불을 뿜는 샐리맨더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화염계 저항을 믿고 날뛰는 이상원을 지켜보던 연우는 다시 한번 공간을 접어 샐리맨더를 끌고 던전으로 향했다.

“이쪽에도 있습니다!”

도지원의 외침에 이상원이 첫 번째 샐리맨더의 꼬리를 잘라버렸다. 쉬지 않고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이상원은 샐리맨더의 몸통 쪽으로 달려들었다. 불을 뿜는 샐리맨더와 불을 휘두르는 이상원의 이능 때문에 방어막을 치고 있던 방어계의 얼굴이 발갛게 익어갔다. 그러던 중, 세 번째 샐리맨더가 나타났다.

그렇게 열두 번째 샐리맨더를 해치운 이상원이 샐리맨더의 독에 당해 화끈거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다섯 번째 샐리맨더에게 얻어맞아 화상을 입은 보조계를 치료하고 있던 치료계가 벌떡 일어나 이상원에게 허둥허둥 달려갔다.

“다음부터는 늦지 마요.”

이상원은 눈을 접어 웃어준 뒤, 또다시 나타나는 열세 번째 샐리맨더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열네 번째 샐리맨더가 나타났다. 검을 세워 꼬리를 막은 이상원이 열다섯 번째 샐리맨더를 노려보았다. 그것이 뿜은 독에 훈련복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상한 부분을 도려낸 이상원은 손을 휘둘렀지만, 튀어와야 할 치료계가 보이지 않았다. 치료계는 물론 다른 팀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의문을 가질 시간도 없이 샐리맨더가 발화하여 이상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을 횡으로 그어 밀어낸 이상원이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동굴에는 자신 혼자만 남아있었다.

검을 높게 들어 올린 이상원이 아래로 내려찍자 아래에서 솟아오른 불꽃이 크게 원을 그렸다. 원 바깥에서는 수백 개의 황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번뜩이고 있었다.

가이드는 어디로 간 거야? 이상원은 혀를 차며 마나 포션을 마신 다음 쉼 없이 칼을 휘둘렀다.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는 독 때문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불 장벽을 세우면서 몸을 피해 봤지만, 화염계 마수인 샐리맨더는 조금의 피해도 없이 이상원의 뒤를 쫓았다. 독에 당해 쓰라린 피부에 치료 포션을 들이붓던 이상원이 천장을 올려봤다.

나가야 했다. 자신을 노리고 던전을 넘어오는 마수의 수가 너무 많았다. 아쉽지만 공격대에게 차례를 넘길 차례였다. 길을 찾은 이상원은 던전의 보스, 블라인드 박쥐를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이능을 사용했다. 날아간 불덩이가 박쥐에 맞기 직전, 박쥐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디로 갔지?

이상원은 초조한 얼굴로 동굴을 둘러보았다. 그때, 한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망입니다, 이상원 에스퍼.”

“한연우 에스퍼?”

“던전에서 부상자가 나왔으니 못하겠다고 포기하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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