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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00화 (100/143)

100화

이상원은 눈썹 사이를 좁히며 한연우를 쳐다보았다. 동굴형 던전에서 흉내 내기 마수가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긴 했지만, 그것들이 한연우를 흉내 낼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 한연우는 그 정도로 소중한 인물이 아니니까.

진짜 한연우인가? 진짜가 맞다면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 순간 강차헌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강차헌 에스퍼도 함께 와 있습니까?”

“아뇨.”

센터장이 강차헌과 함께 집어넣은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강차헌을 영입하려 혈안이 된 센터장인지라 이번에도 한연우로 협박한 줄 알았는데.

이상원은 잠시 한연우를 쳐다보다 몸을 돌렸다. 한연우가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나중에 따져봐도 충분했다. 이상원은 독이 퍼지며 점점 커지는 상처 부위를 쳐다보다, 보조 가방을 뒤졌다. 찾는 물것이 나오지 않아 가방을 뒤적거리는 손짓은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결국 작게 욕설을 씹어뱉었을 때였다.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입을 막은 한연우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상처가 크지도 않는데 필사적인 게 좀 웃겨서요.”

“뭐?”

“별것도 아닌 상처로 던전 공략을 포기하겠다는 것도 좀… 한심하기도 하고요.”

표정을 굳힌 이상원이 한연우를 노려보았다. S급의 몸에 이 정도 상처가 났는데 별것도 아니라니.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던 이상원은 이어지는 말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이상원 에스퍼는 그 상처 때문에 공략을 포기하실 겁니까?”

한연화의 눈치를 보느라 좋다, 좋다 해줬더니 자기가 진짜 뭐라도 된 줄 아나. 질문을 무시한 이상원이 동굴을 둘러보았다. 한시라도 빨리 나가서 상처를 치료해야 했다. 이러다 흉터라도 남으면 완벽한 S급이라는 칭호에 흠이 생길 게 분명했다.

그 순간 이상원의 눈앞에 블라인드 박쥐가 나타났다. 재빨리 검을 휘둘렀지만,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박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솔직하게 그렇다고 하면 내보내 드리겠습니다.”

한연우의 옆에 나타난 박쥐를 보던 이상원이 안타까운 얼굴로 웃었다. 고작 C급이. 가진 능력은 저것뿐이면서, 뭐? 내보내 줘? 헛웃음을 흘린 이상원이 비웃음을 머금은 채로 한연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연우가 박쥐를 옮기기 전에 죽여버리, 아니, 압박해서 이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으면 그만이다. 한연화가 아끼는 오빠만 아니었더라도 벌써 죽여버리고 던전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아닌 척하더니 가족의 후광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는 다른 것들과 똑같았다. 주제는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날카로운 웃음소리에 한연우가 손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상원이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 한연우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집중해서 바라보자 한연우의 손등에서 황금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 숨어있던 샐리맨더들이 눈을 빛내며 이상원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분명 방금까지 아무것도 없었는데? 당황스러웠지만 의문을 가질 시간도 없었다. 이상원은 대검을 뽑아 들며 한연우에게 손짓했다.

“한연우 에스퍼. 이리로.”

“괜찮습니다.”

칼끝을 세워 샐리맨더를 경계하고 있던 이상원이 한연우를 돌아보았다. 석순에 몸을 기대고 있는 한연우가 이상하게 여유로워 보였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불길한 예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원래 한연우의 눈동자가 저런 색이었나?

“…한연우 에스퍼.”

“네.”

침착한 대답에도 의문은 옅어지지 않았다. 이상원은 대검을 고쳐잡으며 한연우의 마나를 감지했다. 넘실거리고 있는 한연우의 마나는 각성자의 마나라기보다는…. 마치 마수의 마나처럼 느껴졌다. 묘한 압박감에 이상원이 이를 악물었다. 아니, C급이 이 정도의 기운을 내뿜는다고?

“하.”

이상원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한연우를 쳐다봤다. 이제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 갑자기 센터장이 한연우를 붙잡고 가이드 타령을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한연우 에스퍼.”

이상원은 너그럽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밖에 없는데 솔직해지죠? 누구의 미래를 바꾼 거예요?”

갑자기 이능이 튀기 시작한 것과 마나의 성질이 바뀐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보아하니 남의 미래를 끌어다가 재미 좀 보려다 부메랑을 맞은 거겠지. 그 과정에서 가이드라고 오해받은 거고.

참나, 동생은 그렇게 비밀로 하려고 애를 쓰는데, 오빠라는 인간이.

“원래는 바꾸려고 했는데, 마음을 바꿨습니다.”

“음? 인제 와서? 어떻게 바꾸려고요?”

“당기려고요.”

연우는 생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한연우가 한 발짝씩 다가올 때마다 샐리맨더의 포위망도 좁혀지고 있었다. 이상원은 차분히 검을 들어 올려 한연우를 응시했다.

연우는 옅게 웃어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여유로운 척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온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연우야. 나 믿지?]

어느새 어깨에 자리를 잡은 드래곤이 연우의 볼에 머리를 비볐다. 연우는 드래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가만가만 호흡을 골랐다. 드래곤이 테이밍하고 있는 마수들이다.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조금의 불꽃도 피우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떨리는 두 손을 마주 잡자 차헌이 떠올랐다. 제 손을 단단히 붙잡아주던 크고 서늘한 손이.

…보고 싶네.

작게 중얼거린 연우가 고개를 들어 이상원을 바라보았다. 이상원은 싱글싱글 웃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위협하는 것처럼 연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깨에….”

아, 내가 아니라 드래곤이었구나. 연우는 드래곤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며 이상원에게 물었다.

“얘가 누군지 궁금해요?”

작게 끄덕이는 턱을 본 연우가 드래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음, 강차헌 에스퍼 밑으로 들어가면 알려줄게요.”

연우의 말에 이상원의 발아래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일렁이는 불꽃에 연우는 눈을 감았다. 손가락 사이를 빠듯하게 벌린 채 비집고 들어오던 서늘한 손가락을 상상하며, 그 손이 주는 포근함과 안락함을 떠올렸다.

그동안 열기를 가라앉힌 이상원이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알아요, 한연우 에스퍼? 강차헌 에스퍼는 팀을 못 만들어요.”

이상원은 자신이 계속해서 토벌대의 대장일 것이고, 강차헌을 위한 팀은 당분간 만들어지지 않을 거라 주장했다. 저렇게 확신에 가득 차서 말하는 걸 보니, 협회에서 정보를 흘린 모양이었다. 그래 놓고 공익을 위한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들먹이며 책을 뜯어갔단 말이지. 혀를 찬 연우는 빈정거리는 이상원을 응시했다.

“들어올 거면 강차헌이 내 밑으로 들어와야지.”

“이상원 에스퍼는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상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엔 연우가 이상원에게 웃어줄 차례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요.”

연우는 서서히 내려가는 이상원의 입꼬리를 보며 계속 말했다.

“궁금하지 않아요? 차기 센터장이 누가 될지, 몇 년 뒤 태어나는 S급 가이드의 짝이 누가 될지.”

설마. 중얼거린 이상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누굴 생각하고 있는지 뻔했다. 전자는 차헌이 맞지만, 후자는 아니다. 연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던 이상원이 악에 찬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냐고, 동생한테 들러붙어 살아가는 거머리 주제에. 당장 미래에 대해 아는 대로 털어놓으라며 살벌하게 협박했다. 연우는 이상원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역시 저 두 가지를 가장 신경 쓰고 있었던 게 맞았군. 연우는 버튼이 눌린 인형처럼 악을 쓰는 이상원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소란 속에 이상원의 어깨에 타는 것에 성공한 드래곤은 연우와 눈이 마주치자 윙크를 보냈다.

[나 귀 아파. 빨리 끝내자.]

짧게 고개를 끄덕인 연우가 제 멱살을 잡고 있는 이상원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순간 드래곤이 몸집을 키우며 본래의 크기로 돌아갔다. 길게 기지개를 켜며 느릿느릿 기어간 드래곤은 이상원은 물론 샐리맨더들까지 포위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모습에 이상원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드래곤…?”

“알려드리자면 앞으로 4년 뒤, 당신은 혼자 부산물을 차지하겠다며 동료들을 배신한 다음, 동굴형 던전에서 드래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넋을 잃은 채 드래곤을 올려보고 있던 이상원이 한 박자 늦게 물었다.

“뭐라고?”

“말했잖아요. 미래를 앞당길 거라고.”

담담하게 대답한 연우가 이상원의 손을 뿌리치듯 놓았다. 이상원을 내려보던 드래곤의 황금빛 눈동자가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조만간 내 키를 따라잡겠는데. 상황에 맞지 않는 태연한 중얼거림에 이상원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연우와 드래곤을 번갈아 보았다.

“죽을 거면 혼자 죽지 그랬어요. 당신이 동료들을 배신하는 바람에 연합팀이 몰살을 당했는데… 그 사람들이 죽든 말든 알 바는 아니지만, 거기에 제 동생….”

끔찍한 기억이 머릿속을 비집고 튀어나오자 주먹을 쥐고 버티던 연우가 이상원을 내려보았다.

“그 미래를 바꾸려고 갖은 애를 써봤지만, 결국 당신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동료들을 배신하며 모두를 개죽음으로 몰고 가더군요. 대체 어떻게 하면 당신이 그 욕심을 버릴까, 생각해봤는데. 제일 확실한 방법은 싹을 잘라버리는 것 아니겠어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질문과는 다르게 이상원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있었다. 연우는 대답 대신 제 옆에 납작 엎드린 드래곤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제 먹어도 돼?]

연우는 이상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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