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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03화 (103/143)

103화

“안 씻을 거야?”

침대에 엎드려있던 차헌은 고개만 돌려 화장실에서 나오는 연우를 쳐다보았다. 슬며시 시선을 피한 연우는 멀리 돌아 드라이기를 찾았다. 평소에는 잘 말리지도 않으면서 부산을 떠는 걸 보니 자신을 피하는 게 분명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쫓아갈걸 그랬지.

미성년자 어쩌고 하는 연우를 어르고 달래가며 옷 속으로 손을 넣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손에 쥐자마자 놀란 연우는 씻고 나오겠다며 퍼드득 화장실로 도망갔다.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며 서른세 살이 무슨 미성년자냐고 따져져도 연우는 잠긴 문을 열지 않았다.

씻을 거라는 소리에 차헌은 파들거리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씻긴 뭘 씻어! 방금 씻고 나왔으면서! 침대에서 펄떡거리던 차헌은 물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천천히, 차근차근, 놀라지 않게. 그렇게 다짐했건만 연우와 닿기만 하면 며칠 굶은 개처럼 달려들게 된다. 그래, 형이 달려들면 나라도 놀라서 도망갔… 을 것 같진 않은데. 좋다고 쌍수 들고 환영했겠지. 하지만 형은 아닐 수 있어. 성난 마음을 달랜 차헌은 어느새 화장실에서 나온 연우가 벽에서 침대를 꺼내는 걸 보고 깜짝 놀라 튀어갔다.

“그건 왜 꺼내요?”

“응? 자고 갈 거 아니야?”

“그냥 같이 자면 안 돼요? 침대도 넓은데.”

“넓다고? 저게?”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침대 크기에 연우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고 물었고, 차헌은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망설이던 연우는 이내 마음대로 하라며 드라이기를 집어 들었다. 드라이기를 앗아 쥔 차헌이 귀에 자극이 가지 않도록 조심조심 머리를 말려준 다음 씻고 나오자, 연우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찬물로 씻는 것도 모자라 이능을 사용해 얼음물에 씻고 나왔는데도, 편한 옷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는 연우를 보자마자 몸에 열이 올랐다.

진정하자. 상대는 한연우다. 저 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다.

길게 심호흡한 차헌은 통화하는 연우에게 안겨드는 대신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텅 빈 냉장고에 챙겨온 식품을 챙겨 넣고 있으니 연우가 다가왔다.

“누구예요? 동생?”

“음? 응, 동생. 자는지 연락이 안 되네. 이건 뭐야? 베이컨? 베이컨을 뭘 이렇게 샀어.”

“샐러드 한 번 해 먹으면 다 먹어요.”

뿌듯한 얼굴로 냉장고를 둘러보던 차헌은 한쪽에 놓인 달걀을 쳐다봤다. 내일 아침엔 토스트를 먹을까. 따뜻한 커피 정도는 괜찮겠지. 힘들면 얼음을 넣어주면 되는 거고. 안 되면 내가 평생 식혀주면 되는 거지. 다짐한 차헌이 침대에 누웠다. 자기 전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끝낸 연우가 침대에 올라올 때까지 손발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차헌은 은근슬쩍 몸을 붙였다.

“형, 나 잘 자라고 뽀뽀.”

“응?”

“나 지금 애잖아요.”

애 취급을 하니 끝까지 애 취급을 받아야겠다. 차헌은 입술을 내밀고 뽑뽑 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기가 막힌 듯 웃음만 흘리던 연우가 손을 뻗었다. 볼에 닿는 감촉에 살며시 눈을 감자 입도 아니고 볼도 아니고 이마에 따스한 감촉이 내려앉았다.

“잘 자.”

멀어지려는 연우를 붙잡고 입을 내밀었지만, 그는 손을 들어 입을 가린 뒤 이불을 꼬물꼬물 덮더니 그대로 잠을 청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차헌이 손가락을 들어 연우의 코끝에 가져댔다. 손에 닿는 미약한 숨결에도 안심하지 못한 차헌이 연우의 허리를 감았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어 눈을 감았다.

한 번씩 충동이 들었다. 혼자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머리를 쪼개 그 속의 연우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사실 협회가 내준 과제는 어제로 끝이 났다. 과제를 하는 내내 따라다니며 참견하던 직원은 마지막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대로 소속만 정하면 될 것 같다는 눈치에도 차헌은 말없이 연우가 있는 큐브로 향했다. 어디가 됐든 소속을 정하는 순간 연우와 떨어져 지내야 했다. 그럴 바에야 계약을 최대한 미룬 다음 연우가 뭘 하는지 지켜볼 계획이었다. 예전처럼 또 그런 짓거리를 한다면 바로 말릴 수 있도록 연우의 곁을 지킬 생각이었다.

“안 자?”

얼마나 연우를 쳐다보고 있었을까. 뒤척거리던 연우는 돌아누워 차헌과 눈을 맞췄다. 잠이 가득한 눈으로 차헌의 안색을 살피던 연우가 팔을 뻗어 차헌의 어깨 언저리를 도닥거렸다.

“악몽 꾼 건 아니지?”

“네.”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악몽일까 봐 두려웠다. 눈을 뜨면 센터장실에 혼자 앉아 있는 상상은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했다. 그럼 일찍 자라며 웅얼거리는 연우의 손을 잡고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연우와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현실감이 눈이 시리도록 황홀했다. 어떻게 하면 이 형이 아무 생각 못 하도록 가둬둘 수 있을까.

이능 불안정자라는 증거도 있으니 에스퍼 인권 보호소에 찌른 다음 감시하는 방식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이능 제어구 때문에 어디 도망가지도 못할 거고. 그렇게 영원히 안전하게 가둬두지…. 는 못하겠군. 차헌은 연우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프건을 펑펑 쏘아대던 자그만 여자애를 떠올렸다.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 순간 미미한 두통과 함께 몽롱한 목소리가 울렸다.

‘정- -빠한- 요?’

뒤따르는 이명에 차헌이 눈썹을 찌푸렸다. 불분명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골반까지 치렁치렁하게 기른 머리카락, 핏발 선 눈동자.

‘복수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어요?’

차헌은 선명해지는 기억과 함께 목덜미를 타고 오르는 감촉에 몸서리쳤다. 장면은 빠르게 휙휙 넘어갔다. 센터장실, 연우의 집, 던전, 그리고,

‘당신은 이 이상 우리 오빠 인생에 끼어들지 말아요.’

한연화의 절규.

실망감과 벅차오름, 기대감과 비참함, 상반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짓누르는 감정의 무게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압박감에 바둥거리던 차헌은 어느 순간 반짝, 눈을 떴다.

“강차헌, 괜찮아?”

차헌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팔을 뻗어 연우를 끌어안았다.

아니요. 안 괜찮아요.

입속에서 온갖 말들이 요동쳤다. 말이 되지 못한 질문을 하나씩 엮어 물어보려던 순간 목덜미를 타고 올라온 손이 차헌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하라는 듯 입술을 짓누른 손이 허공으로 흩어진 뒤, 차헌은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차헌아?”

연우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차헌의 어깨를 흔들었다. 매일 정해진 일과만 반복하는 자신과 달리 차헌은 이런저런 과제들로 바쁜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아닌 척하지만 많이 힘들었나…? 미동 없이 누워있는 차헌의 손을 붙잡고 가이딩을 불어넣을 때였다.

“안아서 해줘요.”

눈을 끔벅거리던 차헌이 도르르 굴러 연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차헌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가이딩하던 연우는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려찍으며 일어났다. 차헌은 아려오는 허벅지를 박박 문지르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게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요. 제 얼굴 뚫리면 책임질 거예요?”

“뚫리면.”

농담에 차헌이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책임진다고 약속했어요.”

“아니, 뚫리면. 뚫린다면 책임진다고.”

“쳐다보고 있으면 언젠간 뚫리겠죠.”

안 뚫리면 제가 직접 뚫을 기세였다. 어느새 연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차헌은 한번 뱉은 말은 무효 처리 못 한다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형은 진짜 저 책임지고 살아야 해요.”

평생. 완벽한 협박조에 힘없이 웃던 연우는 차헌의 새끼손가락에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책임을 안 질 거면 뽀뽀도 안 했겠지.

“여기 사인도 해요.”

요구에 따라 손바닥에 의미 없는 그림을 그리고 나니 차헌이 고개를 비틀어 볼을 내밀었다.

“도장도.”

연우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볼에 지장을 꾹, 찍자 차헌이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도장은 엄지손가락 맞잖아? 아닌가?”

“아니 그래도 이왕 찍는 거 입술로 찍어주면 덧나요?”

당당한 요구에 연우는 웃음을 흘리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 모습에 입을 삐죽이던 차헌은 핸드폰 벨소리에 발신인을 확인했다. 차헌이 받지 않고 엎어버리자 냉장고 문을 열던 연우가 고개를 빼고 물었다.

“누군데?”

“부센터장이요.”

“너… 허락받고 온건 확실하지?”

“맞다니까요. 아, 형 또 시리얼로 때우려고.”

재빠르게 다가온 차헌이 냉장고에서 베이컨과 달걀을 꺼내며 잔소리하자 연우가 질린 얼굴로 귀를 막았다. 시리얼에도 영양소가 풍부하다고 주장하는 연우와 제대로 된 음식 좀 먹으라는 차헌이 아옹다옹하고 있는 동안에도 벨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확인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연우의 재촉에 빵을 굽던 차헌이 혀를 차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밥 먹을 때는 뭐도 안 건드린다는데. 쓸데없는 용건이기만 해보라며 이를 갈던 차헌은 심각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읽어 내려갔다.

“왜?”

“이상원이 실종됐대요.”

부센터장에게 온 메시지였다. 도움이 필요하다며 당장 연락을 달라며 재촉하고 있었지만, 차헌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러다 불현듯 연우를 돌아보았다. 연우는 이상원이 실종되었다는 말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프라이팬의 빵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빵을 뒤집는 연우를 지켜보던 차헌은 헛웃음을 흘리며 생각을 털어냈다.

형이 관련되어 있을 리가 없겠…지?

차헌이 말없이 연우를 관찰하는 사이 연우의 핸드폰에서도 벨소리가 울렸다. 쏜살같이 달려와 핸드폰을 확인한 연우는 눈썹을 긁적이며 차헌에게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센터장님]

“받지 마요.”

거절 버튼을 누른 차헌은 알맞게 구워진 빵을 확인했다. 센터와 계약하는 순간 한연우의 통제권을 넘기겠다며 호언장담하던 센터장은 세세한 조건을 계약서에 명시해달라고 말하자마자 미적미적 궁둥이를 빼는 중이었다. 한연우의 통제권을 넘기는 건 아깝고, 한연우로 자신을 협박하는 건 괜찮고?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리던 차헌은 연우의 앞에 토스트를 내려놓았다.

연우는 꼭 이래야겠냐는 얼굴로 김이 나는 토스트와 차헌을 번갈아보다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나 이거 먹으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냉큼 고개를 끄덕이려던 차헌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부탁이요?”

주방 장갑을 가져와 손에 끼던 연우는 입을 달싹거렸다. 달아오른 귀를 보며 방글방글 웃고 있던 차헌은 연우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그, 음, 어, 나를 좋…아하는 티를 좀… 그, 좀, 덜 낼 순 없어?”

“형은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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