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아니, 차헌아.”
연우가 달래는 목소리를 내며 손을 뻗자, 차헌이 냉큼 손을 맞잡았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게 되게 민망한데…. 센터장님이 매번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 내가 네 약점이라는 걸 알고 그러는 거잖아.”
지적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센터장은 툭하면 연우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차헌을 꼬드기곤 했으니까. 연우는 조곤조곤 센터장이 더는 그러지 못하도록 감정을 숨겨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고 있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게 가능하면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말이 왜 있겠냐고.
“그럼 센터장님이 계속 그러도록 내버려 둘 거야?”
아, 커피 타오는 거 까먹었다. 차헌은 토스트를 응시하며 연우의 말을 흘려들었다. 맞닿은 손으로 흘러들어오는 가이딩을 느끼던 차헌이 목덜미를 문질렀다. 나중에 잇자국이라도 내달라고 해볼까. 그럼 귀찮게 구는 가이드가 반은 떨어져 나갈 텐데.
“강차헌.”
“네.”
퍼뜩 고개를 든 차헌은 인상을 쓴 연우와 눈을 맞췄다. 연두색 눈동자에 언뜻 노기가 비췄다.
“내가 뭐라고 했어?”
“센터장이 계속 형 잡고 협박하니까 당분간 큐브에 찾아오지 말고 성실히 과제에 임하라고요.”
“그래.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면 몰라도 센터장님한테 휘둘리고 그러면 되겠어, 안 되겠어.”
“안 되겠어요.”
차헌은 온순하게 답하면서 연우의 손을 움켜쥐었다. 이전 생에서는 왜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을까. 자신도 의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싫은 건 싫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때 조금만 더 이 사람을 빨리 만났더라면 무언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때늦은 깨달음이 후회와 함께 밀려들었다.
한숨과 함께 상념을 날려버린 차헌은 눈앞의 연우에게 집중했다. 연우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 계획이 끝나면 곧바로 센터와 계약할 생각이었다. 연우의 통제권을 넘겨받은 다음엔 의견을 존중하며 가둬…놓는 건 안 되겠지. 한연화에 관한 일이면 눈이 돌아가는 사람이니까 최대한 한연화도 센터와 계약할….
그 순간 삐이- 하는 불유쾌한 이명과 함께 깜박거리듯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센터장실에 앉아있는 한연화의 모습이었다. 그 여자랑 센터장실에서 겸상한 적이 있었던가? 의문이 들기도 전에 이명이 점점 커지며 머릿속이 백지화되었다.
“-헌아.”
연우를 돌아본 차헌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굳어있던 차헌의 얼굴에 점차 화색이 돌았다.
“방금 뭐라고 불렀어요?”
“차헌아.”
“아니, 헌이라고 불렀잖아요. 다시 한번 불러봐요.”
“뭔 소리야. 내가 언,”
“지금 몇 시야, 정확히 일곱 시 이십일 분 사십팔 초에 그렇게 불렀어요.”
다시 한번 헌이라고 불러보라며 아득바득 조르는 차헌에게 우유나 마시라며 따라준 연우는 식은 토스트를 손끝으로 찔렀다. 이 정도면 주방 장갑이 없어도 될 것 같아 토스트를 맨손으로 쥐자 차헌이 커피를 빠트렸다며 벌떡 일어났다.
지난밤 코코아를 마실 때처럼 연우를 제품에 가둔 차헌이 컵을 쥔 손 위로 손을 겹쳤다. 안쓰럽게 파들거리는 연우의 몸을 받치고 있던 차헌은 밀려드는 가이딩에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왜 미성년자의 몸으로 돌아온 걸까, 라는 생각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몸을 기대고 있자 연우가 신호를 보냈다.
“이제 그만할래.”
밀어내는 손에 물러난 차헌이 컵을 쥐고 이능을 사용했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컵 안으로 떨어진 얼음 덕분에 커피가 미지근해졌음에도 연우는 마시기를 거부했다. 코코아도 그러더니 마시는 건 좀 힘든가…? 커피 두 잔을 제 앞으로 끌어온 차헌은 토스트를 먹는 연우를 관찰했다. 소가 여물 씹는 것처럼 하염없이 입을 오물거리던 연우는 지치는지 중간중간 코로 한숨을 쉬어가면서 열심히 턱을 움직였다. 손에 든 토스트를 던져버리고 그대로 볼이며 입술이며 가리지 않고 입을 맞추고 싶은 욕구를 억누른 차헌이 제 몫의 토스트를 베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반쯤 먹은 토스트를 내려놓은 연우가 쉼 없이 울리는 핸드폰을 눈짓했다.
“고민 좀 해보고요. 그때 그, 누구였죠? 그, 공동구역 에스퍼. 그 사람 때는 뭔가 좀 찝찝해서 같이 찾아다녔는데, 이번엔 이상원이잖아요. 또 혼자서 욕심내서 날뛰다가,”
까지 말한 차헌이 울컥한 표정으로 연우에게 팔을 뻗었다. 그날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샘이 조절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연우가 등을 도닥여주자 어깨에 이마를 비비던 차헌이 품으로 파고들었다. 차헌은 연우에게 꾸역꾸역 안긴 채로 입을 열었다.
“일단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만 하고 올게요. 센터 소속이라면 모를까 무소속 상태로 도와주는 건 센터에 빚을 지우는 거니까, 이상원이 어떻게 되든 이 상황은 저한테 유리한 패가 되겠죠.”
사람을 부려 먹었으니 대가를 내놓으라고 다그치기에도 좋고, 이번 기회에 모든 게 자신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겠지. 마음을 정했으니 움직여야할 시간이었다.
남은 토스트를 입안에 털어 넣은 차헌은 뒷정리는 자신이 하겠다는 연우를 말리며 큐브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눌어붙은 다음 연우가 뭘 하는지 지켜보려고 했는데 곧바로 떠나야 하는 상황이 못내 찜찜했다.
“지퍼.”
지적에 차헌이 곧바로 지퍼를 올렸다.
“너 그러다 진짜 크게 다쳐. 한 번 다쳐봤으니까 잘 알 텐데, 왜 그런 걸 신경 안 써?”
있는 대로 눈꼬리가 뾰족해진 연우에게 형이 챙겨주는 게 좋아서 일부러 그런다고 말할 수 없었던 차헌은 얌전히 손을 모은 채 쏟아지는 잔소리를 달게 들었다. 놓고 가는 물건이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한 연우가 워프 게이트 앞에 선 차헌에게 인사했다. 가기 싫다는 듯 발걸음을 직직 끌던 차헌이 팔을 뻗어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다음 주가 2주째인 거 알죠?”
그때까지 돌아오겠다며 약속한 차헌이 워프를 타고 사라지자, 연우는 머릿속에 울리는 음성에 대답했다.
벌써 일어났어?
[아직 졸려. 그리고 나 배고프고 또 간지러워.]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연우는 공간을 접어 드래곤이 있는 던전으로 향했다. 그 시각, 차헌은 허둥허둥 달려온 부센터장의 안내에 따라 센터의 중앙 구역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상황 설명을 해드,”
부센터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센터장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렸다. 차헌은 응접실에 자리를 잡고 센터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네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사실대로 말하라니까!”
“아니, 그게 사실인데 계속 사실을 말하라고 하시면….”
센터장의 호통에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얼음에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주먹으로 깝죽거리던 놈이 분명했다. 이상원의 말이면 죽는시늉도 할 정도로 충성스러웠던 인간이 혼자 바깥에 있는 걸 보니 이상원이 실종되었다는 건 거짓이 아닌 듯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이건 보조계 목소리.
“분명 B급 동굴형 던전이었는데, 그곳에서 나올 수가 없는 마수들이 나타났습니다. 이상원 에스퍼를 노리고 던전을 넘어온 마수가 분명해 이상원 에스퍼가 평소처럼 선두에서 지휘했습니다. 그런데 뒤따르던 순간 누가 저희를 잡아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바깥이었습니다.”
“던전 보스를 처리한 것도 아닌데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나직하게 중얼거린 센터장이 헛웃음을 흘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어주지.”
“다른 특이점은 없었습니까?”
비서의 질문에 머뭇거리던 토벌대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 이동하기 전 황금빛 섬광 같은 걸 봤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센터장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황금빛 섬광…. 등받이에 몸을 기댄 차헌이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연우는 위험 구역에 있었고, 그의 마나는 연두색이었다. 이상원과 연우를 엮을 접점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이 사건에 연우가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뭐야, 언제 왔어요?”
맞은편에 자리 잡은 윤석현이 심호흡과 함께 의자의 팔걸이를 쓸어내렸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윤석현은 입술을 길게 늘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고. 그쪽은 왜 다시 돌아왔어요? 나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 텐데.”
“제가 와야 한연우 에스퍼를 안 건드릴 테니까요.”
“뭐, 그건 맞죠. 그래서 길드는 어떻게 됐어요? 계속 얼굴 보이면 안 놔주려고 하지 않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오지랖은 여전한 윤석현이 센터장실을 눈짓했다. 차헌은 안절부절못하는 부센터장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래야 제 빈자리를 느끼죠.”
자신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면 질수록 좋다. 그럴수록 센터장은 차헌에게 매달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 바칠 테니까. 한연화까지 엮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연우의 통제권 양도로 지지부진하게 굴지는 않겠지.
“저기, 일단 윤석현 에스퍼부터 들어가시죠.”
부센터장의 호출에 천장을 올려보고 있던 윤석현이 신음을 흘리며 소파 깊이 몸을 묻었다.
“아, 내가 무슨 거짓말 탐지기인 줄 아나 봐.”
한숨을 쉬며 일어난 윤석현이 센터장실로 들어가고 얼마 뒤, 공격대장이 나타났다. 다 죽어가는 얼굴로 응접실로 들어오던 공격대장은 차헌을 발견하자마자 얼굴색을 달리했다.
“강차헌 에스퍼!”
곧바로 차헌의 옆자리를 차지한 공격대장은 부센터장의 눈치를 보면서 우는 소리를 냈다. 토벌대가 어떤 꼴로 돌아왔는지 봤냐, 토벌대도 저 꼴로 돌아왔는데 우리보고 어떻게 그 던전에 들어가라고 할 수 있냐, 그래도 강차헌 에스퍼가 와서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환히 웃는 공격대장을 보고 있자 배알이 꼴렸다.
S급이 이런 것도 못 하냐며 무시할 땐 언제고, 이상원이 없는 지금 최전방에 나서는 게 무서워 자신을 치켜세우고 있는 모습이 아이러니했다. 차헌은 공격대장의 칭찬을 적당히 흘려들으며 창문 밖을 내다봤다.
지금쯤이면 자신이 센터에 방문했다는 소식이 센터장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아마 자신을 어떻게 휘두르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 같은데, 그 계획에 눈이 멀어 이상원이 누구의 아들인지 잊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발 벗고 찾아 나서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지금 저런 여유를 부릴 순 없겠지.
A 구역에서 솟아오르는 불기둥을 확인한 차헌은 소란스러운 바깥을 등진 채 남자를 기다렸다. 잠시 후, 선명한 주황색 눈동자의 남자가 문을 불태우며 등장했다.
“우리 아들이 실종되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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